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화 (17/293)

17.

경비대장은 힘으로 버티려다가 자길 일으키는 손이 내 것이라는 걸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감히!”

내 손아귀에서 후다닥 벗어나는 태도가 뭐 벌레라도 몸에 닿은 것 같았다.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경비대장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말이 급정거 할 일도 없었고. 이것 역시 경비대장 잘못은 아니지만.

“아니. 괜찮으니까……. 경비대장은 바쁜 거 아냐? 일이 있어서 입궁한 거지? 할 일 하러 가.”

“아, 저, 전하!”

그냥 빨리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명령했는데 경비대장은 떠나지 않았다. 도끼눈을 한 도트를 곁눈질하며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찾으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아.”

잊고 있었다. 경비대장한테 맡긴 임무.

경비대장은 스위티가 만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초라한 남자가 먼지투성이까지 되니 보기 미안했다.

내 명령 때문에 반지를 찾아오느라 입궁했는데 내가 잘못 몬 말 때문에 다칠 뻔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반지의 주인인 시종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눈이나 흘기고 있다. 경비대장 입장에서는 봉변도 이런 봉변이 없다.

미안해, 는 왕자가 할 말이 아니라고 도트가 그랬으니까 여기선 못 하겠고.

“도트, 이분 좀 내 궁에 모셔 줄래? 곧 갈 테니까.”

“네? 왕자님, 치료를 하셔야죠!”

“어. 할게. 좀 있다가.”

난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반지는 내 시종에게 먼저 주면 돼. 정말 고마워.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오늘 바쁜 일 있는 거 아니지?”

“예, 예…….”

경비대장이 얼빠진 어조로 대답했다. 난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 도트에게 손짓했다. 가 있어.

도트는 오만 울상을 짓고는 경비대장을 데리고 사라졌다. 네 반지 찾아 준 사람한테 너 왜 그러냐.

주위를 둘러보니 병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안 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왕비님께 연락이 갈 것 같다. 애써 바움쿠헨 백작의 딴짓을 덮어 줬는데 쓸모없는 일이 됐다.

어쩔 수 없지. 에드워드나 숨겨야겠다.

난 스위티의 목을 쓰다듬었다. 말은 아무래도 크게 놀란 듯 진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용케 도망가지 않았다. 아마 내가 고삐를 놓아주지 않아서겠지만.

괜찮아, 괜찮아. 난 말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쓰다듬어 주고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내 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저기, 소란 피워서 미안해. 여기 일은 마무리됐어. 그만 가도 되는데.”

병사 중 하나가 고개를 깊게 숙인 채 말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그 말이 전하를 해친 것이 아닙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니? 내 말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저, 전하, 저희가 목격한 바로는…….”

“풀 뜯어 먹는 생물이 뭐하러 사람을 해치겠어?”

병사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하지만 전하, 왕족의 생명을 위험하게 한 죄는 무조건 사형입니다!”

“뭐?”

“그 말은 죄인……. 아니, 죄를 지은 짐승입니다. 전하께서 그냥 데려가시면…….”

“내가 내 말을 데려가지 못한다고?”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낮췄다. 난 그들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에드워드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조프리가 ‘약속’을 빌미로 탔다는 에드워드의 말이.

조프리는 그 말에 탔다가 낙마했다.

에드워드의 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난 에드워드에게 돌아갔다. 내 말은 내가 처벌하겠다는 논리를 내세우자 병사들은 강압적으로 굴지 못했다. 실은 내 논리보다 왕비님의 후광이 더 큰 것 같았다.

덕분에 말은 무사했지만 난 그 위에 다시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돋움으로 쓸 의자도 없어서, 말과 나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에드워드는 내가 시종을 따라잡은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치던 시종이 에드워드의 몸에 깔려 있었다.

바짝 말라서 힘도 없는 어린애 때문에 시종이 얌전히 있을 리는 없었고, 마구간지기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나는 마구간지기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어디 갔다 왔어?”

에드워드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산책.”

“그렇구나.”

평소였다면 너 제대로 보긴 봤냐고, 말이 주인을 끌고 다니는 산책이 어디 있냐고 투덜댔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에드워드의 말은 죽었을 것이다. 그가 지금 빌려 타고 있는 말은 왕궁 마구간 말이었다.

“이건 왕비님 시종이야?”

에드워드가 물었다. 아직 시종을 심문하지 않았는지, 정확한 신분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런 것 같지? 내 시종이라면 주인이 부르는데 도망갈 리 없으니까.”

“아, 아닙니다, 왕자님!”

시종이 발버둥을 쳤다. 그를 깔아뭉개고 있던 에드워드의 몸이 들썩거렸다.

“얌전히 있어.”

에드워드가 시종의 머리를 때렸다. 찰싹찰싹 귀여운 소리가 났는데 소리만 귀여웠다.

시종이 얼빠진 눈으로 에드워드를 올려다봤다.

“……그래. 얌전히 대답해. 왜 도망쳤어?”

나도 놀란 건 마찬가지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에드워드야 워낙 멍한 성격이긴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자기한테 해를 끼치려던 사람에게 이 정도 대응은 할 수 있지.

“저는, 왕자님이 부르신 줄 모르고…….”

“아. 말 타고 쫓고 있는데 널 부르는 줄 몰랐구나?”

“죄, 죄송…….”

“변명 좀 그만해 봐. 다 알고 있으니까. 얼마 받아?”

“예?”

시종은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도 잊고 날 쳐다봤다.

“내가 그것보다 더 줄 테니까 지금까지 뭐 보고했는지 좀 말해 봐.”

시종이 입을 꾹 닫았다. 이 시종은 도트가 아니었다. ‘조프리’랑 아무 유대가 없을 수 있었다.

아니면 왕비님의 무서움을 알아서 돈 따위에 넘어가지 않는지도.

“이러면 왕비님께 가서 네가 내 물건에 손댔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왕자님!”

“나도 그러기 싫어. 보고 내용을 말하면 왕비님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그래?”

난 시종을 다 이해한다는 듯 달랬다.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까지 보고한 내용을 말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본 걸 보고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역시 거짓말쟁이 도둑이 되고 싶어? 왕비님은 조금 엄격하신 편이라, 몸 성히 쫓아내진 않으실 텐데.”

시종은 결국 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기로 했다.

“잘 선택했어.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용돈 필요하면 저녁에 받으러 오고.”

“예.”

시종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에드워드, 놓아주자.”

에드워드는 시종 위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작게 뭐라고 속삭였다.

시종은 핏기가 빠진 얼굴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뭐라고 했어?”

에드워드는 멍하고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조심하라고.”

그런 말에 도망갔다고?

“이상한 시종이네.”

“그러게.”

“내가 다시 한번 말해 둘게. 너무 걱정하지 마.”

에드워드는 조금 웃었다.

“응. 걱정 안 해.”

5. 알렉스

우리는 말을 마구간에 넣어놓고 헤어졌다. 궁으로 돌아가자, 경비대장과 도트가 응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불안한 듯했다. 가만있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다리라고 하지 말 걸 그랬나. 포상하려는 생각이었지만, 바쁜 사람을 붙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비대장 옆에 낯선 얼굴이 하나 보였다. 조프리 또래로 보이는 앳된 아이였다. 양팔이 결박된 채 죄인처럼 꿇어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아이는 도전적으로 날 올려다봤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아래로 고양이 같은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구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외모였다.

응?

“왕자님, 이 아이가 반지를 훔쳐 간 소매치기입니다. 급하게 데려오느라 씻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소매치기라고?

내가 봤던 소매치기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런 머리카락이라면 안 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나 눈에 띄었을 테니까.

저절로 인상이 쓰였다. 아이가 꾀죄죄하고 멍투성이인 데다가 냄새가 나서는 아니었다.

난 이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거리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왕자님? 왕의 아들?”

아이의 눈이 커졌다.

“진짜 재수 없게 잘못 걸렸네.”

“이, 이놈이? 죄송합니다, 왕자님. 태생이 천한 꼬마라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왕자님께서 범인을 보고 싶어 하실까 봐 데려왔는데, 제가 얼른 끌고 나가겠습니다. 이놈!”

경비대장이 아이의 뒷덜미를 잡았다.

“아니, 그러지 말아 봐. 너 이름이 뭐야?”

아이가 인상을 썼다.

“알아서 뭐 하게, 요?”

“궁금해서 그래.”

“어차피 죽일 거잖아, 요.”

여긴 소매치기도 사형이야?

“알려 주면 안 죽일게.”

“알렉스요.”

아이가 냉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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