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화 (27/293)
  • 27.

    그레이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라면 그는 이 시간에 진작 왕성을 빠져나가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야 했다.

    호위 기사 머랭 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차에 좀 늦게 돌아간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원래 그레이는 시간에 철저한 성격이었다. 머랭 경은 별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레이가 생각해도 별일이었다. 그가 어쩌다 이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있단 말인가?

    “시종 지나갔어. 내가 셋 세면 저기까지 뛰는 거야.”

    조프리 왕자가 말했다. 그레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왕자는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세 버렸다.

    하나, 둘, 셋이면 3초는 되어야 하지 않나? 눈 깜짝할 새도 주지 않고 다 세어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조프리 왕자가 먼저 건물 그림자를 빠져나가 달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의 오른팔을 자기 목에 두르고서.

    에드워드 왕자의 왼팔을 붙잡고 있는 그레이는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를 놓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에드워드의 두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레이는 그것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에드워드는 마른 체구에 비해 굉장히 무거웠다. 그레이의 힘이 부족한 건지 조프리의 힘이 부족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원래 힘이 센 사람이어서일지도 몰랐다.

    에드워드의 키는 그레이와 비슷했다. 살집은 없어서 뼈대가 보이는 체구였다.

    그런데도 그레이는 에드워드를 힘으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서로 손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간단한 힘겨루기에서도 그랬다. 에드워드의 힘은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그런 사람이 죽은 듯이 기절해 있으니 이상했다.

    “멈춰. 누가 있어.”

    조프리 왕자가 지시했다. 왕자는 몰래 에드워드를 옮기겠다고 선언한 것치고 대로만 골라서 다니고 있었다.

    왕자가 특별히 에드워드를 엿 먹이고 싶어서라기보다 왕자가 아는 길이 거기뿐인 것 같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불쾌해졌다.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두고 가려고 한 건 에드워드가 걱정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재상의 아들인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챙기다 발각돼서 에드워드에게 생길 불이익이 에드워드가 빈 교실에 혼자 기절한 채 남아서 발견될 때의 파장보다 훨씬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수업이 끝나면 교실을 정리하러 궁인이 들어온다. 에드워드는 발견될 거고 적당한 치료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챙긴다면, 그리고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왕비는 재상의 아들이 에드워드와 친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에드워드는 왕비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멍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의 계획을 망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조프리 왕자가 그레이를 쓰레기처럼 쳐다봤다.

    조프리에게 쓰레기 취급당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충격 탓에 사지가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자를 운반하는 데 이렇게 힘이 드는 이유는 분명 그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레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생각했다.

    “후문으로 들어가자.”

    조프리 왕자의 궁의 보이자, 왕자가 지시했다. 그레이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왕자가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궁인들의 눈을 피해서 정원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왕자님! 제가 할게요! 땀 흘리신 것 좀 봐! 어서 씻으세요. 제가 새 옷을 준비해 올게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조프리 왕자의 개인 시종이 달려 나왔다. 시종은 호들갑스럽게 조프리 왕자를 챙기려 들었다.

    “에드워드가 아파. 내 침실에 몰래 데려갈 수 있어?”

    시종은 그제야 에드워드를 발견한 듯했다.

    “네. 근처에서 다른 궁인들을 물릴게요!”

    시종이 달려가는 모습을 조프리 왕자는 걱정스레 바라봤다.

    그레이는 방치된 기분이었다. 제 발로 조프리를 따라와서는, 시종에게 안내도 못 받고 무슨 비밀 작전을 펼치고 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고 있나, 그레이는 생각했다.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럴 줄 알았어.”

    조프리 왕자가 말했다. 복도 끝에서 시종이 엎어져 있었다.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가 달려가서 시종을 챙길 줄 알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왕자가 시종 따위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어서?

    왕자는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고 에드워드를 고쳐 들었다.

    “무게가 쏠리잖아. 그레이, 제대로 들어.”

    그레이에게 훈수도 했다.

    이 왕자는 대체 뭘까? 그레이는 당혹스러웠다.

    “에드워드가 의사는 싫다니까 감기는 네가 걸린 걸로 하자. 에드워드 옷은 내가 벗길게. 넌 시종을 찾아서 약을 좀 받아 와.”

    조프리 왕자가 명령했다. 그는 침대에 축 늘어진 에드워드에게 신경 쓰느라 그레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한 마디 하면서도 그레이의 눈치를 봤을 텐데.

    ‘제가 왜요?’

    그레이는 말하려고 했다.

    조프리 왕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단호한 기색이 떠올랐다.

    “뭐 해? 어서!”

    그레이는 복도를 달렸다.

    조프리 왕자의 명령은 합리적이었다. 왕자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레이가 아픈 쪽이 나았으니까.

    조프리가 아프다고 하면 당장 왕비가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침실에 눕힌 에드워드를 들켰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은 왜 저 왕자 명령을 순순히 듣고 있는 걸까? 저건 조프리인데.

    아픈 에드워드를 저 조프리와 함께 둬도 되는 건가?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게 아닌가?

    * * *

    “에드워드, 잠깐만 움직여 봐.”

    에드워드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가 더운 숨을 내쉬었다. 난 에드워드의 셔츠를 벗기려다 포기했다. 환자의 팔을 꺾어서 옷을 벗길 수는 없었으니까.

    “왕자님, 물수건을 가져왔어요. 제가 간호할게요. 왕자님은 쉬세요.”

    도트가 대야와 수건을 가져왔다. 난 그에게 자리를 비켜 주고 내 옷을 벗었다. 에드워드를 여기까지 옮기느라 진이 다 빠졌다. 겨드랑이가 땀에 젖었다.

    그레이가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방 안을 둘러보고는, 에드워드의 위치부터 찾았다.

    그는 에드워드가 축 늘어져 있는 걸 보고 안도했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큰일 날 줄 알았나.

    그레이가 에드워드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에드워드를 지키듯 섰다.

    “약 받아 왔어요. ……조프리 전하께선 왜 옷을 벗고 계세요?”

    “씻으려고. 땀에 젖어서 찝찝해. 너도 씻을래?”

    “싫어요.”

    그레이가 경계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누가 같이 씻재? 먼저 씻어. 옷은 빌려줄 테니까.”

    “아.”

    “약은 나 주고.”

    그레이에게서 약봉지를 받아서 협탁에 뒀다.

    도트는 수건에서 물을 짜고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가 덮은 이불을 내렸다. 에드워드는 반쯤 벗은 상태였다. 단추가 다 풀린 셔츠가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그레이가 다시 기함했다.

    “지금 뭐 하세요? 왜 옷을 벗기고…….”

    “셔츠를 잘라도 될까요, 전하? 몸을 닦기 불편할 것 같아서요.”

    도트가 물었다.

    그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난 그레이에게 손을 휘저어 보였다.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라. 남 옷 벗는 거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씻고 와.”

    아무튼 도트의 제안은 훌륭했다. 벗기려고 애쓰던 내가 어리석었다. 조프리에게 옷은 많았다. 셔츠 하나쯤 못 쓰게 잘라 버려도 상관없었다.

    “셔츠 자르는 거 좋다. 그렇게 하자.”

    “예, 전하.”

    도트가 품에서 커다란 가위를 꺼냈다. 물론 그가 입은 시종복에는 그런 걸 보관할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저 달라붙은 시종복 어디에 비밀이 있는지 모르겠다.

    도트가 에드워드의 셔츠를 자르려던 때였다.

    “손대지 마.”

    에드워드가 눈을 떴다. 그는 움찔 일어나더니 침대 헤드에 붙었다.

    “누구야? 여기 어디야?”

    멍한 목소리였다. 제대로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나와 그레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도트가 그의 적이라도 되는 듯이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님의 궁이에요. 에드워드 전하, 일어나셨으면 제가 옷을 벗겨 드릴…….”

    “건드리지 마.”

    “앗. 왕자님, 위험해요!”

    도트가 물러났다. 어느새 에드워드가 도트의 가위를 뺏어 들고 있었다.

    마법인가? 무슨 수로 뺏은 건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 가위가 도트를 위협하는 것만 보였다.

    “와, 왕자님. 위험하니까 접근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해 볼게요.”

    도트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네가 무슨 수로?

    에드워드와 내 사이의 거리는 백만 년쯤 떨어져 있었다. 도트와 에드워드의 거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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