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8화 (18/293)
  • 18.

    알렉스?

    강렬할 만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공략 캐릭터가 떠올랐다.

    알렉스 바움쿠헨?

    그럴 리 없잖아.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성은?”

    붉은 머리 알렉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거 없는데요?”

    “부모님은?”

    “그런 게 있으면 소매치기를 왜 해요?”

    “이놈이!”

    경비대장이 호통을 쳤다.

    내가 그를 말리기도 전에 도트가 딱딱한 얼굴로 외쳤다.

    “무례하다! 왕자님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마라!”

    “그래. 내가 얘기하는 중이잖아. 자꾸 애 겁주지 마.”

    난 웃으면서 말했다. 알렉스가 경비대장 말에 겁먹는 것 같진 않았지만.

    “죄, 죄송합니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알렉스의 뒷목을 잡은 손을 놓자, 알렉스는 작은 동물처럼 머리를 털며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알렉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기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맹랑한 건 태도만이 아닌 듯했다.

    녹색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섬세하게 움직였다.

    다시 봐도 게임 속 그 얼굴이었다.

    골치 아프네.

    “혹시 검도 같은 거 좋아해?”

    “네?”

    알렉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슬슬 날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왠지 좋아하게 생겨서.”

    “우리가 검을 무슨 수로 구해요?”

    “음. 그렇지. 근데 우리?”

    알렉스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우리가 누군데?”

    “제가 사는……. 고아원 애들이요.”

    “뭐?”

    여기 고아원이 있었어?

    그런데 왜 저렇게 불쌍한 몰골이야?

    내 반응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알렉스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새파래져서 외쳤다.

    “다른 애들은 상관없어요! 저 혼자 저지른 짓이에요! 다른 애들은 착한 애들이에요!”

    “알았어.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너희 고아원 애들한테도 아니고.”

    나는 알렉스를 달랬다.

    다른 사람한테 안 지고 들어가는 성격인 것 같은데 고아원 얘기에 바로 사색이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장소는 있으니까.

    “도트, 수도 고아원이 가난한가?”

    “잘은 모르지만……. 고아원 같은 자선 사업은 왕비님이 담당하시는 일이에요.”

    도트가 내 눈치를 봤다.

    왕비님이 자선 사업에 관심 가지실 분인가?

    단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나쁜 일이지만, 난 아닐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알렉스가 소매치기를 하고 있는 것도 결국 나 때문이라고?

    정확히는 ‘조프리’의 어머니 때문이지만…….

    사실 ‘조프리’는 공략 캐릭터가 아니라 게임 내 지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숨겨진 악역 캐릭터였던 거 아닌가? 아니면 상황이 이렇게 꼬여 있을 수 없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도트가 “왕자님,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괜찮아. 알렉스. 배 안 고파?”

    “네?”

    “저녁 먹고 갈래? 그게 좋겠다.”

    난 대답도 듣지 않고 도트에게 알렉스를 맡겼다.

    “씻게 해 주고 새 옷을 줘. 저녁은 속이 찰 만한 게 좋겠어. 고기류로.”

    “예, 왕자님.”

    도트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여느 때와 같이 내 명령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응접실에는 나와 경비대장만이 남았다.

    “아까는 미안해. 나 때문에 다칠 뻔했지?”

    경비대장은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내 말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사고 나자마자 사과했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었어. 그대가 양해해 줬으면 해. 도트의 반지를 찾아다 준 것도 정말 고마워. 도트한테 인사는 받았어?”

    경비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좋지 않더라니.

    “도트가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다음에 꼭 인사하라고 할게. 이건 개인적인 보답이야.”

    난 금화가 든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당연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경비대장은 예의상 사양했다.

    “날 부끄럽게 할 셈이야? 가져가. 이제 물러가도 좋아.”

    난 소파에 앉아 관심 없다는 듯 주머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경비대장이 내게 인사를 올리고 나갔다.

    난 소파에 아예 드러누웠다. 사극이나 정치물의 등장인물 같은 짓을 했더니 내가 정말 왕자처럼 느껴졌다.

    아직까지 조프리가 아니란 걸 안 들키고 있으니 잘하고 있는 거겠지.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났다.

    나는 팔을 들어 올리고 킁킁거렸다. 내게서 지독한 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도트, 나한테 먼저 씻으라고 말해 줬어야지.

    알렉스와 경비대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있어 줬다니.

    나도 상당히 정치적인 인간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난 다른 시종을 불러 욕조를 준비시켰다.

    새 옷을 입은 알렉스는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았다.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도트도 감탄했다.

    “보석 같은 눈동자네요.”

    그러나 도련님 같은 건 외모뿐이어서 알렉스는 포크를 집는 데서부터 실수했다.

    그가 스테이크를 썰면서 접시를 긁을 때는 시종들이 괴로워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시종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는 담대하던 알렉스도 식사 자리의 기묘한 분위기에는 주눅이 들었다.

    “시중은 괜찮으니까 쉬고 있어.”

    난 도트를 제외한 시종을 모두 내보냈다.

    알렉스의 얼굴이 붉었다.

    난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여기 처음 떨어졌을 때 저렇게 허둥지둥했던 것이다.

    사실 부끄러워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적응하는 데 바빠서 어떤 감정을 느끼긴 힘들었으니까.

    “도트, 알렉스의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 줘.”

    도트는 알렉스의 접시를 가져가서 어린아이에게 그러듯 작은 크기로 스테이크를 썰어 줬다.

    알렉스의 얼굴은 이제 터질 것처럼 보였다.

    “신경 쓸 필요 없어. 편하게 먹으면 돼.”

    난 그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고아원에 대해서나 그의 거취에 대해서.

    맛있는 걸 먹이면 보통 분위기가 풀리던데.

    난 성에서 사는 에드워드가 알렉스보다 더 못 먹고 살았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에드워드에게도 효과를 본 방법인데 알렉스에게 안 듣는다고?

    “맛없어? 다른 메뉴가 더 좋아?”

    “맛있어요.”

    알렉스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알렉스가 고개를 숙여 버려서 난 도트에게 눈빛을 보냈다. 쟤 왜 저래? 아는 거 있어? 도트가 고개를 저었다.

    도트 손가락의 반지가 반짝였다.

    “아. 그거 꼈구나?”

    “네. 감사합니다, 왕자님.”

    도트가 활짝 웃었다.

    “찾아서 다행이다. 이제 손에서 떼어 놓지 마.”

    “네. 왕자님이 되찾아 주신걸요. 목숨보다 소중히 할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알렉스의 고개가 더 낮아졌다. 아예 체한 듯한 안색이었다.

    “알렉스, 속이 안 좋아?”

    “아니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어이가 없었다.

    “너 왜 울어?”

    “저 언제 사형당해요?”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왈칵 넘쳤다.

    설마 얼굴이 빨갰던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눈물을 참느라 그런 거였나?

    “네가 왜 죽어?”

    “원장, 원장님이……. 사형당하면 죽기 전에 맛있는 걸 먹게 해 준다고…….”

    알렉스가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새빨개진 얼굴을 소매로 문대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애한테 왜 해?

    “그래서 사형당하는 줄 알았어? 너 원장 말은 믿고 왕자 말을 안 믿는 거야?”

    알렉스는 울기만 하고 대답은 안 했다.

    아, 진짜?

    “너 안 죽어. 대체 그런 말이 왜 나왔어? 고아원에선 원래 형벌 제도도 가르치나?”

    “원장님이, 그렇게 맛있는 게 먹고 싶으면 경비대에 잡히든가 하라고…….”

    난 뜨악해서 포크를 내려놨다.

    “소매치기를 원장이 시킨 거야?”

    알렉스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었다. 그는 사색이 돼서 외쳤다.

    “아니요! 고아원은 아무 관계 없어요! 저만 그런 거예요!”

    “응. 알았어. 고아원에서 너만 나쁜 애고 너희 원장님은 좋은 분이구나?”

    알렉스는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네.”

    “원장님께 상을 드려야겠네. 그렇게 좋은 분이라니까. 고아원이 어디야?”

    “네?”

    “위치를 알아야 찾아가서 포상을 하지.”

    “그러지 않아도…….”

    “상 필요 없어? 너희 고아원 식구 모두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알렉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갈등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괘,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저러면 저럴수록 수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너 진짜 나쁜 애구나? 혼자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

    알렉스는 이제야말로 사형당하는 줄 알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애는 벌을 받아야지. 넌 열흘 구금이야. 열흘 동안 고아원에 못 돌아갈 줄 알아. 도트, 알렉스한테 방 하나 내줘.”

    “네, 왕자님.”

    도트가 알렉스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알렉스의 접시는 아직 반밖에 비지 않았다.

    “밥은 먹이고.”

    “네, 왕자님.”

    도트가 알렉스의 손에 포크를 쥐여 줬다.

    알렉스에게 더 들을 내용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그를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알렉스는 도트의 응원 아래 접시의 음식을 모두 비웠다. 그리고 도트의 안내에 따라 식당을 나갔다.

    알렉스가 나를 돌아봤다. 불안하고 겁에 질린 듯했다.

    아까 본 그의 몸이 떠올랐다.

    멍투성이였다.

    저 애가 정말로 알렉스 바움쿠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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