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1화 (31/293)
  • 31.

    “아무래도 그렇죠?”

    “그런 곳이 정리되면, 아이들은…….”

    “추적하고 있습니다.”

    “알렉스가 그 안에 있는 거지?”

    “그건 아닙니다. 아이들이 한두 곳으로 보내진 게 아니라서요. 왕자님이 찾으시는 그 아이는 위치가 파악됐습니다. 다만 그곳이…….”

    “안전한 곳이 아닌가?”

    “뭐 안전하긴 할 겁니다. 장사꾼들이 돈 될 상품을 함부로 다루진 않을 테니까요.”

    노예 시장이란 소리잖아?! 내가 뜨악한 표정을 하자 바움쿠헨 경은 머리를 긁적였다. 안전하긴 무슨.

    “무사하다면, 경이 구해 올 수는 있어?”

    바움쿠헨 경이 확답했다.

    “예.”

    “그렇다면 구해 줘. 설마 내게 알렉스를 찾았다는 소식을 보고하느라 구출이 늦어지고 있는 건가?”

    바움쿠헨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이런 일을 신경 쓰는 것도 우습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바움쿠헨 경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는데, 그와 시선의 높이가 비슷해졌다. 나를 걱정하는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경비대장과 관련된 보고에서 하나 알아들은 게 있다. 이 일의 배후는 어쩌면 왕비님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왕비님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왕성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그런 모양이었다.

    왕비님의 세력을 해치는 일이었다. 바움쿠헨 경은 조프리에게 그래도 괜찮으냐고 묻고 있었다.

    당연히 괜찮지. 뿌리 뽑아 주면 더 고마웠다. 조프리 지지 세력이 휘청거리게.

    조프리라면 안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조프리는 죽었잖아. 든든한 왕비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에드워드의 적대자 포지션에 서서.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이 그렇다면.”

    바움쿠헨 경이 돌아섰다.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고마워, 경.”

    “더 고마워하셔도 됩니다. 제 목숨값이 어지간히 비싸긴 하군요. 수도로 오자마자 이런 일을 맡게 되다니.”

    바움쿠헨 경이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무사할 겁니다. 왕자 전하께서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 죽으면 아깝지 않습니까?”

    어이없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안도감이 들었다. 알렉스는 괜찮을 것이다.

    난 조프리가 만인의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원한은 안 사게 만들고 싶었다.

    원래 게임 설정대로라면, 알렉스가 바움쿠헨 경에게 구해지는 건 언제였을까.

    올해 안? 일 년 뒤?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길어진 시간만큼 알렉스의 원한은 커졌을 것이다.

    죽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하물며 사고도 아니고 누군가의 미움을 사서 살해당하고 싶진 않았다.

    엄마가 내 장례식을 치렀을까? 장례식장을 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괜히 돈만 나갈 테니까.

    아닌가. 유연호는 찾아오려나.

    어릴 적 아버지의 장례식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람 없는 빈소는 너무 크고 추운 느낌이었다. 엄마와 함께 있는데도 그랬다.

    지금 엄마는 정말로 혼자일 텐데.

    * * *

    몸이 무거웠다. 침실로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쓰러진 뒤에야 이불 속에 누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람의 딱딱한 몸이 팔 아래 느껴졌다.

    맞다. 에드워드가 자고 있었지.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깼을지도 모르겠다. 침대는 꽤 출렁였다.

    에드워드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이불 위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촛불 조명을 받아 장식처럼 반짝였다.

    예쁜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이 움직이는지 봤다. 에드워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금발이 노랗게 번졌다가 명료해졌다.

    “왕자님? 앗, 여기서 이불도 없이 주무시면…….”

    도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일어나야 되는데. 소파로 가서…….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커튼에 가려진 햇살이 머리로 드리웠다. 등 뒤에서 무언가 움지럭거리고 있었다.

    이불이 조심스레 내려갔다. 에드워드는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이불에서 몸을 빼고 있었다. 매트리스를 누르던 체중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바깥 공기가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에드워드, 어디 가?”

    에드워드의 뒷모습이 멈칫했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자는 동안 머리카락이 눌리고 셔츠는 구겨져서, 귀엽긴 한데 어벙한 모습이었다.

    “조프리, 일어났어?”

    “응. 넌 잘 잤어? 어디 가?”

    “갈게.”

    “‘갈게’가 아니지. 어디 가느냐니까. 어제 너 쓰러져 있는 거 나랑 그레이가 데려온 거 알아? 너 무겁더라.”

    “미안해.”

    에드워드가 착하게 말했다. 사과 들으려는 거 아닌데.

    “미안해 말고 할 말 없어?”

    “고마워.”

    에드워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 그거지. 사실 99퍼센트 엉뚱한 소릴 할 줄 알았는데, 듣고 싶은 말이 바로 나올 줄은 몰랐다.

    놀라움을 감추고 말했다.

    “나 너한테 약도 줄 건데.”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아침도 먹일 거야. 소화 잘되게 수프로.”

    에드워드에겐 생색을 내 두는 편이 좋았다. 내가 널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고.

    물론 조프리는 예전에 에드워드를 괴롭혔지만.

    에드워드 입장에서 이건 쓰레기가 생색내는 꼴일까? 자신이 없어졌다.

    “나 가야 하는데.”

    “어디로? 네 궁으로?”

    “…….”

    에드워드가 입을 닫았다. 또 비밀인가 보다. 아니면 조프리 같은 나쁜 놈한텐 알려 주기 싫다거나.

    안 돼. 생각이 부정적으로만 흐른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안 물어볼게. 꼭 가야 하는 일이야? 바빠?”

    에드워드는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동그란 눈이 나를 살피고 있었다. 동물이 안전한 거리를 가늠하듯이.

    해치지 않을게. 난 무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두 손을 내보이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쁜 거 아니면 여기 있어. 나을 때까지만. 가다가 쓰러지면 어떡해?”

    “그렇게 안 허약해.”

    “넌 어제 네가 어쩌고 있는지 못 봤잖아.”

    가위도 휘두르더라. 혹시 나 찌르려던 거였어?

    묻지는 못했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열은 내렸어?”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은? 기침은?”

    “괜찮아.”

    에드워드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리 와.”

    에드워드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인력에 이끌리듯이. 그는 멈칫하고 자기 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 해? 어서.”

    에드워드가 발을 뗐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어떻게 괴롭힌 걸까.

    “앉아.”

    난 침대를 가리켰다. 에드워드가 내 옆에 앉았다. 에드워드의 무게대로 침대 시트에 주름이 졌다.

    에드워드의 이마에 손을 대려다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내가 너 만져도 돼? 열만 잴게.”

    “열?”

    에드워드는 상식이 부족했다. 알려 줄 사람이 곁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만 해도 자신이 에드워드와 친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열 재는 법도 모르다니. 물론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한 방법은 입술을 대는 거였나?

    진짜 제대로 재려면 체온계를 가져와야겠지만.

    “이렇게 손을 올려서…….”

    에드워드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올라가다가, 내가 닿는 순간 움찔했다.

    “뜨거우면 열이 있는 거야.”

    “차가워.”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야 너한테는 차갑겠지. 손 주인 입장에서 말이야. 네 이마가 뜨거운 거잖아.”

    다른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내 이마도 뜨거웠다. 에드워드는 신기한 듯 내가 하는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난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그냥 조프리의 손이 차가운 편인 것 같았다. 이래서야 신빙성이 없었다.

    “열 내린 것 같아? 네 생각엔 어때?”

    에드워드에게 묻자 그가 눈을 깜빡였다.

    “뜨거우면 열 있는 거라면서.”

    “내 이마도 뜨거워서.”

    에드워드가 불신의 시선을 내 손에 보냈다.

    아닌데. 다들 이렇게 열 재는데.

    “잠깐만.”

    난 에드워드의 목으로 손을 내렸다. 셔츠 깃 안쪽, 드러난 쇄골 위를 손바닥으로 덮자 에드워드가 움츠러들었다.

    살이 뜨끈뜨끈한 정도가 아니라 뜨거웠다. 다른 손을 내 목에 대봤다. 에드워드가 뜨거운 거 맞았다.

    “봐 봐, 너 열 있어. 아직 아프잖아.”

    난 자신감 있게 말했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렇다니까?”

    “그렇구나.”

    “진짜야. 만져 볼래?”

    아니, 왜 사람 말을 안 믿는 거야? 내가 셔츠 단추를 풀고 목을 드러내자, 에드워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목에 손을 댔다.

    손가락이 조심조심 내 살을 만지고 있었다.

    살갗을 더듬을 게 아니라 체온을 재야지, 에드워드.

    간지러웠다. 어깨가 저절로 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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