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2화 (32/293)
  • 32.

    “더듬을 필요는 없거든.”

    내가 알려 줬다. 에드워드는 그렇구나, 하더니 자기 목을 만져 봤다.

    “네 체온이 낮은 거 아냐?”

    에드워드가 새로운 가설을 추가했다.

    “아니야.”

    “정말?”

    “이거 내가 알려 준 방법이지?”

    “응.”

    “그럼 내가 더 잘 알겠지?”

    “…….”

    “불리할 때만 입 다물지 마.”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허를 찔린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짓을 했다. 우겼다는 소리다.

    “그런 거 아닌데.”

    “웃기지 마. 다 알거든.”

    에드워드는 침묵시위에 들어갔다. 난 무시하고 에드워드의 뒤에 베개를 받쳐 줬다.

    “누워 있어. 아침거리 가져올 테니까. 밥 먹고 약 먹고 한숨 자면 나을 거야.”

    에드워드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고양이처럼 나를 따라오는 건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내가 하라는 대로 했다. 베개에 기대서 나른하게 눈만 깜빡였다. 나는 그의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줬다.

    “어제도 자니까 좀 나아졌잖아. 사실 배고파서라도 중간에 일어날 줄 알았는데. 피곤했던 거 아냐?”

    “…….”

    “이것도 대답하기 싫어?”

    “…….”

    에드워드는 고집이 셌다.

    난 웃어 버렸다. 누구 성격을 닮은 걸까? 왕은 아니겠지. 이렇게 귀여운데.

    에드워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답을 일부러 안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어. 난 생각하는 속도가 느리니까.”

    “그래? 생각 다 했어?”

    “응.”

    “피곤해?”

    “그런가 봐.”

    “그럼, 역시 쉬어야겠네.”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했다. 꿍꿍이속이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영리하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다. 남의 속셈을 간파하는 건 보통 경험이 가져다주는 지혜다.

    에드워드가 눈부신 듯 눈을 깜빡였다.

    “응. 그럴게.”

    난 에드워드를 두고 복도로 나갔다. 마침 시종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를 파이 공작에게 보내 오늘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가벼운 감기 기운이 있다고.

    파이 공작은 내 상태를 왕비님께 이러쿵저러쿵 전달하지 않았다. 상대가 물어보지 않은 질문엔 대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우리의 수업 태도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나와 에드워드가 넋을 놓고 있어도 가만 놔두는 걸 보면 알았다.

    내가 수업을 하루쯤 빠진다고 신경 쓰진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은 자유 시간이었다.

    난 이 시간을 에드워드와 보낼 계획이었다.

    유연호가 연애 공략 게임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략 캐릭터를 간호하는 이벤트는 호감도를 올리기 쉽다고. 유연호 표현에 따르면 보너스 이벤트였다.

    이론상 그럴듯했다.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고. 옆에 누구라도 있어 주면 그 사람이 고마워질 수밖에 없었다. 혼자 아픈 건 외로우니까.

    “조프리.”

    에드워드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희다 못해 창백한 손가락이 문을 붙잡고 있었다.

    “우리 수업은? 이미 지각인데.”

    “안 가도 돼. 방금 연락했어.”

    “아.”

    “그거 고민하고 있었어? 쉬라니까. 너 쉬는 게 뭔지 모르는 거지?”

    에드워드는 한번 말해서는 잘 안 듣는다.

    “알아.”

    “그럼 해.”

    문틈 사이 에드워드의 얼굴이 사라졌다. 문이 닫혔다.

    아픈 에드워드는 평소보다 몇 배는 연약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에드워드는 무력한 어린애였다. 경계심이 좀 많을 뿐인.

    현재만 두고 봤을 때,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쪽은 에드워드가 아닌 나였다.

    약해진 애를 두고 나는 ‘쟬 좀 물렁물렁하게 만들어서 날 좋아하게 해 보자…….’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그레이는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고 찾아왔다. 나와 에드워드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그를 맞았다.

    에드워드가 체스 말을 움직였다.

    “체크메이트.”

    “와. 10연승.”

    나는 손바닥을 짝짝 맞부딪쳤다. 내게서 10승을 거둔 에드워드는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을 정리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나와 에드워드 둘 다 체스를 둘 줄 몰랐는데, 에드워드는 첫판에서 감을 잡더니 두 번째 판에서는 내 말들을 학살했다. 부하들이 하나씩 죽어 가는 걸 보며 살아 있는 내 킹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내가 재미없다고 불평하자, 세 번째 판부터는 봐주면서 하는 것 같았다.

    나와 에드워드에게 체스 두는 법을 알려 준 도트는 다과를 가지러 부엌에 갔다. 내가 10연패를 기록하는 현장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도트는 내가 질 때마다 자기가 지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아까운 판이었어요, 왕자님. 신경 쓰지 마세요!’

    ‘아앗…….’

    ‘아! 잡혔다!’

    ‘괜찮아요. 다음에는 이기실 거예요!’

    아니. 이기는 건 무리고…….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게임을 너무 못하거나 에드워드가 너무 잘하거나 둘 중 하난데 난 후자에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그편이 기분이라도 좋으니까.

    여섯 판이 넘어가자 도트는 조용해졌다. 대신 패배가 결정될 때마다 내 눈치를 봤다. 조프리는 게임에서까지 에드워드를 이기고 싶어 했던 걸까? 옆 사람이 이러면 지든 말든 신경 안 쓰던 사람도 신경 쓰이겠다.

    “감기가 옮아서 수업도 못 들을 정도로 아프신 거 아니었어요?”

    그레이가 삐딱하게 서서 물었다. 에드워드는 정리하던 말을 잘못 건드렸다. 흰 비숍이 바닥에 떨어져서 그레이의 발치로 굴러갔다.

    “맞아. 그래서 침대에서 쉬고 있잖아.”

    “아픈 분으로는 안 보이는데요.”

    “내가 아프길 바랐어?”

    “그럴 리가요. 두 분 왕자님께서 건강하고 다정해 보여서 행복하네요. 나라의 홍복이에요. 당분간 거리를 둔다는 두 분 계획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그레이가 몸을 숙여 비숍을 주웠다.

    “에드워드가 나으면 재개할 거야. 그렇지, 에드워드?”

    “응.”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마에 두른 물수건이 코로 흘러내렸다.

    에드워드는 물수건을 잡아서 다시 이마로 올렸다. 이마 열을 내리려면 물수건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에게 게임을 시키려면 누워만 있게 할 순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에드워드의 머리에 물수건을 묶어 뒀다. 길이가 될까 했는데 에드워드의 얼굴이 작아서 수건을 묶고도 약간 남았다.

    무엇보다 흘러내리는 물수건을 자꾸 치켜 올리는 에드워드가 귀여웠다.

    “에드워드 병문안 왔어?”

    그레이가 다시 올 줄은 몰랐다. 에드워드를 걱정하면서도 이상하게 거리를 두길래.

    조프리 병문안을 왔을 것 같진 않아서 물어보자, 그레이는 눈썹을 올렸다.

    “두 분 병문안을 온 거죠. 수업 자료 가져왔어요. 필요하실 것 같아서. 오늘 두 분이 안 계서서 진도는 안 나갔고요. 전에 배웠던 내용의 참고 수준에서 밀리엄 공주의 일기를 읽었는데……. 에드워드 전하는 왜 그런 해괴한, 아니 독특한 모습을 하고 계세요?”

    비숍을 침대 위에 올린 그레이가 뒤늦게 에드워드를 발견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봤다.

    “아니야. 귀여워. 멋있어.”

    “해괴하대.”

    “그레이 안목 이상해.”

    “정말?”

    “응.”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그레이가 초를 쳤다.

    “수건에서 물 떨어져요.”

    “안 떨어지는데.”

    내가 반박했다. 수건을 짠 건 나였다.

    “물 안 떨어지지, 에드워드?”

    “…….”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얄밉게 말했다.

    “떨어지잖아요.”

    “왜 말 안 했어?”

    “괜찮아. 물방울 좀 떨어지는 건 시원해.”

    에드워드가 어른스럽게 나를 옹호했다.

    아니. 네가 날 배려하면 안 되지. 배려는 내가 해야지.

    정말 물 떨어져?

    에드워드의 머리에서 수건을 풀어냈다. 수건 끝이 좀 축축했다. 힘을 줘서 짜내니 물방울이 떨어졌다.

    난 정말 게임에 재능이 없나 보다.

    간호 이벤트의 난이도가 낮다고 말한 게 누군지 모르겠다. 최대한 티 나게 에드워드를 챙겨 주고 있는데 챙겨 주는 것마다 이상해졌다.

    에드워드가 잠들기 전까지 놀아 주려던 체스는 에드워드가 열심히 봐주는 모양새였고, 열을 내리려고 한 물수건도 엉망이었다.

    이 게임 난이도가 높아서 베드엔딩에 도달했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못한 거였을까?

    약효가 도는지 에드워드는 눈을 끔뻑이기 시작했다. 나는 에드워드를 눕히고 새 물수건을 머리에 얹어 줬다.

    에드워드가 기침을 했다. 협탁에 올려놓은 물을 에드워드 입가에 대 줬다. 에드워드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서 스스로 물을 마셨다.

    “열 많이 내렸다. 한숨 자면 낫겠는데.”

    에드워드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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