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0화 (20/293)

20.

그레이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협박이 효과가 있으려면 공포심을 자극해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에드워드는 가끔 좀 소름 끼쳤다.

그러니까 왕성에서 살아남은 거겠지. 에드워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왕비를 두고도.

그레이는 에드워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에드워드가 수상쩍을 정도로 다정하게 구는 조프리를 받아 주는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왕족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그런데 조프리 왕자는 왜 저러는 걸까?

그레이와 에드워드가 그에게 속아 넘어갈 거라고 믿는 걸까? 정말 그렇게 어리석을까?

그레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꾸만 잡념이 피어나려 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자.

그레이는 왕족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두 왕자의 친구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을 저울질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이 왕국에 도움이 될지.

그게 재상의 후계자인 그레이의 의무였다.

* * *

두 번째로 보는 바움쿠헨 경은 이전과 다른 인상이었다. 뭐가 달라졌나 했더니 주렁주렁 달린 훈장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수업 시간 전에 도착하기까지 했다.

“조프리 전하.”

바움쿠헨 경이 경례했다.

“건강해 보이네, 경.”

“예. 덕분에.”

“오늘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지? 오늘도 체력 훈련인가?”

“짓궂으시군요, 전하. 듣던 것과는 다른 분이네요.”

“그래? 어떤 말을 들었기에?”

“마음이 여리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분이시라고요.”

바움쿠헨 경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왕비님 치마폭에 숨어 사는 어린애란 소린가?

마구간지기가 말을 데려왔다. 스위티가 아닌 다른 말이었다.

“스위티는?”

“왕비님께서……. 죄송합니다.”

마구간기지가 고개를 숙였다.

난 정신을 차렸다.

“그대가 죄송할 일이 아니야. 알려 줘서 고마워.”

‘조프리’가 왕비님의 이름을 팔아서 할 수 있는 건 말을 마구간에 넣는 것까지였다.

왕비님이 그 말을 다시 마구간에서 끌어내 처벌하고자 하면 막을 수 없었다.

난 마구간지기가 데려온 갈색 말을 쓰다듬어 주고 스위티에게 그랬던 것처럼 설탕을 먹였다. 나쁜 주인을 만나서 안됐구나, 너.

바움쿠헨 경이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말을 전혀 못 다룰 줄 알았나.

“내 진도 말인데, 발판이 있으면 말에 오를 줄은 알아. 경보도 할 줄 알고. 달리는 건 무리인데 어젠 내가 의욕이 과했던 걸로 하자고.”

“왕비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라고요?”

“아니. 말은 내가 할 거고 그대는 송구스럽다는 태도로 가만히 있으면 돼.”

바움쿠헨 경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저같이 건방진 놈을 신경 써 주시는 겁니까? 자기 직분도 모르는 아랫사람을? 과하게 너그러우시군요.”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고……. 그대에겐 미안하기도 하니까.”

“제게 미안하시다고요? 왕자를 가르칠 영광을 감히 걷어찬 놈인데요?”

“그대는 귀가 없어? 어제 날 태운 말은 죽었어. 그대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건 알아. 하지만 왕비님께 말보다 더 좋은 취급을 받을 거라 기대는 마.”

뻔뻔한 태도가 얄미워서 으름장을 놨더니, 바움쿠헨 경은 어쩐지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

“아무렴, 기사야 주군을 위해 마소처럼 일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말이나 소처럼 죽기는 싫을 거 아냐?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말해. 나라고 그대를 변호하는 상황이 즐겁진 않아.”

“왕자님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그 빚은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바움쿠헨 경이 정색하고 물었다.

“……목숨은 과장이었어. 왕비님이 나라의 영웅을 함부로 대할 리 있어?”

“아니요.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몸은 영웅씩이나 되는 몸뚱이고, 왕자님은 귀한 것을 살리고 계십니다. 저는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어서요.”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없으십니까?”

바움쿠헨 경이 씩 웃었다. 알렉스와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수업에나 잘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거야 제 직분이고요.”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구나.

“그럼 아이 한 명 더 가르쳐 보는 건 어때?”

“아이? 누구 말씀이십니까? 뭐 왕자님의 승마 수업에 함께하는 거라면…….”

“아니.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말이야.”

바움쿠헨 경은 인상을 썼으나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누구입니까?”

“소개해 줄게. 내일도 경이 수업에 나온다면.”

“아, 나온다니까요.”

저런 태도로 어떻게 기사를 해 먹었지? 이 나라는 기사에게 요구하는 게 적은 모양이다. 일단 예의범절은 항목에 없는 게 분명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왕비님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나와 바움쿠헨 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왕비님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바움쿠헨 경을 바라봤다. 경은 가슴 위에 주먹을 대고 경의를 표했다.

“신경 쓰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수업해요. 나는 산들바람이라고 생각하고.”

왕비님이 미소 지었다.

산들바람치고는 존재감이 너무 강했지만 우리는 그런 걸로 하기로 했다.

왕비님의 부드러운 손이 내 볼에서 떨어졌다.

이 손이 스위티를 죽였다.

나는 새 말에 올라탔다.

수업은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말을 타고 연무장을 산책했고 왕비님은 그 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왕비님 뒤에 있던 수행원들이 왕비님을 따라서 환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연무장을 두 바퀴 돌았을 즈음 내 얼굴은 터질 것 같았다.

“훌륭하셔요, 왕자님.”

“어쩌면 자태가 저리 빼어나실까.”

왕비님의 시녀들이 구슬 같은 목소리로 찬사를 보냈다.

듣기만 해도 귀가 홧홧해지는 아부를 왕비님은 기분 좋게 들었다. 그러고도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왕비님의 양산을 들고 있는 시종은 땀에 젖었다.

왕비님의 시녀들도 다리가 아픈 기색이었다. 그들은 구두를 신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편한 차림의 왕비님은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말을 타고 가볍게 달리는 것까지 연습했다. 말이 속도를 높이자 비이성적인 공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숨을 한 번 쉬고 어깨의 힘을 뺐다.

왕비님은 내가 몇 바퀴를 돌고 활짝 웃으며 말에서 내려올 때까지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럼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고마워, 경.”

나는 말의 고삐를 하인에게 넘기고 왕비님께 다가갔다.

왕비님은 시종에게서 손수건을 받았다. 양산 그림자 아래서 왕비님이 내게 팔을 뻗었다.

나는 눈을 감고 땀을 닦아 주는 손길을 받았다.

“왕자, 이 어미에게 할 말이 없나요?”

내가 왕비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좋은 선생님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바움쿠헨 경이 나를 쳐다봤다.

왕비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왕자, 저녁을 함께할까요?”

“예. 씻고 갈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요. 기다릴게요. 상냥하기도 해라, 내 왕자님.”

그러면서 왕비님은 계속해서 웃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오늘 고아원 얘기를 꺼낼 수도 있겠다.

“상냥한 왕자님.”

바움쿠헨 경은 왕비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귀찮게 굴었다.

“경. 안 가?”

“갑니다. 운동 신경 좋으시던데요?”

“그대까지 아부할 필요는 없어.”

“진심입니다. 사냥이 언제라고 했죠?”

“석 달 뒤.”

“좋아요. 폐하께 칭찬 한번 받아 봅시다.”

바움쿠헨 경이 의욕을 냈다. 왜 갑자기?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거 없어. 어차피 칭찬은 안 하실 테고.”

“폐하께 인정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받고 싶어.”

‘조프리’는 그랬을 거다. 왕에게 칭찬받으면 왕비님이 기뻐할 테니까. 하지만 난 안 될 일에 기운을 쏟지 않는 편이었다.

“벌써부터 포기하시면 어떡합니까? 성실하게 노력을 하셔야죠.”

“경이 그런 말 하니까 웃겨.”

할 말은 많았지만 난 그렇게만 대꾸했다. 바움쿠헨 경은 킬킬거리더니 내일 뵙겠다며 가 버렸다.

궁으로 돌아가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하인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인을 하나 붙잡고 물었더니 그 하인은 바닥에 이마를 대기부터 했다.

도트가 내 심부름 때문에 궁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총대를 멘 사람은 다른 시종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고했다.

“알렉스가 사라졌다고?”

“예. 간식 시간에 방에 없어 근방을 찾아보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봤어?”

“죄송합니다, 전하.”

설마 도망쳤나.

내 생각이 짧았다. 말 잘 듣는 애 같았으면 애초에 불려 왔을 때부터 얌전히 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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