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화 (23/293)
  • 23.

    “에드워드?”

    “응.”

    에드워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알겠어.”

    진짜 알아들은 건가?

    알렉스를 돌아보니 그는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동정심 같은 소리 하네, 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녀도 저것보단 알아보기 어렵겠다.

    동정심은 돈이 안 되니까.

    하지만 내 동정심은 돈이 될걸.

    식사가 끝나고 난 에드워드에게 도트를 붙였다. 에드워드가 어딜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방에 집어넣어야겠다.

    “침실까지 바래다줘.”

    “예, 왕자님.”

    도트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에드워드 뒤에 바짝 붙었다.

    에드워드가 거부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식사 도중부터 어딘가에 정신을 판 것 같았다. 도트를 데리고 멍하니 나갔다.

    에드워드를 처리하고 나는 알렉스를 붙잡았다.

    “넌 오늘 나랑 자자.”

    “뭐라고요?”

    “영광인 줄 알아. 왕자랑 한 침대에서 자는 경험을 아무나 해 보는 줄 알아?”

    그런 영광 필요 없다는 얼굴로 알렉스가 끌려왔다.

    ‘조프리’의 침대는 충분히 넓어서 성인 두 명이 누워도 남을 크기였다. 나는 알렉스를 침대 위로 밀치고 두 바퀴 굴렸다.

    알렉스는 데구루루 굴러 침대 가장자리에 안착했다.

    “뒤척이지 마. 나 잠귀 밝으니까.”

    난 하품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잠깐…….”

    “쉬이이…….”

    난 알렉스의 배 위에 팔을 얹었다. 알렉스는 금방 조용해졌다.

    얠 그 고아원에 돌려보내도 될까?

    바움쿠헨 경을 만나게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깊게 이어지지 못했다. 알렉스의 심장 박동이 팔을 통해 느껴졌다. 어린아이의 몸은 작고 뜨끈뜨끈했다.

    온몸이 나른해졌다.

    알렉스는 새벽에 떠났다. 그의 품에는 과자 보따리가 바리바리 안겨 있었다.

    그에게 약간의 은자와 통행증을 챙겨 줬다. 도트가 그를 데리고 성문까지 나가기로 했다.

    나는 정원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무슨 일 있으면 경비대로 가. 무슨 일 없어도 들러. 무사히 도착했다고 나한테 알려.”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알렉스가 물었다.

    “알고 싶어?”

    “아뇨.”

    알렉스는 과자 보따리를 추슬렀다. 산더미 같은 보따리 때문에 그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자기 몸만 한 짐을 이고 가는 개미 같았다.

    얠 이대로 보내도 정말 괜찮은가.

    망설이고 있는데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에 달려 있던 이슬이 우리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도트가 재빨리 내 몸에 로브를 둘렀다.

    그의 손이 내 턱 아래서 야무지게 로브를 매듭지었다. 난 순식간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공기에 휩싸였다.

    내 앞에선 알렉스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것도 가져가.”

    난 로브를 풀어 알렉스에게 입혀 줬다.

    “아니, 안 그래도…….”

    알렉스가 당황했다. 도트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 ‘우리 왕자님이 이렇게 훌륭하시지’ 하는 표정으로 알렉스를 쳐다봤다.

    바로 뒤에 내 궁이 있다는 사실은 도트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듯했다.

    도트는 어떻게 매듭 모양을 잘 만들던데 내게 그런 손재주는 없었다. 아무렇게나 리본을 묶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재채기라도 할 것처럼 코를 찡긋거렸다.

    입을 꾹 다문 그가 이내 물었다.

    “왕자님은 언제 왕이 되세요?”

    도트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깜짝 놀랐다. 불경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애였다.

    “언제고 말고 난 안 돼.”

    “네? 왜요?”

    “폐하께서는 만수무강하실 거거든.”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알렉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오래 사실 거라는 뜻이야.”

    “하지만 영원히 살진 못하잖아요? 그 다음에는 왕자님이 왕이 되는 거 아니에요?”

    도트가 허락만 떨어지면 알렉스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기시감이 들었다. 왕비님과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른다는 건 대단했다. 왕비님과 달리 알렉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젊은 왕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다음 왕위를 논한다는 건 왕이 죽기를 바란다는 얘기가 아닌가.

    난 여기서 얘기를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나중에 성장한 에드워드를 만나게 될 거였다.

    “왕은 에드워드가 될 거야.”

    “왜요?”

    “에드워드가 1왕자니까.”

    “그냥 왕자님이 왕 하면 안 돼요?”

    알렉스가 맹랑하게 물었다. 도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됐으면 좋겠어?”

    “네.”

    “왜?”

    웃음을 참으며 묻자 알렉스는 고양이 같은 눈을 치떴다.

    “그야 왕자님은 좋은 분이잖아요? 당연히 좋은 왕이 되실 테니까요.”

    ‘왕자는 성군이 될 거예요.’

    그 말은 왕비님과 완전히 다르게 들렸다.

    너 아부 잘하는구나?

    “이제 가. 사람들 깨기 전에. 도착하면 경비대 들르는 거 잊지 말고.”

    난 알렉스를 보냈다. 알렉스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트를 따라 갔다. 멀리서 그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내가 뭘 해 줬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걸까? 그보다 좋은 왕과 좋은 사람의 자질은 다르지 않나.

    어린애들이란.

    하지만 역시 나쁜 사람 취급받는 것보단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좋았다. 여유가 있으면 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미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 * *

    저녁때가 다 되어 승마 수업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경비대에선 소식이 없었다.

    경비대장은 알렉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경비대에 들렀다면 바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바움쿠헨 경이 물었다. 그는 이런 좁은 곳에서 무슨 승마를 배우냐며 투덜거리다가 불만 있으면 왕비님께 고하라는 말을 듣고 조용해진 참이었다.

    난 안장 위에서 자세를 잡고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바움쿠헨 경이 손뼉을 쳤다.

    “하지 마, 경.”

    “예, 전하.”

    나는 찡그린 얼굴로 바움쿠헨 경을 쳐다봤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훌륭하십니다, 전하.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탈 수 있다니 대단한 발전 아닙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바움쿠헨 경이 말의 고삐를 마구간지기에게 넘겼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자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던 왕비님의 시종이 자리를 떴다.

    나는 시종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그대, 만물상에 대해 알아?”

    “사전적인 의미의 만물상 말입니까?”

    “사전적이지 않은 의미의 만물상은 뭐지?”

    바움쿠헨 경이 머리를 긁적였다.

    “왕자님께 나쁜 거 알려 드렸다고 왕비님께서 눈 시퍼렇게 뜨고 화내실 게 걱정됩니다만…….”

    “시종은 갔지만, 무서우면 말하지 마.”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전하. 하지만 전하께서 물으시는데 제가 어찌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족이 길었다. 이건 알렉스에 대한 일이고, 알렉스는 내 생각대로라면 바움쿠헨의 양자가 될 애였다.

    원래라면 그대가 구해야 하는 애란 말이야, 라고 할 수도 없어서 난 대꾸했다.

    “그대의 충정은 늘 고맙게 여겨.”

    바움쿠헨 경이 씩 웃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일종의 심부름꾼이라고 들었습니다. 장물을 유통하거나 은밀한 일을 처리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더군요.”

    “귀족에게?”

    “예. 평민에게 사채를 끌어다 쓰고 망하는 귀족이 나오는 판이니 세상 참 요지경 아닙니까? 설마 전하께서도 은밀한 자금이 필요하신 건 아니겠죠. 그래도 거긴 피하시길 바랍니다. 평판에 좋을 거 없으니까요.”

    “은밀한 자금이 대체 뭔데?”

    “뭐…….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으니까요.”

    바움쿠헨 경은 대답을 피했다.

    뭔데. 도박 자금 같은 거?

    “그런 돈 필요 없어.”

    ‘조프리’는 대단한 부자였다. 왕국이 부유해서는 아니었고 왕비님이 부유한 나라의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도박을 하고 싶대도 당장 가진 사치품 몇 개만 팔면 자금이 나올 거였다. 물론 이 사치품은 왕비님의 사재였다.

    “거기 위험한 곳이야?”

    “위험한 곳이면 진작 소탕됐을 겁니다.”

    “아니. 그대 같은 대귀족 말고……. 평민들에게 말이야.”

    바움쿠헨 경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까부터 하시던 고민이 그쪽과 관계있는 일입니까?”

    “있을지도 모르고…….”

    “상상이 안 가는데요. 성안에 계신 전하께서 그자들과 엮일 일이 뭐가 있습니까?”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고아원이 천 리 밖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해 뜰 때 나간 애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이상했다.

    어둠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불안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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