소설리스트

0과 1-36화 (36/293)
  • 36.

    두 발로 걷고 있고 두 팔을 움직이는 걸 보니 알렉스는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걸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감정도 없는 사람일 것이다.

    “맞았어? 누구한테? 너희 고아원의 착한 원장님?”

    “그 사람들은 모두 잡혔어요. 처벌당할 거래요. 왕자님 덕분에요.”

    알렉스가 말했다. 그는 전처럼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재는 것도 아닌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전부 다?”

    “예.”

    “경, 고마워. 경에게 부탁하길 잘했어.”

    바움쿠헨 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간에 일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알렉스는 바움쿠헨 경과 함께 있고 그의 미래는 밝아졌다. 내가 느끼는 안도감을 경은 이해 못 할 것이다.

    “기사가 되고 싶다며?”

    바움쿠헨 경이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어 어깨를 폈다. 그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전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제 목숨을 살려 주셨고, 제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어요. 전하께서 원하신 대로, 저는 기사가 될 거예요. 그리고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남자애 모양의 미라가 가슴에 주먹을 얹고 장중하게 말했다. 붕대에 가려져 보이는 데라곤 얼굴밖에 없는데, 그 얼굴도 지금은 반쪽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 몸이나 지켜…….

    “예?”

    “전하, 신성한 충성 맹세를…….”

    바움쿠헨 경이 말했다. 내가 무척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는 어투였다.

    경에게 무례함을 지적받다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은혜야? 내가 언제 네가 기사가 되길 원했어? 기사가 되고 싶어 한 건 너잖아. 네 아버지 바움쿠헨 경을 존경해서.

    그 바움쿠헨 경은 눈썹을 서운하게 누그러뜨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평민의 맹세는 하찮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제겐 부모도 가문도 없고, 걸 수 있는 명예도 없으니까?”

    알렉스의 고양이 같은 눈이 치켜 올라갔다.

    “두고 보세요. 전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기사가 될 겁니다. 그때는 제 맹세를 무시하지 못하실 거예요!”

    아니, 무시한 게 아니라…….

    알렉스는 팩 돌아서더니 석양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붙잡지도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니 무슨…….

    “정말 귀엽고 순진한 녀석 아닙니까? 전하의 마음에 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갖고 놀지 마, 경. 장난감 하라고 준 거 아니니까. 저렇게 달려도 괜찮은 거야?”

    “회복력이 괴물 같더군요. 상처는 대부분 회복됐습니다. 팬 놈들도 죽이려고 팬 건 아니니까요. 자세한 내막을……. 보고할까요?”

    경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내가 들어서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경은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거나 조프리가 열한 살이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됐어. 공개 처형은 그대가 한 일인가?”

    “예. 아무래도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뭘 확실히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왕비님의 세력을 확실히 뿌리 뽑았다는 소리인가? 그런 것치고 왕비님은 기분 좋아 보였는데.

    “왕비님은?”

    “방해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쳐다보지 말지? 그대는 시선이 무엄한 경향이 있어.”

    “시선이 무엄한 건 뭡니까?”

    “도트가 나중에 설명해 줄 거야.”

    “도트?”

    “내 시종. 아직도 이름을 몰랐어?”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바움쿠헨 경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충성스러운 시종 이름이 도트였습니까? 이상한 성씨네요.”

    “아니? 그건 성이 아니라 이름이야.”

    “성은요?”

    그러고 보니 나는 도트의 가문을 몰랐다.

    “모르지?”

    “전하께서는……. 참……. 좋은 분이시군요.”

    바움쿠헨 경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칭찬으로 덮어 버렸다. 그가 떠나고서야 나는 알렉스가 바움쿠헨 경의 양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다는 게 떠올랐다.

    뭐 곧 알게 되겠지. 영웅의 양자가 생기는 일이니까. 그런 일을 왕자가 모르기란 어려웠다. 사실 이 나라의 귀족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여주인공처럼 아예 망해 버린 집안이 아니라면.

    * * *

    알렉스는 마차에서 내렸다. 귀족의 마차를 타고 광장으로 진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장이 있는 마차가 아니라도, 지금의 광장은 어떤 이동 수단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바움쿠헨 백작이 알렉스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는 알렉스를 구해 준 사람이었다.

    알렉스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고맙기도 했다. 이럴 때만 아니라면.

    백작이 알렉스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쓰다듬었다.

    “크, 멋있었다. 그렇지? ‘제가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좋은 말이야. 누가 알려 줬지? 안 듣는 줄 알았더니 다 듣고 써먹었잖아?”

    “하나도 안 멋있거든요! 안 받아 주셨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

    “삐쳤구먼, 꼬맹이? 그래서 골이 났냐? 전하께서 네 맹세를 안 받아 주셔서?”

    백작이 킬킬거렸다. 알렉스는 이 술주정뱅이 같은 인간, 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은 술 한 방울 안 마시고도 이런다는 점이 거리의 술주정뱅이들과 달랐지만.

    “아니거든요. 안 받아 주실 줄 알았거든요.”

    알렉스가 반박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민은 역시 안 되는 건가? 게다가 알렉스는 고아였다. 손기술과 거짓말 외에는 별다른 재주도 없는 어린애.

    가치 없는 평민 꼬마가 충성을 바치겠다고 매달리는 것도 왕자님 입장에선 곤란할 것이다. 수많은 진짜 기사들이 왕자님께 충성하고 있을 테니까.

    “안 받아 주실 줄 알았거든요.”

    백작이 알렉스를 흉내 냈다. 아, 짜증 나! 알렉스는 백작을 노려봤다. 이 사람이 영웅이라고 불리다니 사기가 따로 없었다.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렉스도 구출 당시에는 백작이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눈부신 빛과 함께 구원이 찾아왔다. 백작의 뒤에서 후광마저 비치는 듯했다.

    ‘왕자 전하께서 왜 널 구하려 하시지? 애초에 넌 왕자 전하랑 무슨 관계냐?’

    ‘왕자 전하께서 절 구하라고 명령하신 거예요?’

    기절했다 깨어난 알렉스에게 백작은 이것저것 질문했다. 대부분 왕자님과 관련된 질문이었다. 알렉스는 왕자를 잘 알지 못하는데.

    ‘왜 기사님이 저한테 물어보세요? 왕자님을 모시는 분이니까 더 잘 아실 텐데.’

    백작이 왕자의 성품에 관해서 물었을 때, 알렉스는 되물었다. 왕자와 보낸 시간도 알렉스의 수십 수백 배는 될 기사님이 왜 그런 걸 궁금해한단 말인가?

    알렉스는 왕자와 잠깐 만났을 뿐이지만,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자님은 좋은 분이다. 그분이 왕이 되실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해졌다.

    알렉스의 질문을 들은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알렉스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헝클였다.

    ‘너 영리한 꼬맹이구나?’

    그때 알렉스의 머리는 더럽고 기름에 절어 있었다. 백작은 개의치 않았다. 알렉스는 그가 왕자님의 기사답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귀족. 이상한 왕자님.

    왕자의 기사가 그 ‘영웅 바움쿠헨 백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 다음이었다.

    ‘폴먼 바움쿠헨이다, 꼬맹아. 편한 대로 불러라. 사부든 스승님이든, 바움쿠헨 백작님이든.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말이야.’

    ‘네? 왜요?’

    ‘왕자님이 너를 내게 부탁하셨다. 정말 왕자님을 한 번 뵈었을 뿐이냐? 너도 모르는 새 그분께 좋은 일이라도 한 거 없어?’

    바움쿠헨 백작은 귀족답지 않게 권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좀 귀찮기도 했다. 대답해 준 질문도 다시 꼬치꼬치 캐물었다.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 놓고 묻지 마세요.’라고 따지니까 ‘요 영리한 꼬맹이!’하며 다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거기서 그렇게 도망치면 어떡해? 주군을 앞두고 먼저 도망가서야 기사가 되겠어?”

    백작이 웃으며 알렉스의 어깨를 잡았다. 백작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기사의 손이다. 알렉스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알렉스도 곱게 자란 편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저런 곰 발바닥 같은 손을 가질 수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타고나는 걸까? 기사는 역시 혈통을 타고난 귀족들만 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왕자님이 황당해하신 걸까. 불가능한 소리를 멍청하게 해 버려서.

    알렉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

    왕자님은 알렉스를 처음 봤을 때 말했다.

    ‘넌 검 같은 거 잘 사용할 것 같아.’

    왕자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렉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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