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5화 (35/293)
  • 35.

    어린 시종들을 내보내고 도트를 불렀다. 도트는 들어오자마자 “저 애들 너무 오냐오냐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왕자님.” 하고 투덜거렸다.

    “시종들 떠드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리더라고요. 다른 궁의 시종들이 보면 조프리 전하 궁은 시종들이 품위 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딱히 전이라고 품위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 복도를 오가며 엿들었던 여러 소문을 떠올렸다.

    “그래그래. 심부름 좀 다녀올래?”

    “어디로 가면 될까요?”

    “바움쿠헨 경 저택.”

    도트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얘는 바움쿠헨 경을 싫어하더라. 그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좋은 감정이 생기진 않는 모양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도트를 보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공개 처형이라니 스케일이 컸다. 시종들은 목이 뎅강뎅강 같은 소리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게 이 세계의 볼거리 중 하나라는 데 어떤 감상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인신매매. 노예 시장. 알렉스는 무사한 걸까.

    바움쿠헨 경은 과연 귀한 몸이었다. 왕자가 먼저 행동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 알렉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 * *

    왕비님이 나를 부른 건 밤이 다 되어서였다. 왕비님은 내가 저녁을 먹고 공부를 마칠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 나를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내겐 켕기는 일 몇 가지가 있었다. 파이 공작의 시험과 에드워드와 알렉스였는데, 뒤의 두 건은 들킬 확률이 비교적 낮았다.

    마지막 건은 더 그랬다. 바움쿠헨 경이 갑자기 나쁜 놈들을 소탕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거기에 조프리 왕자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역시 시험이겠지. 시종은 별말 없었지만 난 시험지를 챙겼다.

    다리가 무겁고 한숨이 나왔다. 난 끌려가는 사람처럼 시종을 따라갔다. 누가 보면 압송되는 범죄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시종 하나가 나를 보고 놀랐다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왕비님이 시험지를 확인하고 전국의 의사를 불러모으려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조프리에 대한 기대치를 여기서 낮춰 놓으면, 나중에 내 실력이 일취월장했을 때 왕비님도 기뻐할지 모른다.

    백 번 잘하다 한 번 못하는 것보다, 백 번 못하다 한 번 잘하면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근데 이게 경우에 맞는 말인가?

    제멋대로 생각하면서 왕비님의 사실로 들어갔다. 왕비님의 분위기가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어두웠다. 테이블에 놓인 초가 왕비님의 측면을 비춰, 코의 옆면과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조프리, 내 왕자님.”

    그러나 나를 발견하는 순간 왕비님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걷혔다. 난 왕비님에게 폐가 졸리도록 끌어안기고, 숨도 못 쉬게 입맞춤을 당했다. 내 얼굴이 약간 축축해진 뒤에야 왕비님은 나를 놓아줬다.

    얼떨떨했다. 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프리가 칭찬받을 일을 했나?

    왕비님은 조프리가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왕비님의 시녀가 내 몫의 과자와 데운 우유를 가져왔다.

    난 눈치를 살피며 우유를 마셨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알아야 대처를 할 텐데.

    왕비님은 후후 웃다가 손가락으로 왕비님의 입가를 툭툭 쳤다.

    “왕자, 우유 자국이 남았어요.”

    난 혀로 우유 자국을 닦아 내고는 아차 했다.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도트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왕비님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내 왕자님, 그건 나를 위한 선물인가요?”

    내가 들고 있는 시험지를 가리키는 거였다. 왕비님은 모른 척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듯했다.

    시험지 가져오지 말걸. 분위기를 망칠 아이템을 제 발로 가져왔다.

    난 시험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네. 이번에 시험을 봤는데, 선생님께 칭찬받았어요. 그 답안지에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칭찬 비슷한 걸 듣긴 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왕비님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주변을 비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머나. 파이 공작이 칭찬을? 이 어미가 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어마마마. 어마마마께 보여 드리려고 가져온걸요.”

    말은 잘한다. 난 시험지를 넘기고 왕비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왕비님의 사실은 화분과 화분을 그린 그림과 피아노로 장식돼 있었다. 검은 피아노는 윤이 났다. 긴 줄기를 늘어뜨린 생화가 피아노 뚜껑을 건들고 있었다.

    왕비님의 침묵이 길었다.

    “어머나, 왕자. 문장을 잘 쓰게 되었군요. 흐름도 적절하고 비문도 없네요. 잘했어요.”

    이윽고 왕비님이 칭찬했다. 허술한 내용에 대한 언급은 뛰어넘고, 칭찬할 점만 찾아서 말한 듯했다.

    어쨌든 칭찬이었다. 난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왕비님은 웃고 있었다.

    저 미소에도 숨겨진 의미가 있을까? ‘내가 말은 안 했지만, 네 부족한 점을 알겠지?’라는 표정 같지는 않았다. 왕비님은 순수하게 기뻐 보였다.

    왕비님이 조프리에게 무르긴 했지만, 조프리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학업 스트레스를 주는 타입이라고도 생각했는데.

    사실 왕비님의 기대치는 별로 안 높았던 게 아닐까? 물론 조프리에게 네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주시긴 하지만, 아직 조프리도 어리고 하니까. 공부에 대해서는 크게 말씀 안 하시려는 게…….

    “그래서, 에드워드는 어땠나요? 파이 공작의 칭찬을 받았나요?”

    왕비님이 웃으며 물었다.

    에드워드? 여기서 왜 에드워드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시험 볼 때 잤어요.”

    난 사실을 말했다.

    “저런, 아무도 안 깨우던가요?”

    “네. 원래도 수업을 잘 듣지 않으니까…….”

    “학업 태도가 좋지 않군요. 왕국의 1왕자가. 곤란한 일이네요.”

    “네…….”

    왕비님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내 왕자님은 물들지 말도록 해요. 조프리 왕자에겐 미래가 있으니까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해도 충분해요.”

    “네, 어마마마.”

    뭔가 엄청난 걸 들은 것 같다. 조프리에겐 미래가 있다니.

    에드워드에겐 미래가 없단 소리인가?

    왕비님은 조프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인데도 가슴이 답답했다. 체할 것 같았다.

    조프리도 이런 칭찬 받아서는 기쁘지 않을 텐데.

    왕비님은 조프리를 한껏 칭찬해 주고 본래 용건을 꺼냈다.

    “그래요, 왕자. 이제 왕자도 나이가 찼으니 나라의 일에 참여하지 않겠어요? 아직 왕자는 자선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죠? 왕자에게도 경험을 시켜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자선 파티요?”

    내가 되물은 건 고아원 일이 찔려서였지만, 왕비님은 내가 관심을 보인다고 느낀 듯했다.

    왕비님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요. 흥미 있을 줄 알았어요. 이 나라의 교양 있고 학식 있는, 왕자가 어울릴 만한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예요. 왕자도 얼굴을 알려 두는 게 좋겠죠. 어떤가요, 왕자. 파티에서 이 어미를 에스코트 해 주겠지요?”

    “네, 어마마마. 영광이에요.”

    “어머나.”

    난 왕비님에게 입맞춤을 받고 나왔다. 내 시험지는 선물로 드려서 두 손이 홀가분했다.

    왕비님은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 했다. 시험지를 탐내는 손길로 만지시길래 그냥 드린 거였는데, 왕비님이 예상외로 즐거워해서 놀랐다. 조프리는 자기 시험지를 이제껏 어떻게 처리했던 걸까? 왕비님께 드리지는 않은 듯했다.

    그나저나 자선 파티라니 정말 왕자 같다. 열한 살이라고 방심했는데, 앞으로 조프리에게 공부 외 일정이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궁으로 돌아가자 도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움쿠헨 저택은 왕성에서 거리가 멀지 않았다. 다녀오는 데 예상외로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도트는 묘한 표정이었다.

    “왕자님, 바움쿠헨 경에게 다녀왔어요.”

    “어떻게 됐어?”

    “내일 수업을 재개한대요.”

    “아이는?”

    “내일 데려온댔어요.”

    “좋아.”

    의자에 주저앉았다. 두통의 원인이 하나 사라졌다. 앞으로 조프리는 바빠질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발 뻗고 자도 될 것 같다.

    다음 날 수업 시간 바움쿠헨은 윤기 나는 얼굴로 나타났다. 그의 뒤로는 붕대를 온몸에 둘둘 감은 알렉스가 있었다.

    내 표정을 본 알렉스는 “보이는 것만큼 다치지 않았어요.”라고 멋쩍게 대답했다.

    보이는 만큼 다쳤으면 넌 미라야.

    그때 돌려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알렉스는 무사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저 꼴을 무사하다고 말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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