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화 (13/293)

13.

왕비님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내 뺨을 만졌다.

“어머, 조프리 왕자. 이 어미를 겁주는 건가요?”

감이 왔다.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히겠다.

난 엎드린 채 떨고 있는 도트를 껴안았다.

“데려갈 테면 데려가 보세요. 전 이러고 있을 테니까.”

저 왕비님이 ‘조프리’를 험하게 다룰 리 없다는 데 걸었다.

“어머나…….”

왕비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왕비님은 입을 가리지도 않고 시원하게 웃은 뒤 내 앞에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왕자가 너무 빨리 자라서 이 어미는 놀라곤 해요. 이제 이 어미도 왕자에겐 타인이군요. 왕자의 것이라니…….”

왕비님이 내 손을 잡았다.

“일어나요. 왕자의 시종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요. 조프리 왕자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이 나라가 그대의 것이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왕비님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서 도트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왕국은 왕의 소유다. 왕이 죽더라도, 1왕자는 에드워드였다.

난 왕비님 손에 이끌려 일어났다.

시종들이 식은 저녁을 데워 왔다. 식사는 맛있었지만 왕비님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왕자, 키도 컸군요. 금방 커서 이 어미를 뛰어넘겠네요. 그래요, 이제는 아이가 아니군요…….”

혼자 납득하지 말았으면 했다. ‘조프리’는 아이였다.

“왕자의 승마 선생을 구했답니다. 내일 소개해 줄게요.”

“네. 감사해요, 어마마마. 열심히 할게요.”

“무리하지 말아요. 폐하가 말씀하신 사냥 대회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어린 아들을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있잖아요. 왕비님 옆에.

왕비님은 농담일 거라는 듯 웃었지만 난 왕이 진심이라고 확신했다. 그 사람은 조프리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이라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도 왕이 싫었다. ‘조프리’는 왕에게 주눅 들어 살았을 거다. 왕과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린애를 그렇게 잡으면 자기 기분이 풀리나?

맞은편에 앉은 왕비님은 기분 좋아 보였다.

풀릴지도.

왕비님은 에드워드를 잡고 왕은 ‘조프리’를 잡는 구조였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집안이었다.

에드워드와 조프리가 삐뚤게 자라는 것도 당연했다.

도트는 식사 시중을 드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에 왕비님께 맞을 뻔했다.

이 상황에 소화를 시킬 정도로 내 위장이 튼튼해서 다행이었다. 난 접시를 비우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녁 수업은 엉망이었다. 귀로 들어온 말이 반대쪽 귀로 통과했다.

내가 멍하니 있으니 아카데미에서 온 젊은 강사가 “오늘 수업은 일찍 끝낼까요?” 하고 물었다. 난 이 강사를 다음에 또 초청하자고 생각했다.

긴 하루였다.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잠들었다. 깊은 잠은 아니어서, 잠결에 어렴풋이 소리를 들었다.

탁.

옆방 문이 열렸다 닫혔다. 조용히 내 곁으로 걸어오는 기척.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먼저 잠에서 깼다.

조프리의 침실 옆방은 시종인 도트의 차지였다. 도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잠시간 내 곁에 머물던 기척이 멀어졌다. 다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다른 문이었다. 복도로 통하는 문.

도트가 내가 잠든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왜?

난 이불 속에서 몸만 빼냈다. 도트가 했던 것처럼 조용히 문을 열었다.

복도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도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가 자신을 볼세라 주변을 살피며 걷고 있었다.

“도트, 어디 가?”

도트는 날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왕자님!”

“자는 사람들 다 깨우겠다.”

도트가 입을 막았다. 난 침실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도트는 어쩔 줄 모르며 따라 들어왔다.

내 상태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는 도트의 행동은 조용하고 신속했다. 자주 해 본 솜씨였다.

난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왕성에서 밤에 몰래 돌아다니는 건 수상한 사람뿐이었다.

“뭐야. 경비병한테 붙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너 하루 이틀 이런 거 아니지?”

“아니에요, 왕자님. 그런 게 아니라…….”

“혹시 애인이 기다리고 있어?”

“그럴 리가요!”

도트가 정색했다.

도트는 열여섯 살인가 그랬는데 나이에 비해 월등히 어려 보였다. 그에게 좋아하는 시녀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혼낼 생각은 없는데…….”

애인이 있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도트는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도대체 서양 세계관에서 왜 오체투지를 하는 거야?

“전 왕자님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뭐? 왜?”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조프리’가 아닌 걸 들켰나? 들킨다면 도트 아니면 왕비님에게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왕비님은 왕자님이 잘못되지 않으실까 늘 걱정하고 계세요. 나쁜 물이 들지는 않을까,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을까. 저는 왕자님께 무슨 일이 있을 때 그걸 보고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고 있었어요!”

“아, 그래?”

도트가 질끈 감은 눈을 떴다.

“화 안 내세요?”

“응? 아니, 그래서 뭔가……. 요즘에 이상한 일 있었어?”

“이상한 일이요?”

도트를 캐 보려고 했는데 그는 감을 못 잡는 듯했다. 여기서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냐고 물으면 정말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에드워드 왕자님이 이곳에 점심 식사 하러 오신 것도 제가 보고했어요.”

그래서 왕비님이 바로 안 거였구나. 난 또. 왕성 사람들 입 싸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조프리 왕자님이 에드워드 전하를 따라 말 타러 가시는 것도 제가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거기 왕비님이 오신 거야?”

“네.”

“그건 내가 아니라 에드워드가 화날 일이네. 또 없어?”

“왕자님, 화 안 나세요?”

내가 화날 일이 있나? 아니, ‘조프리’였다면 화낼 상황이었나?

“왕비님께 내 사생활을 알려 드리다니, 그럼 안 되지.”

“네…….”

도트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대신 돈 줄 테니까 하지 마.”

“네?”

“내가 감당하기 힘든 돈이야?”

조프리가 돼서 몇 안 되는 좋은 일이 부유하다는 건데.

“아니요! 왕자님, 왜 절 안 쫓아내세요? 왜 혼내지도 않으시고…….”

“넌 왜 다 말했어?”

“왕자님이 절 구해 주셨으니까요…….”

그거 아니라니까.

도트를 위험하게 한 것도 난데 왜 원인은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왕비님께 밉보일 일도 없었어.

나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도트가 이렇게 고마워하면 양심이 아팠다.

“전 오늘 왕비님께 이런 일은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왜?”

“네?”

“아니, 각오는 좋지만……. 왕비님께 꼭 그렇게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까? 왕비님이 너한테 지금까지 수고했다며 퇴직금 보내 주실 분도 아니고.”

“그……. 그건 그렇지만?”

“네가 하던 일은 계약서도 없는 알바 같은 거니까, 그냥 그만둬도 고용주가 뭐라 할 수 없는 거 아냐?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트가 비장하게 말했다.

“각오했어요. 제가 왕자님의 사람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그 정도 위험쯤은 감수할 수 있어요.”

하지 마.

“하지만 왕자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가지 않을게요.”

“응. 명령이야.”

“네, 왕자님.”

도트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난 소스라쳤다.

도트가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슬리퍼만 신은 맨발이라 그의 마른 입술과 간지러운 숨결까지 느껴졌다.

“절 구해 주신 왕자님을 위해, 언젠가 제 목숨을 바칠게요. 반드시.”

필요 없어…….

* * *

도트는 조프리 왕자의 얼굴 위로 손을 휘적거렸다. 촛불 그림자가 얼굴을 간질이는데도 왕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는 이번에야말로 잠들었다. 어린아이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트는 왕자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왕비님께 가지 말라고?

‘명령이야.’

그렇게 말하는 왕자는 귀여웠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왕자님은 왕비님이 어떤 분인지 모른다.

제 발로 왕비님께 가지 않으면 언제고 끌려갈 뿐이다. 그리고 일신상의 이유로 왕자의 시종 자리를 사임하게 되겠지.

도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왕비는 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 같은 지위의 사람이 시종 하나를 이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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