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30화 (30/293)

30.

난 어디서 읽은 내용인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물론 기억나지 않았다. 난 그냥 내가 읽었던, 시험 주제와 관련된 책 이름을 전부 써 놓고 이 책들에서 참고했다고 적었다.

다시 답안지를 읽지 않아도 내 문제점을 알겠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파이 공작이 길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작은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요지는 복습하라는 거였다. 다른 말들은 파이 공작이 하고자 하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어나 다름없었다.

파이 공작은 ‘숙제해라, 공부해라’ 같은 간단한 내용도 원래 그런 식으로 말했다.

도트는 서재에서 내가 공부한 책을 전부 꺼내 왔다. 난 책으로 탑을 쌓아 놓고 주제에 맞는 책만 골라냈다.

정복왕의 전쟁 업적. 원정. 대외 사업.

페이지를 넘겨 가며 필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전부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난 내 머리는 믿지 않았다. 차라리 몸을 믿는 편이 나았다. 반복해서 외워서 손과 입이 기억하게.

내가 공부를 마지막으로 해 보려고 시도했던 게 중학교 1학년이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그게 공부라고 생각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내게 공부 머리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고등학교 올라가서 만난 담임 선생님은 공부는 재능보다 노력이라고 말했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출세 수단이라고.

난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벌고 싶었고, 시간이 없었다. 난 출세 같은 건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와 달리 조프리는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도트.”

“네, 왕자님.”

도트가 빈 종이 뭉치를 가져와 협탁 위에 올렸다. 잉크와 펜이 준비됐다. 난 손을 깍지 끼고 손목을 돌렸다. 손목에서 두둑 소리가 났다.

일단 열 번 써 보자.

도트가 박하차를 가져왔다. 싸한 향이 방에 퍼졌다.

박하차는 머리를 맑게 하고 집중력을 높여 준다고 도트는 믿었다. 게다가 암기력을 두 배나 높여 준다는 것이다. 아무튼 공부할 때 빼먹어선 안 될 필수품이라는 게 도트의 생각이었다.

처음 도트 말을 듣고 난 박하차가 게임 아이템인 줄 알았다. 게임에서 본 기억은 없었지만.

물론 박하차는 게임 아이템이 아니었다. 왕비님과 도트는 공부에 대한 여러 유사 과학의 신봉자였다.

난 예의상 박하차를 마셨다. 도트가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더 따라 드릴까요?”

“고마워.”

한 잔을 다 비우고 빈 잔을 내밀자 도트는 기뻐하며 나갔다. 물배가 찰 것 같았다.

이제야 조용해졌다. 난 외울 내용을 종이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적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책장을 덮고 외운 내용을 확인하고, 방금 외운 부분이 막힘없이 떠오르지 않으면 다시 펜을 들었다.

손목이 아리고 목이 아팠다. 등을 쭉 펴고 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왕자님. 공부하시는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전에 바움쿠헨 경의 심부름꾼이 찾아오면 최우선으로 알리라고 말씀하셔서…….”

도트의 목소리였다.

알렉스.

난 펜을 놓고 일어났다.

“갈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응접실은 침실에서 좀 멀었다. 도트의 대답이 들렸다.

“네.”

응접실에서 심부름꾼을 맞았다가 에드워드가 깨기라도 하면? 불안해하지 않을까? 아픈 애가 혼자 낯선 곳에서 눈을 뜨는데. 이제 에드워드가 깰 때가 다 됐는데.

“잠깐만, 도트. 그냥 옆방으로 안내해 줄래? 여기서 만날게.”

“왕자님의 사실에서요?”

도트는 놀란 듯했다. 사실은 비교적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인 사람과 만나는 장소였다. 내가 조프리가 되고 그곳에 다른 사람을 초대해 본 일이 없었다.

“응. 에드워드가 깰 것 같아서.”

“네, 왕자님. 심부름꾼을 데려오겠습니다.”

도트가 나갔다.

사실은 응접실보다 작았다. 소파 간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이곳이 응접실과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난 안락의자에 앉았다. 게임대로라면 바움쿠헨 경은 알렉스를 구하겠지만, 이번 일에는 내가 개입되어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데 바움쿠헨 경의 심부름꾼이 들어왔다. 모자를 쓴 키 큰 남자였다.

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허름한 옷을 입었는데도 위압적인 체구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그 모습은 뭐야, 경?”

“들켰습니까?”

바움쿠헨 경이 모자를 슬쩍 들었다 내렸다.

“알아보기 쉬운 변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다른 사람인 척하기에 그대는 키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그런 꼴을 하고 있어?”

모자로 얼굴을 가려 봤자 밑에서는 보였다. 게다가 그는 심부름꾼이라기엔 체격이 너무 좋았다.

“제가 왕자님을 만나러 왔다는 게 알려져서 좋은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왜?”

바움쿠헨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다시 입궁할까요? 번듯하게 차려입고 훈장도 달고. 왕비님의 시종이 몇 명 붙어 있는 공식적인 자리면 좋겠군요.”

“빈정거리는 거야?”

“아닙니다.”

바움쿠헨 경은 머리를 긁적이려다가 모자에 손이 막혔다. 그가 모자를 벗어 아무 데나 내려놨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해졌다. 바움쿠헨 경이 이상한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일이 꼬이진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바움쿠헨 경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실수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언제 말해야 할지 곤란해하는 사람처럼.

“경?”

바움쿠헨 경이 미묘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 내가 의미를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문제가 있으면 말해. 대화라는 좋은 수단이 있잖아.

왕성 사람들은 이게 문제였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내게 직접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알렉스를 찾지 못했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개입해서 일이 틀어졌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리가 되지 않아 두서없는 말이 나갈 것 같고…….”

“그냥 말해. 그대에게 달변을 바란 적 없어.”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좋습니다.”

바움쿠헨이 머리를 헝클이던 손을 내려놨다.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부담 없이 묻겠습니다. 그 아이를 찾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찾아서 무사히 보호하라고 하셨죠. 아이 하나쯤 보호하는 건 전하께 일도 아닐 텐데요. 전하께서 보호하지 못할 사람은 정말 드물 테니까요.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으십니까? 제가 알아도 됩니까?”

바움쿠헨 경이 쉬지 않고 물었다. 흥분했는지 얼굴이 붉었다.

알렉스를 구하려는 이유? 그 애가 알렉스 바움쿠헨이니까.

바움쿠헨 경에게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직접 보호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다른 의미로 얘기하기 힘들었다. 그걸 밝히려면 왕비님의 과보호에 대해 구구절절 말해야 했다.

뭐라고 말할까. 왕비님이 조프리를 너무 아껴서 조프리 시종의 물건을 훔친 소매치기조차 용서 안 하실 정도라고? 조프리 궁에 소매치기가 있단 소리가 왕비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른다고?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운 얘기였다. 말해 봐야 마마보이라는 시선밖에 못 받을 거다. 바움쿠헨이 그런 하찮은 이유로 날 귀찮게 했냐고 생각해도 곤란했다.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였다.

“아니.”

“그렇군요.”

바움쿠헨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지 못하시는 이유도 이해합니다.”

진짜?

당황해서 표정 관리를 못 할 뻔했다. 바움쿠헨 경이 순순히 물러날 줄 몰랐다. 뭐라고 생각해서 이해한다는 걸까?

“보고하겠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경비대장을 만났습니다. 고아원 건물 하나가 사라졌는데,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장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래서 그자의 뒤를 캐 봤습니다. 그자가 경비대장까지 오르도록 후원한 자는 리코타 남작인데 아시다시피 왕비님의 추종자 중 하나입니다. 고아원이 사라지고 이틀 뒤 리코타 남작이 입궁해 왕비님께 알현을 신청했더군요. 제가 알아낸 바는 이상입니다.”

말이 길었다. 머리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바도 아니었다.

“그 고아원은 뭐 하는 곳이었는데?”

“갈 곳 없는 애들로 장사를 하기도 하고, 기술을 가르쳐 상납금을 받기도 하는 뭐 그런 데였던 것 같습니다.”

“그게 뭐야. 범죄자 양성소야?”

알렉스의 설정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 알렉스 바움쿠헨은 반듯하고 성실한 기사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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