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발을 정돈해 드릴까요?”
도트가 내게 물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빗이 들려 있었다. 저게 어디서 나왔지?
“응. 그래.”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허락했더니, 도트는 기뻐하며 내 가발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가발이란 게 원래 머리에 씌운다고 딱 붙어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이 가발은 내 머리카락처럼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도트가 빗질할 때마다 내 머리까지 감각이 전해졌다. 역시 게임이다.
에드워드는 간지러운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들썩였다. 에드워드가 잘생겨 보이는 이유가 반쯤은 그의 금발 때문이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더벅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어도 잘생겼다.
크면 여러 사람 울리겠네. 여주인공도 울리긴 했지. 다른 이유에서지만.
“간지러워?”
“응.”
“너도 좀 빗을래?”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트는 내 가발의 앞머리 부분을 가위로 손질하고 있었다.
“도트. 끝나고 에드워드도 좀 도와줘.”
“네.”
도트가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럽게 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거리를 두고 내 가발을 관찰하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품에 가위를 넣고 빗을 꺼냈다. 조끼 안으로 손이 들어가더니 가위가 사라지고 빗이 튀어나왔다. 무슨 마술인가?
에드워드는 당황한 듯했다.
“잠깐, 내가 할 테니까…….”
“어디가 불편하세요, 전하?”
도트가 싹싹하게 물었다. 그에게 붙잡혀서 에드워드는 가발이 찰랑찰랑해질 때까지 빗질을 당했다. 더벅머리인 쪽이 얼굴을 가리기엔 더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레이도 말리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괜찮지 않았다.
그레이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또다.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난 그에게 용서해 달라는 듯한 미소만 지어 주었다.
“이제 마음 풀렸어?”
“아니요.”
그레이가 말했다.
“제가 감히 전하께 무슨 마음을 품었겠어요. 풀 마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또.
불편한 분위기 속에 마차는 성을 빠져나갔다. 마차 밖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활기가 느껴졌다.
번화가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창밖을 내다봤다. 길바닥까지 물건을 내놓은 가게들과 호객 행위를 하는 남자와 달려가는 어린애들이 보였다.
마차가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머랭 경이 우리에게 말했다.
“마차를 빌려올게요.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그레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와.”
내가 인사하자, 머랭 경은 감격한 듯 “감사합니다!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는 문을 닫았다.
에드워드가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뭐가 좀 보여, 에드워드?”
외진 곳에 마차를 대서 시장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에드워드?”
“…….”
난 에드워드의 옆으로 가서 창문에 이마를 댔다. 꼬치를 굽는 가판대가 보였다. 여러 냄새에 섞여 느껴지지 않던 꼬치 냄새가 그제야 의식됐다.
“너 점심 안 먹었어?”
“…….”
“에드워드?”
에드워드의 귀가 빨갰다.
“아냐.”
“뭐가 아냐?”
“아니라니까.”
난 에드워드의 팔목을 잡았다. 뼈밖에 없어서 꾹 쥐면 부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게임 속 세상이라도, 왕자를 굶긴다는 게 말이 되나?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이 세계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대체 누가 굶기는 건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왕비님이겠지.
그 식사 시간의 불편한 분위기. 에드워드와 놀지 말라는 왕비님이나 왕비님에게 외출을 알리지 말라는 그레이.
에드워드는 정말로 조프리를 미워하지 않는 건가.
“혹시 돈 있어?”
난 그레이에게 물었다.
“돈이요?”
“응. 현금.”
“돈은 왜요?”
“꼬치 사 먹게.”
“왕자님이요?”
“나도 먹고 에드워드도 먹고, 너도 먹고 싶으면 먹고.”
“조프리 전하는 이미 점심 드셨잖아요.”
그레이가 못 알아들은 척을 했다.
“돈은 내가 궁에 돌아가서 줄게.”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저한테 현금은 없지만요.”
그럼 지금까지 실랑이는 왜 한 거야?
“저한테 돈 있어요, 왕자님. 걱정 마세요! 제가 사 올까요?”
도트가 말했다.
“응. 네 것도 같이 사 와.”
“안 그래도…….”
에드워드가 우물거렸다.
“안 그래도 된다고 하지 마. 먹고 싶잖아.”
에드워드가 조용해졌다. 그는 발끝을 모으고 무릎에 두 손을 올린 채 오도카니 앉았다.
도트가 나가자 마차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에드워드가 날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레이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 그레이와 조프리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에드워드의 심복이니 조프리를 적대하는 건 당연했지만, 사적인 충돌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왕비님의 아들이니까 싫어하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에도 그레이의 반응은 애매했다.
대놓고 물어보고 싶다. 너 조프리랑 무슨 일 있었냐고.
그레이는 조프리의 병문안을 와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 둘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유리에 이마를 대고 푹푹 한숨만 쉬고 있는데 이상한 게 보였다. 가판대에서 주문하는 도트의 뒤로 남자애가 접근했다. 그 애는 자연스럽게 도트와 부딪히더니 뭐라고 외치고 가 버렸다.
저거 뭔가…….
도트가 품에 손을 넣더니 허둥지둥 옷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매치기잖아? 내가 벌떡 일어나자 에드워드가 덩달아 일어났다.
“여기 있어. 나갔다 올게.”
“왕자님!”
그레이의 목소리가 뒤로 멀어졌다. 난 도트에게 달려갔다. 크기가 맞지 않는 안경이 코 위에서 달칵거렸다. 난 안경다리를 한 손으로 잡았다.
“도트? 지갑 잃어버렸어?”
“왕, 도련님!”
도트가 비명처럼 불렀다. 난 소매치기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이라 사람이 넘쳐났다.
“괜찮아. 일어나. 돈이야 찾으면 되지.”
“지갑이 아니라, 제…….”
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갑은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도련님, 안에 계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얼른 돌아갔을 텐데! 길거리 음식이 그렇게 기대되셨어요?”
도트가 밝게 말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울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척을 하는데 속아 넘어갈 사람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소매치기가 뭘 가져갔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트, 명령이야. 대답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데…….”
도트가 주춤했다.
“아무것도 아닌지는 들어 보면 알겠지.”
도트는 합, 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가문의 반지를 잃어버렸어요. 저는 외동아들이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물려받았거든요.”
“중요한 거잖아?!”
뜻밖이었다. 도트는 시종 캐릭터였고, 정작 게임에는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과거 설정이 붙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에요, 가지고 있어 봐야 쓸데도 없는걸요. 제가 집안을 재건할 가능성은 전혀 없고…….”
좋지 않다. 도트가 힘겹게 웃어서 괜한 죄책감이 생겨 버렸다.
내가 아니었으면 도트가 여기까지 나와서 소매치기를 당할 일도 없었고, 저렇게 울상이 될 일도 없었다.
아, 정말. 이 게임 왜 이렇게 쓸데없는 설정이 많은 거야?
“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꼬치 가게 주인이 가판대 너머에서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도련님들, 꼬치 안 가져가실 겁니까?”
도트가 값을 치렀다. 우리는 꼬치를 두 개씩 나눠 들었다. 마차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그새 그레이의 마차는 보다 작고 우중충한 마차로 바뀌어 있었다.
“도련님.”
대여 마차 앞에서 그레이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레이가 입을 열기 전에 난 그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먹어.”
“와, 그거 뭡니까? 냄새 끝내주네.”
머랭 경이 마부석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몫을 안 챙겨 왔다.
“하나, 둘, 셋, 넷. 꼬치가 네 개네요? 혹시 하나는…….”
“아, 미안해. 경을 깜빡했네. 이거 줄게.”
“예?”
머랭 경에게 내 몫의 꼬치를 넘기자 내 손은 비었다. 난 마차 문을 열고 도트에게 손짓했다.
“경비병을 부르자. 우리 힘으로 시장통에서 소매치기 하나를 찾는 건 무리야. 도트, 얼굴 봐 뒀어?”
“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 일에 경비병까지…….”
“누가 네 일이래? 내 시종이 소매치기를 당했으니까 내 일이지.”
도트는 감동한 듯했다. 눈이 커져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이렇게 이상적인 주인인 척 말해 봤자 정말 내 탓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