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화 (25/293)

25.

부관은 얼떨떨해서 성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날 바움쿠헨은 정상적으로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묘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서는, 부관에게 조프리 왕자에 대해 물었다.

부관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건 거의 아무 대답도 못 했다는 뜻이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백치라는 소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짜하게 퍼져 있었지만 조프리 왕자에 대해서는 그마저도 없었다.

왕비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는 어린 왕자. 귀족 사회에서 조프리 왕자에 대한 인상은 희미했다.

부관은 그 말까지 빠짐없이 했다.

바움쿠헨은 ‘그런가?’ 하더니 오늘도 수업을 빠지지 않고 나갔다.

“돌아가면 몇 명 불러서 이스트 가의 고아원에 알렉스라는 꼬마가 있는지 찾아봐.”

“예.”

이게 왕자 전하가 주신 일거리와 관련이 있나? 고아원?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부관은 대답했다.

“마차도 새로 준비해. 요란하고 눈에 띄는 걸로. 경비대에 내가 방문하겠다고 전갈을 넣고.”

“알겠습니다.”

바움쿠헨이 씩 웃었다.

“어디 왕자 전하의 추측이 맞나 확인해 볼까.”

* * *

에드워드는 거리를 두자는 말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는 파이 공작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을 나가 버렸다.

그레이도 내게 슬쩍 인사하고는 바로 나갔다.

이런 일이 며칠째였다.

철저한 건 좋은 일이다. 궁인들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문제는 나였다. 점심과 오후 시간을 에드워드와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습관이 들었다.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에드워드를 앞에 앉혀 놓고 호감도를 올려 볼까 싶어 이런저런 말을 나 혼자 붙인 것뿐이지만.

그 시간이 붕 뜨니까 심심해졌다.

심심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절대 심심한 시간에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사실 조프리는 하루 종일 심심한 애였다.

또래에 신분이 맞는 친구라고 해 봐야 에드워드 아니면 그레이인데 둘 다 조프리와 놀아 주지는 않았다.

도트나 시종들은 심심하다고 하면 어울려 주기는 했다.

이 세계에도 체스나 카드놀이, 주사위 게임이 있었다. 열댓 살 먹은 시종들은 나를 한가운데 두고 게임을 진행하다가 말도 안 되는 순간에 이상한 짓을 해서 죽었다.

그렇게 내가 우승자가 되면 환호를 보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세상살이 잘하는 시종들이었다. 신종 괴롭힘처럼 느껴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내 건강 관리에 힘쓰는 도트는 내가 햇볕을 너무 안 쬔다며 밖에서 술래잡기를 하자고 권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또래 시종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술래잡기를 했다.

아이들이 술래를 피해 꺄아꺄아 뛰어다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조프리의 또래 시종들은 열 살이거나 그보다 한두 살 많거나 했다. 한 명은 여덟 살이었다.

애들이라도 즐거워서 다행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난 내게도 맞고 여가 시간을 보내기 괜찮은 놀이를 찾아냈다.

카드놀이 멤버인 시종들을 모아 성 안팎의 얘기를 듣는 거였다.

시종들은 별의별 걸 다 알고 있었다.

난 아직 내가 만나 보지 못한 마지막 공략 캐릭터 로웰 몽블랑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몽블랑 상단의 막내가 이제 열한 살이며, 몽블랑 상회의 주인인 아버지를 따라 온갖 나라를 여행 중이라는 소식 같은 거.

초대받아 방문한 왕성마다 공주님들에게 꽃과 연시를 선물하고 있다는 것 등.

로웰 쪽은 조숙한 유년기를 보내는 중인 듯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그다지 좋아하던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쪽은 적어도 캐릭터성에 충실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알렉스도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게임 원작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알렉스가 그 알렉스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째 바움쿠헨 경에게 연락이 없긴 하지만.

시종들도 바움쿠헨 경이 성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진짜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7. 간병 이벤트

“곤란하군요.”

파이 공작이 말했다. 그의 손에는 내가 작성한 답안지가 들려 있었다.

짧은 답안지에 뭐 읽을 게 있다고 그는 답안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정말 곤란하긴 했다.

얼마간 ‘조프리’로 살아 본 결과 내 일거수일투족은 왕비님께 전부 보고되는 게 틀림없었다.

시험 결과도 왕비님께 금방 알려질 것이다.

왕비님은 최근 내 성실한 복습 태도에 감명받은 상태였다. 도트 말에 따르면 난 예전 ‘조프리’보다 열심히 공부한다는 모양이었다.

그야 조프리보다 아는 게 없으니까 당연했다.

그런데 정작 시험은 엉망으로 봤다는 걸 알면 왕비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이 지금까지 수업을 잘 따라왔는지 보기 위해 파이 공작은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건 오늘 갑자기 공작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인 듯했다. 당연히 시험 기간도 없었고 공부 범위라는 것도 없었다.

공작은 오지선다형 답안지는 취급하지 않았다. 난 논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글을 써서 내야 했다.

파이 공작이 문제를 불러 줬다.

‘정복왕 에드워드의 내치에 관해 논하라.’

‘밀리엄 공주의 결혼 동맹에 관해 서술하라.’

종이에 공작이 불러 준 문제를 적고 머릿속을 뒤져 봤다.

보충 수업을 하는 동안 읽은 수많은 책들 가운데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눈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답안지를 한 문단 정도는 작성했는데 그러고 나니 쓸 게 없었다.

한 칸 떨어진 옆자리에서 그레이는 두 장을 넘어 세 장째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펜촉이 종이를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그 옆에서 에드워드는 엎어져 있었다. 시험 끝날 때까지 그 상태였다.

파이 공작도 에드워드를 굳이 깨우지 않았다. 내게 에드워드를 쳐다보지 말고 시험에 집중하라고 눈짓을 할 뿐이었다.

그레이가 펜을 놓음과 동시에 시험이 끝났다.

그는 여섯 장을 빼곡히 채운 뒤에야 뿌듯한 얼굴로 답안지를 놓았다.

파이 공작은 답안지를 걷어서 그레이의 것부터 읽었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레이는 긴장하고 있다가 파이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빙긋 웃었다.

에드워드는 백지 답안지를 냈기 때문에 다음 차례는 나였다.

“…….”

파이 공작은 한참 침묵했다.

이번에야말로 조프리가 백치가 됐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겠다.

“배움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복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여러 번 논해도 부족하지 않겠지요.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페이지를 넘겨 가며 눈으로 내용을 훑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책상 앞에 앉아 눈으로는 책을 읽고 있다 하여도 그 책을 진정으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책 백 권을 눈으로 읽는 것보다 한 권을 바르게 읽음이 더 중한 법.”

파이 공작은 내 답안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분하게 말했다.

단조로운 어투 때문에 내가 혼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아리송했다. 그냥 설교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레이가 날 힐끗 쳐다봤다. 너 때문에 괜한 소리를 듣는다는 시선이다.

혼나는 게 맞는 모양이다.

난 송구스럽다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노력하셨군요. 제가 권해 드린 책을 모두 읽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에 변화가 필요하겠지만, 여러 독서를 통해 경험을 쌓아 가는 것도 값진 일일 것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파이 공작이 답안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봤다.

난 고개를 끄덕이다가 놀랐다.

지금 칭찬 들은 건가?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파이 공작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오…….

공부로 칭찬을 듣기는 또 처음이었다. 둔재에게 너치고는 애썼다고 말해 주는 느낌이긴 하지만.

파이 공작은 막 깨어난 내게 역사와 상식을 가르쳤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하긴 그때에 비하면 갓난아이가 유아가 된 수준의 발전이긴 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인사했다.

교실의 분위기는 묘해졌다. 잠에서 덜 깬 에드워드는 멍한 눈을 깜빡이다 다시 엎어졌다.

그레이는 뭔가 신 걸 입에 문 듯한 표정이었다.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파이 공작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조프리 전하의 답안지를 읽어 봐도 될까요?”

“제게 물어볼 일이 아닌 것 같군요.”

파이 공작이 대답했다.

그레이가 나를 돌아봤다.

“괜찮을까요, 전하?”

평소와 표정이 달랐다.

냉정한 척하지만 눈이 불타고 있었다. 저거 승부욕인가?

그레이는 파이 공작에게 어지간히도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는 리포트 수준의 답안을 써 냈는데 남이 한 문단씩 써 놓고 칭찬받으면 고깝겠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