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화 (19/293)
  • 19.

    오후의 난리는 물론 왕비님 귀에도 들어가서, 난 의사에게 온몸을 구석구석 검사받고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은 뒤에도 왕비님께 한참 붙들려 있었다.

    “왕자, 이 어미는 승마에 대해 잘 모른답니다. 왕자에게 설명을 듣고 싶어요. 어째서 영웅씩이나 되는 기사가 왕자의 곁에 있는데 말이 혼자 달려 나가서 왕자를 위험하게 만들었을까요. 대답해 줄 수 있나요?”

    왕비님은 나를 끌어안고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난 할 수 있는 만큼 바움쿠헨 경을 변호했다.

    승마는 실전이고, 바움쿠헨 경이 언제나 고삐를 잡아 줄 수는 없고, 하여간 난 안 다쳤으니까 괜찮다는 말이었다.

    “어머나, 그렇군요.”

    왕비님은 생긋 웃더니 내일 수업은 참관하겠다고 말했다.

    망했네.

    다 늦은 밤에 난 결국 도트를 불렀다.

    “도트. 미안한데 심부름 좀 다녀올래?”

    “네, 왕자님. 얼마든지요!”

    “바움쿠헨 경에게 전해 줘. 내일 수업엔 왕비님이 참관하신다고. 계속 같이 수업을 해 왔던 걸로 입 맞추자고.”

    “예에?”

    도트는 질색했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왕자님께 사고가 났는데요!”

    “그 논리대로라면 내가 괜히 승마를 배우겠다고 해서 바움쿠헨 경이 처벌받게 된 거잖아?”

    “그렇지 않아요! 전혀 달라요! 왕자님 탓은 전혀 없다고요, 전부 그 사람 잘못이에요!”

    도트가 분개했다.

    “그래. 고마워.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바움쿠헨 경에게 다녀올 거지?”

    도트 말고는 믿을 만한 심부름꾼이 없었다.

    “예. 왕자님이 명령하신다면요.”

    도트가 표정을 폈다.

    “그런데 도트. 바움쿠헨 경에게 아들이 있지 않았나? 내 또래의.”

    “예? 제가 알기로 경에겐 자녀가 없는데요.”

    “아. 그래……. 결혼은?”

    “하셨죠. 연애결혼으로 유명하셨잖아요. 그래서 부부 사이에 아이가 안 생겨도 이혼 얘기가 안 나오나 봐요.”

    양자,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통 양자는 친척 중에서 데려오지만, 그 삐딱한 남자라면 엉뚱한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트가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분, 감사 인사 한마디도 없으시던데요!”

    도트가 씩씩거렸다.

    “내일 수업엔 온대?”

    “모르겠어요. 전언을 듣고만 있더니, ‘흠’ 하고 뒤돌아 가 버리더라고요!”

    “그래. 수고했어.”

    난 할 만큼 했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에는 에드워드를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자는 데 합의했다.

    “우리 시간을 좀 갖는 게 좋겠어.”

    “응.”

    왕비님의 이목을 피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어디서 낌새를 눈치채일지 모른다.

    나와 에드워드의 대화를 듣던 그레이가 빈정거렸다.

    “비밀 연애라도 하시는 것 같네요.”

    그레이는 우리의 막 시작된 친분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이해 못 하는 쪽은 에드워드인 듯했다.

    에드워드에게 나는 악당의 아들쯤이고, 어울려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쯤 와서 난 그레이와 친해지는 건 포기하고 있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레이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그가 ‘조프리’를 싫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가 에드워드와 친해지려고 시도하고서부터 ‘조프리’를 싫어하게 된 것 같았다.

    내가 에드워드 챙겨 먹이는 게 싫으면 네가 챙겨 주든가.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네가 에드워드 어머니 소식도 전해 주고. 괜찮으면 편지도 전해 주고.

    그런데 그레이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내가 슬쩍 물었을 때도 “진심이세요?”라고 되물었을 뿐이다.

    난 진심이었지만, 그레이는 그게 진심이라면 넌 얼간이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난 농담이었다고 발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시간이 필요하신데요?”

    그레이가 우리에게 물었다.

    난 어쩐지 어제 에드워드랑 내가 말을 탔다고 말하면 혼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말하지 말까?

    그러나 에드워드는 학부모에게 일과 보고하는 어린애처럼 있었던 일을 그레이에게 모두 말하고 있었다.

    “승마?”

    그레이의 표정은 평온했다.

    “시종?”

    그가 되물었다.

    “신기한 우연이지? 하필 그런 때 딱 맞춰서 말이야.”

    난 하하 웃었다.

    그레이는 미소 비슷한 것도 짓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네요. 거의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우연이에요.”

    내 고개는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두 분 전하께서는……!”

    그레이는 고함을 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끝까지 열 받은 것 같은데.

    조마조마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레이는 감정을 완벽하게 날려 버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실 수도 있죠.”

    난 무서워졌다.

    “그레이?”

    “예, 전하.”

    “혼내려던 거 아니었어?”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모두 생각이 있어서 하신 일이겠죠. 현명하신 분들이니까요.”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평소보다 더 멍한 얼굴이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그레이의 비꼬는 능력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 무서우니까 그냥 화내면 안 돼?”

    “제 태도가 불충했다면…….”

    “그래. 그러니까 충성스럽게 아까 하려던 말 계속 해 봐.”

    그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미래를 배우기 위해서죠.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고요.”

    “그런데?”

    “말 그대로예요.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는 뜻이죠.”

    나랑 선문답을 하자는 건가 생각했는데 대답은 에드워드에게서 나왔다.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러시겠죠.”

    그레이는 역사책을 팔에 끼더니 우리에게 인사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 * *

    교실에서 나온 그레이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저런단 말인가?

    그레이가 왕자들의 놀이 친구로 입궁하기 전, 아버지는 그레이에게 충고했다.

    ‘왕족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너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

    그레이는 그래야 했다! 왜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았을까? 어른들 말씀 들어서 손해 볼 일 하나 없는데!

    “화났어?”

    “아니요!”

    반사적으로 대답한 그레이가 뒤를 돌아봤다. 에드워드가 등 뒤에 있었다.

    “왜 거기 계세요? 애절한 작별 인사는 어쩌시고요.”

    “애절할 것까지야.”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레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여기서 내색할 수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그레이는 에드워드를 빈방으로 이끌었다. 에드워드는 멍하니 따라왔다.

    “두 분이 함께 계신 걸 목격한 시종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레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 괜찮아. 조프리가 협박했어.”

    “예?”

    “조프리가 해결했어. 그 시종은 왕비에게 보고하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말 그대로야. 이 건으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야. 나도 그 시종에게 말해 뒀거든. 그 일을 보고하는 건 네 신상에 좋지 않을 거라고.”

    그레이는 인상을 썼다.

    “그런 말에 시종이 넘어갔다고요?”

    “응.”

    “저도 설득이 안 되는데요?”

    “그래?”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레이에게 바짝 붙었다.

    그레이는 숨을 참았다. 인형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아 왔지만 자주 본다고 익숙해지는 얼굴이 아니었다.

    좀 두근거리는데…….

    설마 얼굴로 설득했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레이는 혹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에드워드가 정말 인형처럼 싸늘한 표정이어서 마음을 다잡기 쉬웠다.

    에드워드가 속삭였다.

    “보여? 조프리가 다쳤어. 네가 한 거야.”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표정 변화가 없는데도 에드워드가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레이는 창백해져서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그렇게 말했어. 그 시종도 머리가 있다면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자기 때문에 왕비에게 불려 가게 된다면 뭐라고 말할지.”

    에드워드는 멍한 얼굴로 돌아가서 말했다.

    “……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시종한테.”

    그레이는 뒤늦게 반응했다.

    “응.”

    “문제없겠네요.”

    “응.”

    시종들이란 약삭빠르고 자기 보신에 능한 존재들이었다. 시종 입장에서, ‘에드워드와 조프리가 함께 있었다’까지는 보고해도 괜찮았다. 왕비는 포상할 것이다.

    그러나 조프리가 목격자인 시종을 쫓다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왕비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졌다.

    에드워드는 시종에게 네가 보고하면 나도 조용히 있지 않을 거라고 협박한 셈이다.

    보고를 안 하는 쪽이 이득이라면 시종은 입을 다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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