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화 (24/293)
  • 24.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의심이 들었다. 내가 경비대장을 믿을 수 있나?

    경비대장이 그런 수상쩍은 조직에 대해 모를 수 있을까?

    그는 내가 원한다면 고아원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애초에 알렉스를 내게 데려온 것도 경비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고아원에 대해 알아볼 때 만물상에 대한 정보를 같이 건네주지 않았다.

    “그대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

    바움쿠헨 경이 삐딱하게 섰다.

    “부탁입니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전하께서는 왕자이십니다. 명령하시면 따를 텐데요.”

    “그대 주인은 폐하시지. 난 아니야. 왕비님도 아니고. 그대가 화났던 건 그것 때문이잖아? 똑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진 않아.”

    왕비님은 바움쿠헨 경을 불러다 내게 붙였다. 경이 충성 맹세를 한 상대는 왕이었고 왕비님은 경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긴 했으나 그의 주군은 아니었다.

    거기서 바움쿠헨 경은 한번 삐딱해졌다.

    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부탁할게.”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빚을 지워 두면 너도 좋을걸.

    난 왕자잖아. 게다가 부자야.

    그런데 바움쿠헨 경에게 돈이 필요하기나 한가?

    “……어제 말씀하신 아이와 관련된 일입니까?”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가 기억할 줄은 몰랐다.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오늘 제가 수업에 나오면 그 아이를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바움쿠헨 경이 미소 지었다. 그는 위압적인 체격의 소유자라 웃지 않으면 무섭게 느껴졌다. 반대로 웃으면 너무 가볍게 느껴지긴 했다.

    그런 것도 약속이라고 하나.

    어쨌든 됐다. 바움쿠헨 경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응. 그 아이야. 이름은 알렉스고,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졌어. 인상적인 외모니까 한번 보면 누군지 알 거야. 그 애가 있는 고아원을 누가 ‘만물상’이라고 말했대.”

    “누군지 몰라도 귀하신 몸이군요. 소개받기 위해 제가 움직여야 하다니. 그 아이를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응. 안전하게 보호해 줘.”

    “그러겠습니다.”

    바움쿠헨 경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고마워. 몸조심해.”

    “위험한 일입니까?”

    바움쿠헨 경이 되물어서 난 당황했다.

    “의례적인 말이야.”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군요.”

    “그래도 조심해.”

    이 게임에 대단한 악의 세력이 있었던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고아원에 대해서는 경비대장에게 말해 뒀어.”

    “그에게 도움을 받으면 되겠습니까?”

    “아니. 고아원이 그 자리에 없으면, 그를 의심해.”

    바움쿠헨 경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예, 전하.”

    * * *

    폴먼 바움쿠헨. 영웅 바움쿠헨 백작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조프리 왕자의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왕자의 연무장은 말을 타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어서 비좁기 그지없었다.

    사방이 건물로 막혀 있어 왕자를 보호하는 데는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바움쿠헨은 말 위에 앉아서 좁은 연무장을 빙글빙글 도는 왕자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바움쿠헨은 왕자가 그러고 있는 걸 보는 게 즐거웠다.

    왕자는 근육이 없고 체력이 약했다. 말을 다루기 이전에 그 위에 앉아 있는 것부터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왕자가 말 위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정신력 덕분이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들썩거리는데 요령과 끈기로 버티고 있다.

    왕자의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바움쿠헨은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왕자의 승마 실력이야, 아직 나이도 어리고 나중에 기사가 될 것도 아닌데 천천히 키우면 된다.

    하지만 바움쿠헨은 왕자가 능숙한 실력을 가졌으면 했다. 왕이 뭐라고 못 하게.

    끝없이 연무장을 돌면서도 왕자는 불평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 잠겨서 그런 것 같긴 했지만. 몸이 힘든데 그걸 무시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바움쿠헨이 솔직히 감탄하자 왕자는 어이없어했다.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진심이었는데.

    바움쿠헨은 굳이 진심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왕자가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왕자는 찬사를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이 왕자님은 뭘 좋아하는 걸까?

    바움쿠헨은 왕자에게 대단한 무례를 저질렀다. 왕자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왕자는 처벌하고자 하면 얼마든 처벌할 수 있었다.

    왕자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왕비가 알아채도록 두면 바움쿠헨은 알아서 곤란해졌을 터였다.

    그런데 왕자는 자신의 시종을 보내 바움쿠헨을 설득했다.

    정작 그 시종은 왕자를 모욕한 바움쿠헨이 미워 죽겠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왕자의 말은 빠짐없이 전했다.

    이상한 왕자다.

    바움쿠헨은 왕자에게 자신을 구한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스스로 말하기는 뭐했지만 바움쿠헨은 꽤 귀한 몸이었다.

    왕자가 생각이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자신을 사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왕자가 요청한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만물상의 고아를 구해 달라는.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면 바움쿠헨으로서는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왕자님은 사람 다루는 법을 아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마음에 드는데.

    왕국을 손에 쥐고 제멋대로 흔드는 외국인 왕비. 그 왕비가 품에 끼고도는 유약한 왕자.

    조프리 왕자는 여러모로 바움쿠헨의 예상을 벗어났다.

    부관이 마차 문을 열며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바움쿠헨은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자신이 웃고 있는가 싶어서였다.

    얼굴은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그가 히죽거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들개와 이리의 소굴 같은 왕성에서.

    “좋은 일은 무슨. 일거리가 생겼어.”

    바움쿠헨이 투덜거렸다.

    “일거리 말입니까? 왕자 전하의 수업 외에요?”

    “그 왕자 전하께서 주신 일거리야.”

    “왕자 전하께서?”

    부관은 맞장구치듯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별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관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아서였다.

    부관은 바움쿠헨 백작을 5년간 모셨다. 백작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작은 말로는 불평했으나 표정은 약간 웃고 있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부관이 보아 온 바움쿠헨 백작은 게으른 인물이었다. 스스로 나서서 일을 만드는 성품이 아닌 데다 싫은 일을 웃는 낯으로 하지도 못했다.

    타고난 재능에 삐딱한 성품, 반골 기질이 더해져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왕국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굴러가고 있었다면 저 성격에 한량 취급도 못 받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왕국은 평화롭지 않았고 국경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국경 도시에서는 군인을 필요로 했다.

    이러저러한 정략의 결과 바움쿠헨 백작이 국경에 보내졌다. 부관이 백작을 만난 것도 국경에서였다. 백작은 유능한 장수였고 부관은 그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백작이 이렇게나 모시기 어려운 상관인 줄 알았다면 재고해 봤을 텐데.

    그리고 5년이었다. 바움쿠헨 백작은 국경의 아고타족을 몰아내고 평화를 가져왔다.

    열렬한 환영 속에 수도로 올라가며 바움쿠헨 백작은 앞으로 일 년은 백수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왕성의 축하연이 끝나기 무섭게 바움쿠헨 백작이 받은 건 왕자의 승마 스승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바움쿠헨은 그 길로 영지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는 세대가 바뀌도록 이어진 이민족과의 분쟁을 일단락했다.

    대단한 대접을 바라진 않았지만, 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도 가만있을 정도로 성격이 좋지도 않았다.

    가신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바움쿠헨은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가신들은 아무리 그래도 왕비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면 곤란해질 거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 결과 바움쿠헨은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문제의 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랬지. 하지만 전하께서 이 미천한 신하의 능력을 필요로 하신다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겠나? 그대라면 할 수 있겠어?”

    부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무슨 말씀이시란 말인가. 그는 상관과 설전을 하는 대신 저야 못 하지만 각하께서는 하시잖아요, 라는 시선을 보냈다.

    바움쿠헨 백작은 왕비의 명령으로 시작된 승마 수업에도 첫 시간 외엔 나가지 않았다.

    그래 놓고는 가신들이 걱정하니까 ‘뭐 어쩔 거야. 수업은 하고 있는데.’라고 뻔뻔하게 나왔다.

    부관은 속이 뒤집어지는 걸 느꼈는데, 상관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더 그랬다. 어쩌시려고 저러나. 난 이러고 있어도 되나? 억지로라도 왕성으로 모셔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성에서 온 심부름꾼이 바움쿠헨 백작을 만나고 갔다. 이제야말로 큰일 났다, 백작 부인 얼굴은 어떻게 뵙나 부관은 속으로 떨었다.

    그런데 다음 날 바움쿠헨이 성으로 갈 마차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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