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화 (15/293)
  • 15.

    승마 강사를 만나는 자리에는 왕비님이 동석했다. 강사는 30대로 보이는 장신의 남자였다.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정복을 입고 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

    “폴먼 바움쿠헨입니다, 전하.”

    그는 내게 경례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워낙 짧은 순간의 일이라 난 착각인가 싶었다.

    “국경 도시에서 어제 귀환했습니다. 이렇게 금방 다시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착각이 아니잖아? 바움쿠헨 경은 빈정거리고 있었다. 어제 수도로 돌아온 사람한테 또 일 시키고 싶냐?

    왕비님의 미소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위험했다.

    왕비님도 참, 다른 사람 처지엔 관심이 없으시지!

    “잘 부탁해, 경. 난 몸치니까 경이 좀 고생할 거야.”

    왕비님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했다. 왕비님은 조프리가 혼자 자기소개를 하는 게 대견하고 귀엽다는 얼굴로 돌아갔다.

    하는 김에 경의 환심을 사려고 미소를 지어 봤으나 그는 코만 찡긋했다.

    “왕자, 바움쿠헨 경은 아주 훌륭한 분이랍니다. 정예 기마병을 키워 국경의 오랑캐를 모두 물리친 영웅이에요.”

    왕비님이 온화하게 말했다.

    그런 분을 승마 교습으로 불러내도 되는 건가?

    바움쿠헨 경이 “황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가슴을 쭉 폈다. 훈장이 돋보이는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경, 왕자는 겸손하고 성실한 성품이라 지도에 잘 따라올 거예요. 하지만 몸이 좀 약해서, 그 부분을 신경 써 주면 좋겠어요.”

    왕비님이 당부했다.

    “예. 걱정 마십시오.”

    “부탁해요. 왕자, 다치면 안 돼요.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약속할게요.”

    “그럼 이만 이 어미는 갈게요.”

    왕비님이 나를 껴안았다. 주변에는 시종뿐만 아니라 바움쿠헨 경도 있었지만, 왕비님께는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아, 정말? 여기서?

    왕비님은 내 뺨과 이마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슬픈 눈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조프리가 승마 교습을 받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움쿠헨 경은 마마보이를 보는 눈으로 시큰둥하게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 그러면……. 무리는 하지 마시죠. 몸이 약하시다니.”

    그가 말했다.

    “오늘은 말의 고삐를 잡고 몇 바퀴 걷는 것부터 할까요.”

    그 성의 없는 말투를 듣고서야 떠올랐다.

    영웅 바움쿠헨 백작. 이 남자의 아들은 게임 속 네 번째 공략 캐릭터였다.

    * * *

    공략 캐릭터 알렉스 바움쿠헨은 전형적인 기사라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레이와 함께 존댓말 캐릭터를 담당했는데, 둘의 존댓말은 어감 차이가 있었다.

    그레이는 존댓말의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빈정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알렉스는 상대를 존중한다는 원래 의도에 충실했다.

    그는 여주인공에겐 후배이기도 해서, 여주인공을 부를 땐 꼬박꼬박 선배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에 대한 여주인공의 반응은 ‘선배라는 호칭은 좋구나…….’여서 난 여주인공에게 연하 취향이 있는 건가 싶었다.

    싹싹하고 성실한 성격. 교우 관계는 원만. 다른 공략 캐릭터들과도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둥이 로웰 몽블랑을 제외하고.

    알렉스는 본인이 성실한 만큼 진정성 없는 사람과는 맞지 않는 듯했다.

    [다른 사람의 진심을 갖고 놀다니, 불결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로웰을 싫어하는 이유를 여주인공에게 설명했는데, 그 말을 듣고 여주인공은 ‘너는 나도 싫어하겠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움쿠헨 백작은 그 알렉스 바움쿠헨의 아버지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성실했다.

    난 말의 고삐를 쥐고 연무장을 돌라는 말이 말과 친해지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유연호가 어쩌다 잠깐 복싱 학원에 다녔을 때, 샌드백은 때려 보지도 못하고 기초 운동만 해야 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내가 연무장을 한 바퀴 돌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바움쿠헨 백작은 보이지 않았다.

    도트에게 물어보자 그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수업은 끝났으니까 가신다고…….”

    아, 정말?

    그야 얘랑 걷는 데 백작이 필요하진 않지만.

    나는 말을 쳐다봤다.

    말의 눈은 새까맸고 속눈썹이 예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꼭 에드워드 같네.

    나는 말의 목을 조심조심 쓰다듬고 다시 연무장을 돌았다. 말을 마구간에 넣고 내 궁으로 돌아가니 해가 지고 있었다.

    피곤은 한데 기분이 찜찜했다. 이거 정말 도움이 되나?

    다음 날 백작은 입궁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낸 심부름꾼이 ‘세 바퀴 추가’라는 전갈을 가져왔다.

    난 일단 따랐다. 승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말은 순해서 나를 순순히 따라왔다. 여섯 바퀴째 걷고 있으려니 땀이 등을 흠뻑 적셨다.

    난 운동인지 산책인지가 끝난 뒤 다시 말을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마구간지기가 말에게 각설탕을 줘 보라고 권해서 설탕을 주고 쓰다듬어 줬다. 말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스위티였다.

    “피곤해?”

    눈앞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있었다.

    파이 공작의 수업 도중 잠든 모양이었다. 공작은 멍한 에드워드를 방치했듯 나도 깨우지 않고 나가 버렸다.

    걸어야 할 거리는 순조롭게 늘어서 어제 난 스물한 바퀴를 걸었다. 도트가 무리라고 말리고 마구간지기도 그냥 걸은 척하면 안 되냐, 우리가 증언하겠다 했지만 난 오기가 생겼다.

    백작은 자기가 몇 바퀴를 걸으라고 지시했는지도 모르지 않을까. 심부름꾼도 ‘세 바퀴 추가’ 소리만 전하고 있었다.

    애초에 백작이 심부름꾼을 보내는 게 맞을까? 첫날 심부름꾼한테 ‘매일 이 시간에 왕궁 좀 다녀와라’ 해 놓고 자긴 까맣게 잊고 있을지 누가 알아.

    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도트와 마구간기지가 물과 소금을 챙겨 줬다. 마지막 한 바퀴를 돌자 다리가 풀렸다. 도트가 나를 업고 욕실로 배달했다.

    “왕비님께 보고드리면 안 돼요? 제발요. 한 번만요.”

    도트가 비는 걸 무시하고 난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도트는 나를 세수시키며 다시 요청했다.

    “백작이 수업 시간에 안 나온다고만 말할게요. 기절할 때까지 왕자님을 학대했다고는 절대 말 안 할게요.”

    “응. 하지 마.”

    왕비님이라면 상대가 나라의 영웅이든 뭐든 가리지 않을 것이다. 설마 뺨을 때리겠냐만, 백작이 왕비님께 모욕이나 처벌을 받는다면 난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알렉스 바움쿠헨에게 원한을 사게 된다. 알렉스는 영웅인 자기 아버지를 깊이 존경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그것도 어제까지다. 어제 난 내 한계를 알았다. 더는 걸을 수도 없고 걷고 싶지도 않다. 확실한 건, 백작은 날 가르칠 생각이 없다는 거다.

    조프리가 승마를 배우는 건 게임 속 이벤트가 아니었다. 게임 속 과거에서 조프리가 왕에게 말대꾸를 했을 리도 없고 그 결과 왕이 승마를 배우라고 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결국 내가 만든 일이었다. 내가 해결해야지.

    백작이 날 가르치지 않겠다면, 다른 사람에게 배우면 된다.

    백작은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수 있고 난 여러 사람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 수 있다.

    “조프리, 이거 보여? 몇 개야?”

    에드워드가 내 눈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두 개.”

    “맞아.”

    에드워드가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제 에드워드는 이 정도 신체 접촉은 먼저 해 왔다. 이전의 접촉이 조프리 멱살 잡기였다는 걸 생각하면 큰 변화였다.

    “피곤하면 쉬어.”

    잡은 손을 바로 빼는 건 그대로였지만.

    이 정도면 조프리를 만지기 싫은 거 아닌가. 그렇게 미움받는다고 생각하면 슬프지만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결벽증도 아니었다.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에드워드는 자기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요리사는 있나 싶은 부엌에서 공기나 마시겠지.

    “별거 아냐. 어제 승마 수업 때문에.”

    “잘돼 가?”

    “응. 이대로 가면 폐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어.”

    에드워드가 잠깐 생각했다.

    “잘됐네.”

    “반어법이거든?”

    “네 농담은 알아듣기 어려워. 낙마하는 법은 배웠어?”

    “그런 것도 있어?”

    “저번에 말해 줬잖아. 고삐 놓치지 말라고.”

    저번이라니, 조프리가 낙마한 날?

    “말에서 떨어지는데 어떻게 고삐를 안 놓쳐?”

    “……너 뭘 배우고 있는 거야?”

    나도 몰라.

    백작은 강의료를 받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 말에 올라타 본 적도 없어. 애초에 백작은 연무장에 나오지도 않고.”

    왜 그렇게 일이 됐느냐든지, 그럼 넌 왜 피곤해하느냐든지, 에드워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실 에드워드는 내게 관심이 없었다. 점심을 먹으며 나는 에드워드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지만 그는 아니었다. 내 물음에 대답만 하고 멍하니 있었다.

    ‘조프리’는 에드워드한테 그냥 밥 셔틀인 게 아닐까. 밥 준다니까 오는 거고 물어보니까 대답하는 거고. 조프리랑 친해질 생각은 없는 거지.

    유연호는 내게 드문 친구였다. 난 사실 친구 만드는 법을 모른다. 내게 먼저 다가온 사람들. 그 안에서 좁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조프리’에게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대답도 꼬박꼬박 해 줬으면서.

    우울해지려는데 에드워드가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

    “승마. 내가 도와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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