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3화 (33/293)
  • 33.

    에드워드의 백지 같은 얼굴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황금을 뽑아 만든 듯한 머리카락이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난 뒤를 돌아봤다.

    “에드워드한테 전할 말 있었어?”

    “아니요.”

    그레이는 한 발자국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남들이 보면 짜증 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표정을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괜찮아.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레이는 품에 들고 있던 책 중에서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받으세요. 밀리엄 공주의 일기예요. 희귀본이라 왕성 도서관에도 한 권밖에 없대요.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아, 오늘 수업한 거? 이거 가져다주러 온 거야? 고마워. 읽고 왕성 도서관에 돌려놓으면 돼?”

    “아니요? 그건 제 개인 소장본이고요.”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근데 나 읽으라고?”

    “네.”

    뭐가 이상하냐는 듯 그레이는 뚱한 시선을 보냈다. 당연히 이상하지. 너랑 내가 언제부터 서로를 챙기는 사이였다고 그래?

    “고마워.”

    하지만 호의를 발로 걷어찰 필요는 없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

    그레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일어났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벌써?”

    “병문안이니까요. 두 분 전하가 잘 계시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에요. 잘 지내신 것 같네요. 예상보다 더.”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돌아봤다. 잠든 에드워드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단잠을 자는 얼굴이었다. 에드워드는 좋아 보였고, 그레이도 나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가 나랑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게 싫은 듯했다.

    이젠 그레이가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레이에게 파렴치한 취급을 받는 게 행복하진 않았다.

    그레이의 호감도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레이, 우리 다음 시험은 언제일까?”

    질문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나갔다.

    그레이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일.

    시험?

    생각은 뒤늦게 떠올랐다.

    그레이가 질색했다.

    “시험이 언젠지도 모르고 공부하고 계셨어요?”

    “시험 날짜가 정해져 있는 거였어? 선생님 마음대로인 줄 알았는데.”

    “매번 보는 시험인데 아직도 모르셨다고요? 그럼 지금까지 시험 대비는 어떻게 해 오신 거예요?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네요.”

    “시험 대비라니, 시험은 매일 하는 공부를 평가하는 자리잖아. 따로 대비를 해?”

    그레이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의 프로세스에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조프리에게 말로 지기는 싫은데 대답할 말이 안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난 탈출구를 줬다.

    “그래서 시험이 언제라고?”

    “……주제를 하나 끝낼 때마다 시험을 치르잖아요. 진도를 나가는 속도와 해당 주제를 생각하면 대강 언제쯤 시험을 치를지 예상할 수 있죠. 이번엔 부흥기의 내치에 관해 공부했고, 다음 시험은 결혼 동맹에 관해서겠죠. 예상 시험일은 다다음주가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그 전까지 저는 결혼 동맹사 전권을 읽을 거고요.”

    그레이가 눈빛으로 나를 도발했다. 물론 왕자님도 읽으시겠죠, 학생의 기본이니까요, 라는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읽기 싫은데.

    하지만 그레이의 호감을 얻어 보기로 했으니까.

    “물론 나도 전권을 읽을 거야.”

    “전 풀문이 쓴 셔벗 왕국 연대기도 읽을 거예요.”

    “나도 읽을 거야.”

    “전 내일까지 읽을 건데요.”

    “선생님이 한 권을 읽어도 바르게 읽으라고 하셨어.”

    “제가 바르게 읽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들렸어?”

    이상했다. 그레이에게 맞춰 주려고 마음먹었는데 어느새 싸우고 있었다.

    “다음 시험에서 누가 칭찬받는지 두고 보죠!”

    “난 이미 결과를 알 것 같은데.”

    “자신만만하시군요? 좋아요. 기쁜 마음으로 결전일을 기다릴게요!”

    당연히 네가 칭찬받겠지.

    뭘 기다려. 네가 이미 이겼어. 상대도 안 돼.

    그레이는 흥분해서 사라졌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에드워드는 그레이랑 어떻게 잘 지내는 걸까. 역시 그레이가 인정할 만큼 머리가 좋아서?

    천재만 친구로 받아 준다니 허들이 높았다.

    쟤 호감도 올릴 수 있는 거 맞나?

    어쨌든 노력은 해 보자 싶어 책을 펼쳤다. 천재는 될 수 없어도 노력은 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그레이를 공략하려고 플레이했다면, 난 여주인공 스케줄을 전부 공부로 채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의 등장 장소는 학생회실과 도서관이었다. 캐릭터성이 확실하긴 했다. 공략이 진행됐다면 도서관 데이트 같은 거 하지 않았을까. 서로 공부를 가르쳐 주고 교학상장 하는…….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은 내 여주인공이 그런 괴로운 일을 겪어야 할까?

    내 성적이나 올리자.

    난 그레이가 가져다준 책을 펼쳤다. 책은 결혼 동맹에 관한 사적인 기록을 엮은 거였다. 결혼 동맹 당사자인 밀리엄 공주가 직접 작성한, 당시의 정황과 자신의 감정에 대한 기록. 다시 말해 남의 일기장…….

    내용은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침실이 서재만큼 조용하지 않아서일까?

    등과 엉덩이는 푹신하고 옆에서는 에드워드가 뒤척였다. 확실히 집중이 덜 되는 환경이었다.

    커튼을 투과한 오후의 햇살이 침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에드워드가 너무 평온하게 잠들어 있어서 나도 하품이 나왔다.

    “왕자님, 다른 곳에서 주무세요. 또 침대에서 에드워드 전하랑……. 감기라도 옮으시면…….”

    도트의 목소리가 먼 데서 들렸다. 수면제라도 먹은 듯했다.

    괜찮아. 안 옮아.

    다른 사람에게서 감기를 옮는다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조프리의 하루 일정은 어린아이가 소화하기엔 빡빡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밤에 녹초가 되서 잠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 일과에는 침대 위에서 한두 시간씩 잠을 설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증상이 말로만 듣던 불면증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어제는 거짓말처럼 쉽게 잠들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알렉스랑 잠들었을 때.

    어린아이의 체온에 무슨 효과가 있는 걸까?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워서인가. 옆에 두면 졸려졌다.

    왕비님께 강아지를 길러도 되냐고 물어볼까. 금발의 대형견으로.

    난 예전에 강아지를 기르고 싶었다. 공간의 제약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강아지를 기르는 데는 필요한 게 많았다. 돈과 시간과 정성 같은 것들.

    지금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데.

    강아지랑 보내는 시간은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도 좋았다. 이 점을 들어 왕비님을 설득하면 먹힐지도 모른다.

    눈을 떴다.

    또 잠들었다.

    베개에 기댄 등이 어느 사이엔가 매트리스에 닿아 있었다. 누군가 이불을 덮어 주고 간 것 같았다. 온몸이 노곤했다.

    애매한 시간에 깼다. 눈을 뜨지 않아도 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수면제보다 효과 좋구나, 에드워드.

    무심코 손을 뻗었는데 옆이 휑했다. 에드워드가 만져지지 않았다.

    몸을 반 바퀴 굴려 에드워드가 누워 있던 자리를 봤다. 흰 커버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갔구나.

    가 버릴 줄 알았다. 에드워드는 확실히 대형견 같지는 않았다. 사람을 안 따른다.

    잠이 달아나서 그냥 일어났다. 책이나 마저 읽어야겠다.

    혹시나 해서 욕실에도 들어가 봤지만 에드워드의 흔적은 없었다.

    8. 일상

    난 다시 잠들지 못하고 파이 공작의 수업에 나갔다. 에드워드가 나올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 체온계로 열을 재 볼 생각이었는데, 에드워드가 가 버리는 바람에 결국 비전문적인 진단과 처방만 한 꼴이 됐다.

    대로를 가로질러 가는데 정면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빳빳하게 다린 셔츠에 조끼. 발에 맞는 구두까지 챙겨 신은 싸늘한 미소년이었다.

    그레이 크래커. 그는 배우처럼 생긴 중년 남성과 함께였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닮아서 백 미터 밖에서 봐도 가족 같았다.

    아버지인가? 그레이의 아버지라면 재상이었다. 난 재상이 나를 먼저 알아보기를 기다렸다.

    도트가 알려 주지 않아도,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 높은 사람이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었다.

    조프리가 먼저 인사해야 하는 상대는 왕과 왕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조프리가 먼저 인사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아닌가. 왕은 아주 관심이 많았던 것 같기도 했다. 조프리가 먼저 인사를 하든 말든 조프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정정해야겠다.

    재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바로 알아본 것 같았는데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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