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9화 (29/293)
  • 29.

    에드워드에게서 눈을 못 떼는 걸 보니 걱정하는 건 맞다. 방금 전까지 같이 약을 먹였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동시에 그레이는 조프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내게서 에드워드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내 궁에 에드워드를 맡기고 가기 안 불안해?

    “에드워드 전하가 야심한 시각에 깨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같이 일어나서 밥 챙겨 먹여야지?”

    “왕비님이 갑자기 찾아오시면요?”

    “넌 왕족이 갑자기 찾아오는 거 봤어? 왕비님 외출에 필요한 사람이 몇인데 어떻게 갑자기 찾아와. 정문에서부터 소식 들리겠지.”

    “에드워드 전하의 상태가 급작스레 악화되면요? 심각하게? 의사가 필요할 정도로?”

    “나 무슨 시험 보고 있어?”

    그레이가 눈을 굴렸다.

    “죄송합니다. 감히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에드워드는 괜찮아.”

    에드워드는 여기서 안 죽는다. 아카데미에 가서 여주인공을 만나야 하니까.

    “그게 걱정되는 거면 가. 문제없을 테니까.”

    그레이가 당황했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

    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세요? 전하께서 의사도 아니시잖아요.”

    “그렇게 걱정되면 여기서 자고 가. 의사도 아닌 나한테 에드워드 맡겨 놓고 발 뻗고 잠은 자겠어?”

    “싫어요.”

    이쯤 되면 이유가 있나 싶었다. 조프리랑 같은 건물에서 자는 게 끔찍하게 싫다거나.

    “왜?”

    “제가 에드워드 전하를 너무 걱정하는 것 같잖아요.”

    한국어인가?

    “걱정하는 거 맞잖아?”

    “너무 걱정하는 건 아닌데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그래?”

    “에드워드 전하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에드워드 전하께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만한 측은지심이라고. 절 그렇게 만든 사람은 조프리 전하시고요. 조프리 전하께서 그런 짓만 하지 않으셨더라면, 전 두 분을 공정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겠죠.”

    “…….”

    조프리가 무슨 짓을 했는데?

    되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더 정보를 꺼낼 수 있게 침묵했다.

    “주제에 왕족을 동정하느냐고 말씀 안 하시네요.”

    “그렇게 생각 안 해.”

    혹시 조프리 어린 시절에 못된 애였나?

    자라면서 인격 함양이 되어 개과천선한 그런 과야?

    그러니까 조프리가 에드워드를 괴롭혔다는 거지. 에드워드는 왕비님뿐만 아니라 조프리에게도 어떤 일을 당하고 있었다는 거지.

    내가 잘해 준다고 해도 에드워드의 벽을 허물 수 없던 이유를 알았다. 조프리의 열등감은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열한 살 이전부터 지속된 열등감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절에, 조프리는 왕비님을 뒷배로 둔 왕자였고 에드워드는 방치당한 왕자였다.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괴롭힐 수 있었다.

    돌겠네.

    에드워드 입장에선 자길 괴롭히던 애가 말에서 떨어지더니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처럼 달라붙은 셈이다.

    못 믿을 만도 했다.

    “내가 에드워드를 때렸던가?”

    “전하께서 직접 손대진 않으셨죠.”

    “욕을 했던가?”

    “면전에서 욕하진 않으셨죠.”

    눈치를 보며 물었는데 그레이의 대답이 아리송했다.

    대체 어떻게 괴롭혔다는 거야?

    그레이는 오히려 내가 모른 척 묻는 게 가증스러운 듯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에드워드 전하를 걱정하신다니. 제가 조프리 전하를 믿어야 하나요? 왜 갑자기 다정한 관계가 되기로 하신 거죠? 조프리 전하께 이득이 없을 텐데요.”

    이득이 없긴 왜 없어. 목숨을 구하는데.

    하지만 이걸로 그레이를 설득할 순 없었다.

    그레이를 설득할 필요가 애초에 있기는 한가. 조프리의 미래에 그레이는 필요 없는데.

    아, 얘 에드워드 친구지. 얘가 느끼는 적대감이 에드워드의 호감도에도 영향을 미칠까?

    “가족이잖아.”

    할리우드 영화처럼 말해 봤다. 그레이는 얼빠진 얼굴이 됐다.

    “예?”

    “하나밖에 없는 형제니까,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어.”

    “예?”

    그레이가 다시 물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독기마저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이러면 감동적인 엔딩을 맞던데. 기말 고사 끝나고 학교에서 틀어 준 영화에 나왔다.

    “아……. 그러시군요.”

    그레이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이제 알겠지?”

    “네…….”

    설득된 건가? 굉장하다, 할리우드 영화.

    거짓말은 안 했다. 에드워드와 조프리는 형제 맞잖아.

    게임 설정상 피는 안 섞였지만.

    이 설정은 게임 후반부에 가서 밝혀진다. 조프리가 그렇게까지 에드워드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이유다.

    조프리는 왕의 아들이 아니다. 여주인공이 조프리 호감도 별 4.5개를 찍으면 조프리가 자기 입으로 고백한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비밀이야. 누구든 알게 되면 내 목숨을 쥐는 것과 다름없거든.]

    [듣기 싫으면 지금 거절해. 만약 받아 준다면…….]

    [너에게 내 목숨을 줄게.]

    [난 왕의 아들이 아니야.]

    [……그래도 날 사랑해 줄래?]

    이걸 고백이라고 하는 걸까?

    혈통 커밍아웃이라는 의미의 고백이 아니라 진짜 그게 조프리의 고백 멘트였다. 난 여주인공이 고백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베드엔딩을 맞았지.

    에드워드가 훌쩍였다. 나와 그레이는 동시에 침대 위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뒤척이더니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불이 동굴처럼 부풀었다.

    도트는 시트에 떨어진 물수건을 다시 에드워드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눈이 마주치자 도트가 방긋 웃었다.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저는 가겠습니다.”

    그레이가 일어났다.

    “가게? 에드워드 더 안 보고?”

    “네…….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안내는 필요 없어요. 가겠습니다.”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아주 이상한 걸 보듯 나를 바라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정말 설득된 거 맞나?

    기분이 찜찜해졌다.

    “어떻게 생각해? 그레이 표정 왜 저런 것 같아?”

    도트에게 물었다. 도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왕자님의 말씀에 감동한 게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그레이가 도트도 아니고 그럴 리는 없었지만, 난 도트에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대답해 줬다.

    도트는 기뻐하며 점심을 가지러 갔다.

    침대를 돌아보니 에드워드의 물수건이 또 떨어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옆으로 누워 웅크리고 있었다. 물수건을 올릴 각도를 찾기 힘들었다.

    약효가 있는 걸까?

    에드워드의 이마에 손을 올려 봤다. 물수건 때문에 차게 식은 피부 밑으로 뭉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부드러운 이마에서 손을 떼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줬다. 손을 거두려는데 에드워드의 이마가 내 손에 닿아 왔다.

    에드워드는 어린 동물처럼 이마를 문댔다. 안쓰러운 감촉이었다. 에드워드의 흰 얼굴에 희미한 표정이 떠올랐다.

    “엄마.”

    그건 미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찡그리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껏 본 에드워드의 표정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불쌍하게.

    난 에드워드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에드워드의 숨이 깊어질 때까지.

    조프리가 너 괴롭혔다며? 왜 말 안 했어. 그래도 내가 취할 행동은 같았겠지만.

    지금도 난 에드워드에게 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에게 사과를 하고, 조프리가 밉다거나 그런 마음이 다시 떠오르지 않게 잘해 줘서…….

    에드워드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도트가 점심이 담긴 트레이를 가져왔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해서, 난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옆방에서 먹겠다는 손짓을 했다. 도트가 고개를 끄덕였고,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는 저녁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다. 도트가 중간에 물을 한번 갈아 왔다. 그리고 물수건으로 에드워드의 목 같은 곳을 닦아 줬다.

    난 혼자 식사를 하고 저녁 수업을 들었다. 밤이 다 되어서야 파이 공작의 시험을 복습할 시간이 났다.

    침실 협탁 위에 답안지를 펼쳤다. 에드워드의 작은 숨소리가 백색 소음 역할을 했다.

    좋아. 뭐가 문제였는지 짚어 보자.

    일단은 내용이 문제였다. 조프리가 되고 두 달, 난 온갖 종류의 책을 읽었다. 그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진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굴러온 지식이 머릿속에 바람 빠진 공처럼 쌓여 있었다.

    시험 문제를 받고 가장 먼저 나는 내가 아는 내용을 정리했다. 단편적인 사실들이 떠올랐다. 그 다음엔 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며 그 일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지가 떠올랐다.

    난 또 그런 것들을 적었다.

    그런데도 옆에서 시험을 치는 그레이에 비해 분량이 너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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