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화 (21/293)
  • 21.

    “하인들은 아직도 찾고 있어?”

    “예. 좀 더 재촉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만 찾으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알렉스가 제 발로 나간 게 아니라면.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시종의 어깨가 굳었다. 긴장했다.

    “전하?”

    모든 시종이 왕비님 편이라고 의심하는 건 안 좋은 짓이다.

    “그럼 안 찾아본 곳을 좀 살펴볼래? 어린애라 길을 잃었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모르잖아.”

    “예, 전하.”

    시종이 사라졌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벽마다 촛불이 켜졌다.

    희미한 불꽃은 내가 복도를 통과해 침실로 향하는 동안 점점 밝아졌다.

    저녁 바람이 땀을 식혔다.

    도트가 소매치기를 당한 시장 부근은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마차로는 그렇다는 소리고, 아이가 혼자 걸어가기에는 부담되는 거리였다.

    정말 성문을 나섰나?

    해가 지면 성문은 닫힌다. 성을 탈출할 계획이었다면 알렉스는 시간을 잘 골랐다.

    * * *

    내가 씻고 있는 사이 도트가 돌아왔다. 그는 커튼 너머에서 물었다.

    “목욕 시중을 들까요, 왕자님?”

    “됐어. 알아본 건 어떻게 됐어?”

    도트가 술술 말했다.

    “이상한 고아원이었어요. 겉보기에도 흉가처럼 생겨서 울타리도 보수가 안 되어 있더라고요. 원장이란 사람 눈빛도 이상하고요. 후원을 하고 싶다고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지내는 방을 보고 결정하고 싶다니까 반응이 안 좋았어요. 병에 걸린 아이가 있어서 들어가면 안 된다나 뭐라나. 병에 걸렸으면 병원에 보내야지 왜 방에 두냐고 했더니, 가난한 고아원이라 어쩔 수 없다던데요?”

    “아이들은 봤어?”

    “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산책 시간이라 다들 안에 없다는 거예요. 기다리시면 데려오겠다고 해서 한참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막 씻은 것 같은 남자애 두 명을 데려왔는데, 둘 다……. 어딘가……. 수상쩍게 생겼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난 욕조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나가자 도트가 셔츠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쩍게 생긴 게 어떤 건데?”

    “눈빛이요, 막…….”

    “응. 눈빛이?”

    “모르겠어요.”

    도트가 얼굴을 붉혔다.

    “주변 탐문은 해 봤어?”

    “네. 물어봤는데…….”

    도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누가 고아원 주인을 ‘만물상’이라고 말했어요. 이상하게 킬킬 웃으면서요.”

    대놓고 수상한 별명이었다.

    아무래도 이 게임은 인물에게 이것저것 설정 넣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고아였고, 이런저런 일을 거쳐 바움쿠헨 경의 양자가 되었다는 게 내 추측이었다.

    알렉스 루트로 플레이했으면 내막을 알았을 텐데. 조프리 루트를 탔을 때 얘가 보이는 대로 성격 좋기만 한 왕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게임 공략은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고 유연호가 말했다. 걔는 게임만 하는 주제에 성적도 좋았다.

    과외에 돈을 쏟아붓는데 어떻게 성적이 나쁘겠냐고 유연호는 되물었지만, 나는 그 녀석이 머리가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캐릭터들을 파고들면 각자 문제가 하나씩 있고, 여주인공은 그것을 해결한다.

    난 게임을 그렇게 플레이했어야 했다.

    조프리의 열등감 같은 것을 캐릭터 특성이구나 생각하고 넘어가서는 안 됐던 것이다.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경비대장한테는 고맙다고 말했어?”

    위험한 일이 될까 봐 도트 혼자는 보내지 않았다. 경비대장에게서 몇 명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경비대원들이 도트를 호위했을 것이다.

    도트는 다시금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아, 그리고 그 고아원, 왕자님만 허락하시면 경비대장이 정리하겠다고 했어요.”

    “아니. 수상한 낌새 보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

    어린애 말 한마디로 장소 하나가 날아간다니 무서운 얘기였다.

    하지만 도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기색이었고, 먼저 제안한 경비대장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도트는 셔츠 단추를 채우고 내게 바지를 입힌 후 양말을 신겼다.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몸을 내줬다.

    원래 게임 속에서 알렉스와 바움쿠헨 경은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됐을까?

    저녁 식탁에는 칠면조 요리가 올라왔다. 흰 접시 위에 장식이 곁들여져 마치 명절 같았다.

    요리사가 잘 구워진 다리를 잘라 내 접시에 덜었다.

    “어마마마께 먼저 드려야지.”

    내가 눈치를 보며 말하자 왕비님은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왕자. 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식당 조명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왕자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이 어미라도 왕자를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

    촛불이 그늘을 만들었다. 왕비님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촛불이 흔들렸고 왕비님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그렇지 않아요, 어마마마.”

    “내 말이 틀렸다는 건가요, 왕자?”

    “아니요…….”

    내가 언제 ‘조프리’의 몸을 함부로 했는지, 생각할 것도 없이 난 자주 그랬다. 오기로 연무장을 돈 것부터 그랬다. 왕비님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다루지도 못하는 말을 타고 시종은 왜 쫓았을까? 에드워드 혼자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바움쿠헨 경의 수업은 왕자에게 도움이 되던가요?”

    “예, 어마마마.”

    “그렇군요.”

    왕비님이 웃었다. 나는 또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았다.

    왜 나한텐 눈치라는 게 없을까.

    “이 어미는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해 걱정이 태산이지만, 왕자는 더 많은 것을 보았겠죠. 왕자가 하는 일을 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이해할까요? 내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인걸요.”

    나는 뜨악했다. 왕비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프리’를 비난하고자 마음먹은 듯했다.

    “그러니 이 어미가 아무리 걱정해도, 왕자의 사고 소식을 듣고 온몸이 떨려 제대로 설 수조차 없어도 왕자는 신경 쓰지 않는 거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마마마.”

    “그런가요? 왕자의 말이 모두 옳아요. 신경은 쓰이지만 나를 달래러 올 정도는 아니었군요.”

    “죄송해요, 어마마마. 제가 어리석었어요.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줄 몰랐어요.”

    “그렇군요. 내가 걱정하는 모습은 떠올리지도 않았던 거예요.”

    “어마마마…….”

    차라리 화를 내면 나을 텐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왕비님의 불같은 모습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어서 들어요. 식겠어요.”

    “잘못했어요, 어마마마.”

    “아니요. 왕자가 이 어미에게 비밀을 만든대도, 왕자를 걱정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서운해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서운하다는 뜻이잖아?

    왕비님의 젊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애써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표정도.

    “바움쿠헨 경에 대해 말했다면 내가 조치를 취했을 텐데.”

    역시 알았구나. 바움쿠헨 경이 수업 안 나왔다는 거.

    알게 된 시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비님은 그때부터 ‘조프리’가 말하길 기다렸을 것이다.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왕비님 나름대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어마마마께서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했어요.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고요.”

    왕비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왕비님에게로 갔다. 내가 먼저 왕비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음부터는 꼭 말씀드릴게요.”

    “아니에요, 왕자. 이 어미가 정말로 어리석어요. 왕자가 이렇게 자랐는데도…….”

    왕비님의 머리카락이 목을 간질였다.

    까맣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조프리’의 것과 같은.

    “바움쿠헨 그자는 국경으로 좌천되기 전까지 골칫거리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영웅으로 불리고 있으니 내 왕자에겐 도움이 될 거예요. 왕자가 옳아요.”

    왕비님이 말했다.

    “이 어미는 신경 쓰지 말아요. 왕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요. 내 왕자는 왕이 될 거예요. 성군이 되겠죠.”

    왕비님은 이전처럼 나를 끌어안지 않았다. 그런데도 숨이 막혔다.

    어째서일까. 난 성군 같은 게 될 생각도 없고, 왕비님은 내 왕비님도 아니고, 내가 부담 가질 필요는 없는데.

    커다란 돌이 가슴에 들어앉은 듯했다. 나는 누군가의 전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6. 호의

    내가 내 궁으로 돌아간 건 밤이 다 되어서였다.

    난 침대에 몸을 누이자마자 잠들 계획이었다. 내 방으로 통하는 정원에서 에드워드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실현 가능했을 것이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 에드워드라는 걸 깨닫자마자 잠이 달아났다.

    네가 왜 거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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