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가 튀어나오기 전까지 난 정원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에드워드가 아니라 암살자 같은 존재였다면 ‘조프리’는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왕자님!”
날 보호하겠다고 뛰쳐나간 도트가 대신 죽었거나.
“조프리.”
에드워드가 태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너 거기서 뭐 해?”
경비병은 대체 뭐 하는 걸까? 돌아다니는 왕자를 못 보는 건 불찰 수준이 아니지 않나? 저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마주쳐서 다행이다.”
에드워드가 멍하니 말했다.
다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행이긴 다행이었다. 에드워드를 방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궁에서 이런 앨 주웠는데, 네 것 같아서.”
에드워드가 나무 뒤에서 뭐를 쑥 빼냈다.
“이거 놔!”
반항하는 어린애가 끌려나왔다. 알렉스였다.
“조용히 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래도 알렉스가 몸부림치자 에드워드는 알렉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알렉스가 윽 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넘어진 알렉스는 고개를 들고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불쌍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잘못한 줄은 아나 보지.
“얠 어디서 찾았어?”
“시종들 다니는 통로에서 헤매고 있던데.”
“넌 그런 데를 왜 갔는데?”
에드워드는 눈만 깜빡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 못 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에드워드의 귀는 편리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었다.
“너 옷은 또 왜 그래?”
에드워드가 입은 옷은 도트가 입은 것과 비슷했다. 시종 복장 같았다.
에드워드는 여전히 딴청이었다. 순진하고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허공만 보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밤 나들이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닌가?
자기 몸은 끔찍하게 생각하더니. 물론 자기애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서였지만. 그런 주제에.
“너 진짜……. 이 시간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왜 화를 내?”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날 걱정한다고?”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까지 내가 한 게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에드워드의 식사를 챙기고 기분을 살피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말문이 막혔다. 그게 조금도 와 닿지 않았다고?
“걱정할 줄 몰랐어.”
애먼 애를 윽박지르는 기분이었다. 에드워드는 정말로 몰랐던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내가 화내서 놀랐거나.
“너…….”
“…….”
에드워드가 물끄러미 나를 봤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 반응을 살피는 어린애 같았다. 에드워드가 그런 어린애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다른 사람이 걱정할 줄 몰라?
걱정을 받아 본 적 없으니까.
‘조프리’가 자기를 걱정할 줄 몰랐으니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표면적으로 내가 주는 걸 받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에드워드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은 파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딜 헤매고 다녔는지 지쳐 보였다.
저런 모습을 보면 난 에드워드를 불쌍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저녁은 먹었어?”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
에드워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따라와. 씻고 뭐라도 좀 먹자.”
먼저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데 뒤따라오는 소리가 없었다. 돌아보니 에드워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에게 붙잡힌 알렉스도 엉거주춤 분위기만 살피고 있었다.
“거기 계속 있을 거야?”
“내가 걱정돼?”
에드워드가 물었다.
“어. 너 때문에 잠도 안 올 지경이야.”
난 농담처럼 말했다.
“넌 몰랐던 것 같지만, 보통은 관심 없는 사람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해하지 않거든.”
“몰랐어.”
“앞으로는 알아 둬.”
“날 매일 걱정했어?”
이상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의 매일 에드워드의 밥을 챙기는 건 사실이었다.
“응.”
“언제부터?”
“왜. 언제부터인지 알면 그날부터 고마워하게? 그만하고 들어와.”
난 에드워드와 알렉스를 욕실로 집어넣고 하인들의 수색 작업을 중단시켰다. 욕실에서 나와 보송보송해진 두 사람에게 새 옷을 입히고 늦은 저녁을 먹였다.
에드워드는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백지처럼 깨끗해서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어디 가던 길이었어?”
내 물음에 에드워드의 포크가 멈췄다. 언젠가 왕비님 앞에서 굳어 버린 에드워드가 떠올랐다.
에드워드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알았어. 안 물어볼게.”
에드워드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새파랬다. 긴 속눈썹이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에드워드가 유리벽 너머로 가 버릴 때마다 난 다른 생물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안 물어볼 테니까 먹어. 난 네가 싫어하는 건 안 물어볼 거야.”
왜? 에드워드의 의문이 손바닥처럼 들여다보였다.
이런 건 이렇게 쉽게 알 수 있는데. 정말로 알고 싶은 건 알 수 없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밥은 맛있어?”
“응.”
“너 감자 요리 좋아하네.”
“응.”
에드워드는 착하게 대답하고는 버터로 구운 빵을 입에 넣었다.
여전히 에드워드는 맛있게 먹었다. 그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졌다.
어쩔 수 없지.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난 에드워드가 잘 먹었으면 좋겠고 ‘조프리’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귀가 닳도록 말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두울 때 돌아다니지 마. 걱정되잖아.”
“알았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도트한테 말해. 챙겨 줄 거야.”
“응.”
“알렉스를 찾아 줘서 고마워.”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 하인이야?”
에드워드가 물었다. 아무렇게나 포크를 다루고 있던 알렉스가 곁눈질을 했다. 자기 얘기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내……. 소매치기?”
“소매치기?”
에드워드는 놀란 듯 알렉스의 손목을 쳐다봤다.
“그런데 왜 손이 달려 있어?”
“뭐…….”
알렉스의 포크가 접시 위로 떨어졌다. 알렉스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소매치기는 사형 아니었어?”
“그렇게 처벌하는 영주도 있겠지. 국법은 손목을 잘라.”
에드워드가 말했다.
“손목이 달려 있는 소매치기는 처음 봤어.”
알렉스는 캭 소리를 내더니 의자를 뒤로 끌고 물러났다.
“이 사람 뭐예요?”
“왕자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알렉스는 발딱 일어나 의자를 방패 삼아 숨었다. 그는 어쩐지 배신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네 시종의 물건을 훔쳐 간 그 소매치기야?”
에드워드가 물었다.
“맞아.”
“네가 거둘 생각이야?”
“아니. 그렇게는 못 해. 오늘 알렉스가 도망을 치는 바람에 온 궁에 소란이 일어서, 아마 내일 중으론 왕비님 귀에 들어갈 거야.”
“저 소매치기가 걱정돼?”
“당연하지.”
네 말에 따르면 최소 손목, 최대 머리가 날아간다는 소리인데.
알렉스는 경계심이 누그러진 듯했으나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난 도트에게 손짓해 새 포크를 가져오게 했다. 알렉스의 포크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들었지? 넌 내일 날 밝자마자 나가야 돼. 밥 든든하게 먹어 두는 게 좋을걸. 소원 성취해서 좋겠다.”
대체 도망은 왜 친 거야? 성 밖 구경도 못 할 거.
나야 도트 같은 시종이 붙어 있어서 금방 적응했지만, 성안은 넓고 복잡해서 처음 들어온 사람은 헤매기 딱 좋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거 말곤 없어요?”
알렉스가 물었다.
“뭐. 혼나고 싶어?”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 보내 줄 테니까 오늘 밤은 좀 얌전히 있어. 너 때문에 오늘 몇 사람이 고생한 줄 알아?”
“그런데 왜…….”
알렉스가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왜 처벌 안 하느냐는 소린 것 같았다. 벌 받는 거 참 좋아하네.
“누굴 살인마로 알아? 네 손목도 머리도 관심 없거든.”
“넌 아무나 걱정해?”
에드워드가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있어?”
대체 내가 살인마가 아니라는 것과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원래 알던 사이야?”
“아니?”
‘조프리’가 소매치기를 알고 지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아무나가 아니야?”
에드워드가 캐물었다.
난 맥이 탁 풀렸다.
“에드워드. 난 널 특별히 걱정해. 알렉스에 대한 건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는 동정심이야. 이해했어?”
“…….”
에드워드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번에는 멍한 척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뺨에 갑자기 붉은 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