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화 (26/293)
  • 26.

    아니, 근데 상식적으로 너랑 나는 아니지 않냐.

    파이 공작의 멘트를 듣고도 승부욕이 생겨?

    누가 들어도 불쌍한 애 챙겨 주는 말투잖아.

    “네가 읽어서 도움 될 만한 수준이 아닐 텐데.”

    일단 겸양을 해 봤다. 못 보여 줄 건 아니지만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레이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 선생님께 ‘노력했다’고 칭찬받은 리포트인데요.”

    “리포트 아닌데.”

    “겸손하시네요. 저도 선생님께 언젠가 칭찬받고 싶어서 정진하고 있어요. 조프리 전하를 본받아 다음 시험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데요.”

    칭찬을 받고 싶으면 파이 공작한테 가.

    나한테 오지 말고.

    그레이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이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파이 공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내 답안지를 돌려주며 무심하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교학상장이라 하였으니, 두 분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일도 좋겠군요. 수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그레이는 원하던 걸 얻었다.

    저렇게 읽고 싶다는데. 그냥 보여 주고 말자 싶어서 답안지를 넘겨줬다. 수준이 낮으면 또 어쩌겠어. 한번 비웃고 말겠지.

    그런데 그레이는 딱히 비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프리의 삶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을 예상 못 했다.

    조프리의 성적은 맞춰 줘야 하는데.

    지금이야 아카데미도 가지 않은 어린아이지만, 원래 성적이 일이 년 공부한다고 오르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학교에서 공부는 안 했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프리는 아카데미에서 만년 2등이었다.

    모든 수업에서 성적 2등. 여주인공이 보기에 만점에 가까운 시험지인데도 1등을 차지하지 못한다. 당연히 1등은 에드워드다.

    여기에 대해 여주인공이 조프리를 위로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조프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면 좋을까? 선택지가 등장했다.

    난 ‘에드워드 전하와 다른 수업을 듣는 게 어때요?’를 선택했고 조프리의 호감도가 깎였다. 왠지 그럴 것 같긴 했다.

    그때 조프리는 에드워드와 같은 수업을 듣는 이유를 여주인공에게 설명했다.

    자신은 언젠가 에드워드를 이길 것이다. 그러려면 에드워드와 승부할 기회를 피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고집이었던 것 같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조프리는 학년 석차 2등이었다. 열등감 키워드에 가려져서 잠깐 잊었는데 공부를 못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굉장히 잘하는 캐릭터다.

    조프리인 척하는 데는 보통의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에 내 답안지가 잡혀 있었다.

    “다 읽었어?”

    “예전에요. 아까도 불렀는데요.”

    “그래? 내 답안지가 도움은 됐어?”

    “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레이가 나를 한번 보고 시험지를 한번 봤다. 그러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말할까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건가?

    어린 조프리의 학습 능력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었다.

    도트나 왕비님은 우리 왕자님이 최고고 천재라는 식이라 도움이 안 됐다.

    내가 공부할 때마다 두 사람이 유독 흐뭇해하는 걸 보면 조프리가 아주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예상하던 중이었다.

    파이 공작은 조프리가 사고를 당한 뒤로 어딘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세 사람의 반응이 전혀 달라서, 난 조프리가 어떤 수준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조프리가 실은 정말 똑똑한 아이였나? 그레이가 견제할 만한 애였어?

    그렇다면 그레이는 확실히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뭐라고 변명해 볼까.

    “왜?”

    “기뻐하시지 않네요. 선생님께 칭찬받았는데.”

    그레이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괜히 긴장했다.

    내가 너야?

    그것 때문에 고민했던 거였어?

    어이가 없어서 표정이 숨겨지지도 않았다.

    “네 답안지가 더 훌륭하잖아.”

    열한 살이랑 말다툼하지 말자.

    “제 답안지 읽어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분량이 다르잖아?”

    “양이 질을 보장하지는 않잖아요.”

    “나 칭찬하는 거야?”

    그레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느껴지는 대로 묻자 그가 발끈했다.

    “그런 게 아니라! 물론 제 리포트가 훨씬 좋지만요!”

    “아……. 그래.”

    “다량의 공부라는 건 중요하니까요!”

    “그러게.”

    “숲을 보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지식이란 건 그 안의 세부적인 나무를 보는 거니까요. 문장의 정합성이라는 것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고요!”

    “응. 그래.”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됐다. 그런데 그레이는 약간 흥분한 상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하께서 고민하신 건 시험에 대해서가 아니었잖아요?”

    끈질긴 녀석이다. 조프리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달려드는지 모르겠다. 네가 더 잘났다니까.

    대충 상대해 주고 가려는데 그레이의 뒤로 이상한 게 보였다. 책상에 아직도 엎어져 있는 에드워드였다.

    왜 저러고 있지? 수업 끝나면 바로 돌아가던 애가.

    간밤에 피곤했는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에드워드?”

    “조프리 전하, 제 질문에 대답을…….”

    “에드워드가 이상해.”

    “예?”

    그레이가 조용해졌다. 그도 에드워드를 돌아봤다.

    에드워드의 머리카락은 이마와 귀를 덮고 있었다. 그 밑으로 상기된 뺨이 보였다. 에드워드는 땀투성이였다.

    “에드워드.”

    불러도 에드워드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얼굴을 가린 팔을 치웠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떨고 있었다.

    무슨…….

    에드워드의 팔은 뜨거웠다.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것 같지 않았다.

    뼈대가 보이는 손목과 부드러운 살. 작은 손가락 끝까지 뜨끈뜨끈해서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에드워드 전하께 무슨 일 있나요?”

    그레이가 다가왔다.

    “의사 불러.”

    그레이도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온몸이 불덩이 같은데도 에드워드는 신음도 내지 않았다.

    애가 이 꼴인데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 있었지? 이 자리에 사람이 몇이었는데. 수업 시간 내내 애가 앓고 있었는데…….

    그레이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그때 에드워드의 손이 유령처럼 올라왔다. 내 팔을 콱 잡았다.

    “부르지 마.”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푸른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여 나와 그레이를 살폈다. 열에 들뜬 얼굴로 그가 다시 말했다.

    “의사 부르지 마.”

    “에드워드?”

    에드워드는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처럼 어설프게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더니 털썩 쓰러졌다.

    난 에드워드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그를 지탱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에드워드의 몸은 깃털처럼 가볍지는 않았다. 실은 조프리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에드워드가 자기가 일어난 의자 위로 다시 주저앉지 않았다면 둘 다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괜찮아? 왜 이래? 어디가 아파?”

    에드워드가 갑자기 얼굴을 가렸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들썩이는 것 같은 기침이었다. 잦아들고 난 뒤에도 에드워드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난 에드워드의 팔을 잡아 내렸다. 눈까지 빨개진 에드워드가 나를 올려다봤다.

    난 아픈 어린아이를 본 적은 없지만, 에드워드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의사를 부르지 말라니 무슨 소리야?”

    “필요 없어.”

    에드워드가 반복해서 말했다.

    코도 눈도 빨갰다. 맹한 얼굴이었다.

    내 동생이었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끌고 갔을 텐데.

    “의사를 안 부르면 되는 거죠? 궁으로 모셔다드릴까요? 걸으실 수 있겠어요?”

    그레이가 딱딱하게 물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넘어지는 에드워드를 붙잡아 주려던 모습은 아니었다.

    얘는 진짜 뭐지?

    “필요 없어. 알아서 할 테니까 돌아가.”

    에드워드가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코가 막혔네. 저거 감기다.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 네 궁에 데려다줄게.”

    에드워드는 어느새 책상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그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싫어. 안 갈 거야…….”

    “그럼 여기서 그러고 있을 거야? 돌아가서 쉬어야지. ……에드워드? 자는 거 아니지?”

    “…….”

    에드워드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작은 몸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떨고 있었다.

    그레이는 찡그린 얼굴로 에드워드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갈까요.”

    “어딜?”

    “각자 집에요.”

    애가 이 꼴인데 두고 간다고? 내 표정을 본 그레이가 말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괜찮다고 하셨으니까요.”

    “네 눈엔 얘가 괜찮아 보여?”

    “의사가 필요 없으시다니 제가 달리 어떻게 도와 드릴 수 있겠어요? 전하께서는 제게 그냥 두고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어요.”

    그레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처럼 했다. 그렇다고 그 말이 말 같게 들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레이 크래커.”

    웃음기 없이 불렀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폈다.

    “예, 전하.”

    “에드워드 내 궁으로 몰래 옮기는 것 좀 도와줘.”

    “네?”

    “왕자의 지시야.”

    “네?”

    그레이가 되물었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닌 듯했다.

    난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한 팔을 내 어깨에 걸쳤다. 그레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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