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4화 (34/293)
  • 34.

    그래 봤자 재상은 그레이랑 비슷한 과의 얼굴이라 상냥한 인상은 아니었다. 예의 바른 미소를 가면처럼 뒤집어썼다는 느낌. 눈이 날카롭고 뺨에 살이 없어서 소싯적에 어린아이 좀 울려 봤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까지 다가오려는 거지? 보통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인사하던데. 재상은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프리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거리가 코앞이었다. 난 인사를 받았다.

    고개를 든 재상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엔 제 인사를 받아 주시는군요. 전엔 신이 이리를 닮았다고 싫어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레이의 눈이 험악해졌다.

    조프리, 너 또 무슨 짓 했냐?

    “그런 일이 있었나? 내가 무례했군.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어린아이의 낯가림이라 관대히 보아 넘겨 주어. 보다시피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말이야.”

    “예, 물론 괘념치 않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편히 대해 주시니 기쁠 뿐입니다.”

    정말 괘념치 않았으면 말도 안 꺼냈을 터였다.

    “제 아들이 신세를 졌다고요. 전하께서 보살펴 주셨다 들었습니다. 감사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무슨 신세? 내가 감사받을 일이 있나?

    그레이가 헛기침을 했다.

    아아. 알겠다. 그레이가 조프리 옷을 입고 돌아간 날.

    “아아. 수업 시간에 몸이 안 좋아 보이기에 잠시 궁에 들렀다 가라고 권했어.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니야. 그레이에게는 늘 학업에 도움을 받고 있고…….”

    어제 하루 받아 봤고.

    “……차분하고 늘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어 함께 수학하는 친구로 기쁘게 지내고 있네. 친구를 돕는 일에 감사 인사를 받는 것도 이상하군.”

    “그렇습니까? 전하께서 제 아들을 높이 평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제 아들이긴 하지만 어른스럽고 영특해 저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말년에 하나뿐인 기쁨이니까요.”

    재상이 하하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활짝 펴졌다. 뭐야, 평범한 팔불출이잖아.

    “그럴 만해. 늘 자랑스럽겠군.”

    “예. 부모로서 이런 복이 다시없겠지요. 다만 또래에 비해 워낙 영민한 데다 말수도 적어서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전하께서 이리 아껴 주시니 한시름 놓았습니다.”

    “아니네. 나야말로 그레이 같은 친구를 두어 기쁘기 한량없는…….”

    “아닙니다, 전하…….”

    “하하.”

    “호호.”

    재상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레이는 어른스럽고 영특한 아들답게 의젓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재상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는 완벽한 성품의 소유자인 데다 역사, 수학, 연금술, 시,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전하께서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제 아들은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는 성품이 아니니까요.”

    정말 놀라운 일이긴 했다. 내가 오호, 흐음, 하면서 그레이를 쳐다보는데도 그는 발끈하지 않았다. 내 칭찬에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재상이 아차 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전하. 대화가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다음에 괜찮으시면 저희 집을 찾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내도 기뻐할 겁니다.”

    “초대해 주면 기쁘게 응하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아이에게 전하께서 즐겨 드시는 메뉴를 들어 두겠습니다. 주방장도 전하를 위해 요리하게 되어 영광일 겁니다. 그레이, 너는 전하를 모시거라.”

    “예, 아버지.”

    재상이 떠날 때까지 그레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더니 재상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안면 근육을 풀었다.

    우리는 말없이 교실로 향했다. 건물 복도를 지나가는데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할 말 없는데?”

    “있으시잖아요.”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그레이 군, 교실이야.”

    그레이가 조용해졌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

    팔불출 부모님이라면 왕비님 덕에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팔불출인 건 아이에게 딱히 원인이 있지 않았다. 부모님의 애정 필터가 아이의 모든 결점을 걸러 버리는 것뿐이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자리를 확인했다. 에드워드가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쓰러지진 않았나 보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내가 들어온 걸 확인하고 다시 책에다 낙서를 했다.

    평소의 에드워드였다. 수업을 들을 의지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몸 상태를 슬쩍 묻고 싶었지만 수업이 시작됐다. 파이 공작이 나와 그레이를 차례로 바라봤다.

    “늦으셨군요.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의자를 빼 앉았다. 어쩌다 보니 에드워드의 옆자리였다.

    파이 공작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두 분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밀리엄 공주의 결혼 동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밀리엄 공주의 일기는 객관성이 결여된 사료지만 당시 정황이 자세히 서술된 거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밀리엄 공주 이후에는 결혼 동맹이 한동안 이뤄지지 않았는데…….”

    파이 공작의 수업에 맞춰 에드워드가 펜을 움직였다. 이상한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삼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육각형을 그리고……. 그렇게 만든 도형으로 책의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건 또 뭐 하는 짓이지.

    그때 책상 밑으로 누군가가 내 손을 툭 건드렸다.

    깜짝 놀라서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이상한 도형을 그려 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다른 손이 내 손등을 살짝 건드렸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등이 간지러웠다.

    뭘까. 이 고양이 같은 접촉은.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조프리 전하께서 자신 있으신 것 같군요. 셔벗 왕국과의 결혼 동맹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파이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레이가 한 손을 들고 있었다. 파이 공작은 내게 대답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헛기침을 했다. 그런다고 못 들은 수업 내용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진 않았다. 배시시 웃으며 파이 공작을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고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145페이지입니다, 전하.”

    “네, 선생님.”

    책장을 넘겼다. 파이 공작이 이어 말했다.

    “그레이 군. 대답해 보세요.”

    그레이는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한번 본 뒤 입을 열었다.

    “벤자민 왕자와 딜런 셔벗의 결혼은 이전의 결혼 동맹과 차별되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두 사람이 동성이었다는 것이고…….”

    평소와 같은 수업이었다. 그레이와 파이 공작이 둘만의 세계로 들어가고 에드워드는 딴짓을 한다.

    평소와 다른 점은 에드워드의 간지러운 접촉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랍도록 기분이 좋아졌다.

    흠. 호감도 하트 하나쯤 적립한 게 아닐까.

    * * *

    궁으로 돌아가니 나만큼이나 시종들도 들떠 있었다. 저녁때쯤 어린 시종들이 내 침실로 몰려왔다. 내가 사용한 방을 정리하고 그 김에 수다도 떨러 오는 거였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주제가 정해져 있었다.

    “공개 처형?”

    “네, 왕자님! 지금 광장에 공개 처형대를 설치하고 있대요!”

    “사형수들이 내일 정오에 처형당할 거래요.”

    “재미있겠죠? 멋있겠죠? 나도 보러 가고 싶다!”

    “그런 걸 보고 싶어?”

    어린 시종들이 와와 떠들어 댔다.

    “하지만요, 왕자님도 보고 싶지 않으세요? 공개 처형이잖아요!”

    “맞아요, 자주 안 한다고요. 흉악범들이라고요. 정의 구현이에요!”

    “죄목이 뭔데?”

    “몰라요?”

    어린 시종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뒤에 있던 시종이 타박했다.

    “바보야. 살인이지, 당연히!”

    “네가 더 바보야. 아니거든? 내가 정확히 들었거든?”

    “반역 아니야, 반역?”

    “쉿, 멍청아! 불경한 소리 하지 마!”

    “도둑 아니야?”

    “바보들. 내가 들었다니까?!”

    곱슬머리 시종이 짜증을 냈다. 다른 시종들은 듣고 있지 않았다. 각자 떠드느라 바빴다. 강도다, 아니다, 연쇄 살인마다, 도통 합의를 못 보고 있었다.

    “인신매매범이야. 노예 시장 사람들이라고. 내가 들었어. 우리 같은 어린애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먹는대!”

    곱슬머리 시종이 주장했다.

    “정말 들었어? 어디서?”

    귀여워서 상대해 주자, 곱슬머리 시종은 수줍어졌다.

    “왕비님 궁의 시종에게서요.”

    아, 거기.

    정보의 신뢰도가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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