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화 (11/293)
  • 11.

    “잠깐만요, 누굴 부른다고요?”

    그레이가 물었다.

    “내 시종이 소매치기를 당했어. 들었잖아? 이해 못 한 척하지 마.”

    “전하께서 외출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으려면 저녁 전에 돌아가야 하는 거, 아시는 거죠?”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지금 경비병을 부르면 저녁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왕성에 연락이 갈 거예요.”

    “그래서?”

    그레이가 빙빙 돌려 가며 반대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래서? 도트가 잃어버린 반지는 어떻게 할 건데?

    “문제를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대안을 제시해,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반지를 버리고 가자는 쉽고 바보 같은 의견을 내려던 건 아니겠지.”

    자존심을 건드리자 그레이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물론 반지를 포기하자는 얘기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옆에서 도트가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 나는 든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책임지면 되니까. 왕비님이 계시는데 내가 크게 혼날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반지라고요? 어떤 종류의?”

    그레이가 물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도트 가문의 반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네.”

    도트가 대답했다. 그레이는 도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없어요. 금방 팔릴 리가 없으니까. 외출을 마치고 천천히 찾아도 수도 밖으로 유출되진 않을 거예요.”

    “그런 거야?”

    “예. 문장이 새겨진 물건은 평범한 소매치기가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평범한 소매치기가 아니라면?”

    “길드나 조직이 연관되어 있으면 더 찾기 쉬워요. 돈으로 살 수 있으니까. 대신 두 가지 경우 모두 왕자님께서 수고해 주셔야 해요.”

    그레이가 나를 살피듯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거지.

    “알았어. 오늘 외출한 건 나 혼자고 도트는 내 억지를 못 이겨 나왔어. 난 책임감을 느끼고 도트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려고 해. 왕비님께 그렇게 말씀드릴게.”

    “진심이세요?”

    “그 말도 자주 듣는 것 같네.”

    내가 투덜거리자 맞은편의 에드워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심이니까 그 질문 좀 그만해. 내가 진심이 아니면 또 어쩌려고? 네 앞에서 ‘아니, 사실 다 거짓말이야’ 할 리가 없잖아.”

    “그냥 믿으라고요?”

    그레이가 물었다. 어린 나이에 불신이 가득한 애였다.

    하긴 열한 살이면 세상이 동화가 아니란 걸 알 나이지.

    “믿어. 인간관계에 믿음이 있어야지.”

    하지만 여긴 게임 속이잖아. 넌 사랑을 믿어야지.

    “난 반지 먼저 찾아도 되는데.”

    에드워드가 헛소리를 했다.

    “넌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해야지.”

    “맞아요, 전하. 무슨 말씀이세요?”

    나와 그레이의 의견이 처음으로 일치했다.

    “도트. 저녁까지만 기다려 줄래? 궁에 돌아가면 바로 왕비님께 말해서 반지를 찾아다 줄게. 경비병을 부르는 것보다 더 빠를지도 몰라.”

    “예, 왕자님.”

    도트의 얼굴에 믿음이 가득했다.

    그러지 마. 부담스럽잖아.

    ……못 찾으면 어떡하지?

    “출발할까요?”

    머랭 경이 물었다.

    “응, 출발해.”

    내가 대답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 로제 부인의 거처는 수도 외곽. 마차로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궁에 와서 지금까지 한 번도 부인과 만나지 못했다.

    에드워드의 흰 손이 보였다. 두 손을 꽉 쥐고 있어서 피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어서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게 더 잘 보였다.

    “괜찮아,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아까 에드워드의 얼굴이 창백했던 건 머랭 경 때문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긴장하고 있었다.

    자기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게 긴장할 일인가?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에드워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로제 부인의 저택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난 어째서인지 부인의 저택이 아담하고 소박할 줄 알았다. 에드워드는 성에서 고립되어 있고, 왕도 신경을 안 써 주니까. 에드워드의 어머니도 성 밖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저택은 아름다웠다. 덩굴장미로 휘감긴 높은 담에 둘러싸여, 마법의 성처럼 아름답고 압도적인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는 부인이 살 만한 저택이었다.

    그렇구나.

    시종들에게 전해 들었다. 로제 부인과 왕은 열렬한 연애로 유명했다고.

    그러나 왕이 부유한 이웃 나라 공주였던 왕비님과 결혼하면서 로제 부인은 궁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얘길 듣고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저택을 보니 실감이 났다.

    왕이 사랑했던 여인.

    에드워드의 얼굴은 핏기가 다 빠져나가서 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준비됐어?”

    에드워드가 고개를 움직였다. 너무 작은 움직임이라 잘 보이지도 않았다.

    준비됐다는 거겠지. 여기까지 와 놓고 안 들어갈 리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에드워드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그레이가 뭐 하냐는 듯이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계속 서 있을 생각인가?

    난 기다리다 못해 초인종을 눌러 버렸다. 에드워드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내가 못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

    왜?

    거대한 저택은 숨소리도 빨아들이는 듯했다. 초인종 소리는 우리 귀까지 들리지도 않았다.

    눌린 건가? 의심스러워져 한 번 더 눌렀다.

    에드워드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스스로 놀란 듯 손을 놓아 버렸다.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건가?

    “누구세요?”

    그때 앞치마를 한 여성이 저택 안에서 나왔다.

    저택과 담 사이에는 거대한 마당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나까지 긴장되려고 했다. 숨은 쉬는 걸까. 에드워드는 미동도 없이 여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바깥문을 열어 줬다.

    가까이서 보니 여성의 나이가 보였다.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여성이었다. 피곤한 표정의 그녀는 우리를 보고 혀를 찼다.

    “또 마을 애들이니? 여긴 의원이 아냐. 마님을 귀찮게 하지 말래도.”

    이 사람은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아니다.

    에드워드는 나서지 않았다. 코앞에 자기 어머니의 집이 있는데 그가 얌전한 게 신경 쓰였다. 다시 보니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저택의 열린 문에 못 박혀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사? 누가 왔어요?”

    그곳에서 다른 여성이 나왔다.

    그녀의 금발이 햇살에 반짝였다. 구불구불한 금발은 어깨를 지나 허리까지 장식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얇은 드레스가 몸에 감겼다. 늘씬하고 키 큰 여성이었다. 깜짝 놀랄 만한 미인이어서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주변이 화사해지는 것 같았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에드워드의 어머니다.

    “마을 아이들인가 봐요, 마님. 제가 잘 달래서 돌려보내려 하고 있었어요. 마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마사가 말했다.

    “누가 아파서 왔니?”

    로제 부인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경계심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머랭 경은 마차와 함께 떨어뜨려 놓고 왔다. 어린애 넷이 경계 대상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난 에드워드가 가발을 벗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인에게 가서 안기거나, 울음을 터뜨리거나, 엄마, 라고 부르며 매달릴 거라고.

    그레이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게 틀림없다. 우리는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났다. 가장 앞에 선 에드워드에게 부인의 시선이 닿았다.

    “얘야, 어디가 아프니? 세상에. 얼굴이 창백하구나.”

    부인이 에드워드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에드워드의 입술은 거의 보랏빛이었다.

    가발과 안경을 썼다고 자기 아들을 못 알아볼 부모는 없다. 가족이라면 뒷모습만 봐도 그 사람인 걸 알 수 있다.

    로제 부인이 아닌가?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였다. 겁에 질린 듯, 약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얼굴이 일순간 평온해졌다.

    “죄송해요. 잘못 찾아왔어요.”

    에드워드가 불쑥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여기가 아닌가 봐요. 초인종을 잘못 눌렀어요.”

    “도련…….”

    에드워드는 그레이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갈게요.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정말로 괜찮니?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바쁘지 않으면 잠깐 쉬고 가도 되는데.”

    부인은 친절했다.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워드가 미소 지었다.

    마사는 끙 신음하며 문을 닫았다. 철문 너머로 로제 부인의 모습이 사라지려 했다.

    “집을 잘못 찾다니, 어떻게 이런 저택을 착각할 수 있담?”

    “마사, 쉬어요. 다리도 안 좋으면서.”

    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레이가 닫히는 문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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