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화 (14/293)
  • 14.

    처음 왕비에게 왕자에 대한 보고를 하러 갔을 때, 도트는 왕비가 왕자를 너무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왕비님이 시종을 기다리고 계시는구나. 왕자에 대해 듣기 위해서.

    약간 감격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왕비가 왕자를 사랑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거기에 대해 도트가 느끼는 바는 조금 달라졌다.

    왕비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벼운 침의 위로 늘어뜨린 채였다. 창백한 얼굴과 핏기 없는 입술. 화장을 지운 얼굴은 전체적으로 색이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색만이 아니라 왕비에게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동정심이나 이해심 같은 것들.

    도트는 몸을 바닥에 납작 붙인 채 머리를 조아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왕비님. 왕자 전하께서 이제 막 잠드셨어요.”

    “내 왕자가 이 시간까지 무얼 했을까?”

    “왕자님은 공부를 하셨어요. 늘 그렇듯이요.”

    “그래? 왕자가 철이 든 모양이야.”

    왕비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트는 안심했다. 늘 그렇듯이라고 말했지만, 왕자가 공부를 시간 들여 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그 덕분에 왕비의 기분은 근래 보기 드물게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트는 대단한 아첨꾼은 못 되었지만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왕자의 개인 시종까지 되지 않았는가.

    왕비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존재는 조프리 왕자뿐이었다. 왕비를 대할 때 도트는 왕자의 좋은 이야기만 하면 됐다. 반대로 그 외의 모든 것은 왕비의 기분을 망쳤다.

    쪽문이 열리고 왕비의 시녀가 들어왔다. 쟁반을 내려놓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시녀가 가져온 건 차일까? 아니면…….

    “그런데 외출은 어떻게 된 거지? 왕자가 어쩌다 성 밖을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도트는 이마를 땅에 붙였다. 여기서 말을 조심해야 했다. 에드워드의 이름 한 자라도 나와선 안 됐다.

    “왕자님은 호기심을 느끼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러실 나이니까요.”

    “사견을 덧붙이지 말렴. 건방지게.”

    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도트는 말을 헛디뎠다는 걸 알았다.

    “왕자를 잘도 구워삶았더구나. 총애를 받으니 네 주제를 잊을 만도 하지.”

    왕비는 화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어떠하든 왕비의 목소리는 늘 실크처럼 부드럽게 들렸다.

    도트는 지난번 왕비궁에 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 왕자의 말을 탔다가 낙마한 날이었다.

    에드워드 왕자에게 분노를 쏟아 낸 왕비는 일순간 침착함을 찾은 듯했다. 조프리 왕자를 부상 입힌 말을 처분하고, 에드워드 왕자에게 징계를 내린 다음 왕비는 도트를 불렀다.

    왕비는 조프리 왕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듣기를 원했다. 도트는 벌벌 떨며 사죄했다. 그는 조프리 왕자가 말을 타게 된 경위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왕자가 그때 도트에게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도트는 조프리 왕자가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왕자는 꿍꿍이를 잘 숨길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트의 신분은 왕자의 시종이었다. 명령을 무시할 수 없었다.

    상황이 수상쩍게 돌아간다는 걸 알면서도 도트는 왕자가 궁에 두고 왔다는 펜을 가지러 가야 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도트는 심장이 터지도록 달렸다. 왕자가 사고 치기 전에 돌아가려고.

    그러나 도트가 돌아갔을 때 조프리 왕자는 말 위에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조프리 왕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멈춰! 멈추란 말이야!”

    조프리 왕자의 비명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도트는 조프리 왕자가 미울 지경이었다. 왕비 앞에서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같은 멍청한 보고를 올려야 할 때면 더욱 그랬다.

    저 왕자가 언제가 나를 죽일 거야.

    난 제 명에 못 죽겠지. 조프리 왕자 때문에.

    그렇게 이를 갈았던 기억이 났다. 그땐 조프리 왕자가 너무 미웠는데.

    왕자의 외출은 그때와 맞먹는 사고였다.

    낙마 사고 때는 왕비의 분노를 받을 에드워드라는 존재가 있었다. 에드워드는 왕자였고, 왕비는 에드워드를 근신에 처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처벌은 하지 못했다.

    이번 외출 사건에는 대신 분노를 받을 사람이 없었다.

    도트는 시종이었다. 낙마 사고 때 조프리 왕자를 태운 말은 죽었다. 도트는 자신이 말보다 더 귀한 취급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왕비가 파랗게 질려 왕자를 다그치는 모습을 도트도 봤다. 왕자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왕비는 도트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네게 손대지 않겠다고 왕자와 약속했으니, 어길 순 없겠구나. 하지만 주제 모르는 시종을 왕자 곁에 두는 것도 위험한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왕비는 질문하더니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래, 교육이 필요하겠지. 네 주제를 알도록 도와주마.”

    왕비가 시녀에게 손짓했다.

    “내 아들이 저걸 마음에 들어 해. 너무 험하게는 다루지 말렴.”

    “예, 왕비님.”

    왕비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시녀가 도트에게 일어서라고 지시했다.

    도트는 고분고분 따랐다. 조프리 왕자가 자신과 왕비 사이를 가로막던 모습을 떠올렸다.

    왕족이 시종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왕자는 도트를 끌어안고 내 시종의 처벌은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

    도트는 누군가에게 그런 보호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껏 도트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 자신만의 일이었다. 그가 앓아눕는다고 누군가 대신 맞아 주지도 대신 가문을 재건해 주지도 않았다.

    내 시종.

    조프리 왕자의 시종.

    낙마 사건으로 왕비님께 불려 갔을 때는 왕자가 미웠다. 그런데도 지금은 괜찮다니 이상했다.

    뭐가 달라진 걸까?

    도트는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며 조프리 왕자의 궁으로 돌아갔다. 당분간 뛰지 말아야겠다. 결심해도 자꾸 잊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왕성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니까. 습관이 그렇게 들어 버렸다.

    뭐가 달라진 걸까…….

    잠든 조프리 왕자가 보였다. 왕자의 외모가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평가하는 건 무엄한 일이지만, 누구라도 편을 들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도트는 방긋 웃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내 왕자님.

    4. 도둑 잡기

    경비대장은 초로의 남자였다. 염소수염을 길렀는데 체구도 작은 편이라 군인이라는 직업을 떠올렸을 때 상상하게 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도트는 그에게 가문의 문장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 옆에서 그렇게 생긴 반지야, 라고 맞장구쳤다.

    “예. 꼭 찾아다 눈앞에 대령하겠습니다.”

    경비대장이 경례를 하고 사라졌다. 그를 부르는 데 난 왕비님의 이름을 팔았다. 경비대장은 열심히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도트가 물었다.

    “뭐, 왕비님이 마음대로 하랬으니까.”

    난 적당히 대답했다.

    도트는 식당에서 받아 온 도시락을 들고 내 뒤를 따랐다. 조프리의 정원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티타임용 테이블과 의자가 딸려 있었다.

    의자에 에드워드가 앉아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우리가 다가가자 고개를 돌렸다.

    “조프리.”

    “오래 기다렸어?”

    에드워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도트가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프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식사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형편이 안 된다’에 가까울 거였다. 왕비님 때문에.

    정말로 왕비님이 에드워드를 굶기고 있다면, 마음에 안 드는 조프리랑 같이 먹는 정도가 대수겠는가.

    난 에드워드에게 너만 괜찮다면 매일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에드워드는 승낙했다.

    내심 한숨이 나왔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먹자.”

    구운 햄과 소시지, 버터와 치즈를 넣어 구운 감자, 부드럽고 흰 빵, 다양한 맛의 잼 그리고 샐러드가 오늘의 점심이었다.

    난 에드워드에게 선물할 쿠키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잘 먹겠습니다.”

    내가 먼저 포크를 들었다. 에드워드도 나를 따라 “잘 먹겠습니다.” 하더니 포크로 감자를 찔러 보기 시작했다. 벌어진 감자 안에서 치즈와 버터가 줄줄 새어 나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놀라면 몸은 딱 굳힌 채 눈만 깜빡이는 버릇이 있었다.

    왜 저러는 거야, 구운 감자 처음 보는 사람처럼!

    사실 에드워드는 천재 아닐까? 내 죄책감을 극대화하려고 저러는 건가?

    난 내 몫의 감자도 그의 앞에 놓아 줬다.

    식사 내내 우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표정이 많은 말을 하고 있어서 지루하진 않았다.

    그는 솔직하게 행복해하고 있었다. 식사만으로 한 사람이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시중은 필요 없다고 도트를 들여보내서, 식사를 마친 뒤 테이블을 정리하는 건 우리 몫이었다.

    우리는 파이 공작이 숙제로 내준 책을 읽고 작문을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딱히 할 얘기가 없다 보니 정말로 공부만 했다.

    햇살이 따듯했다. 페이지가 하얗게 빛나서 눈이 시렸다.

    잠시 뒤 에드워드를 보니 그는 졸고 있었다.

    눈을 찌를 것처럼 긴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흰 피부는 부드러워 보였다.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넘겨 주려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만지면 깨겠지.

    그를 보다가 나도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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