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화 (9/293)

9.

조프리의 키는 벌써 왕비님과 비슷해서, 거의 같은 높이에서 왕비님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진짜 조프리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네. 그럴게요.”

“믿어요, 조프리 왕자.”

왕비님은 내게 입맞춤을 받아 내고는 침실을 나갔다.

하지만 왕비님, 걔랑 안 놀면 조프리 살해당해요.

3. 외출

다음 날, 나는 점심을 먹으러 온 그레이에게 왕비님이 방문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요? 오늘 작전은 취소인가요?”

그레이가 물었다.

“아니? 어제 왕비님이 내 방 들르셨으니까 오늘은 안 오실 거라고.”

왕비님이 갑자기 방문하시면 내 부재를 들킨다는 게 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레이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왕비님께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안 했어.”

“그럼 성의 경비들이 제 마차를 가로막는 일도 안 일어나겠네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날 인질로 잡고 탈출해. 애초에 내가 왕비님께 말씀드렸으면 네가 지금 나랑 점심이나 먹고 있겠어?”

“……뭘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튼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진 못했겠지.”

즐거운? 그레이는 내 표현에 이의가 있는 듯했으나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도트가 음식 시중을 위해 들락거렸다. 우리는 그가 들어오자 입을 다물고 먹는 데 집중했다. 그가 나갔다. 그레이가 계획을 재개했다.

“갈아입을 옷은 마차에 가져다 놨어요. 시종들은 어떻게 떼어 놓을 생각이세요? 말씀드리는데, 데리고 가는 건 안 돼요.”

“알아. 방법이 있어.”

난 종이에 ‘공부 중’이라고 크게 썼다.

“이거 문 앞에 두고 나가면 돼. 아무도 안 들어와.”

“정말요?”

“응. 저녁 먹으란 말도 안 해. 다들 내 공부에 협조적이거든. 어떤 학자가 그랬는데 빈속에 공부하는 게 효율이 좋대. 그 말 왕비님도 믿는 것 같아.”

“……누가 그래요?”

“나야 모르지? 왕비님이 들으셨으니까.”

우리는 재빨리 식사를 끝냈다. 들킬 염려는 거의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도트에게도 말해 뒀다.

“손님 보내고 공부할 거니까 다들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전해 줘.”

“네, 왕자님. 공부 힘내세요!”

도트가 파이팅, 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가 쟁반을 들고 나갔다. 나는 문에 귀를 대고 도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엿들었다.

“됐다. 갔나 봐.”

“네……. 그렇군요. 꼭 그렇게 확인하셔야겠어요?”

“그럼 어떻게 확인해? 나가자.”

우리는 태연하게 마차로 향했다. 누가 우리를 본다고 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터였다. 아는 시종과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할지도 정해 놨다. 그레이를 마차까지 바래다주는 길이라고 할 거였다.

우리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레이가 타고 온 마차 문을 열자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 맞은편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남자도.

남자는 기사 같았는데,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울먹거렸다.

“내 인생은 망했어. 신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세요? 잠깐 사랑에 눈멀었을 뿐인데!”

“머랭 경. 그대 인생이 망한 건 그대가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이야. 그대를 몹시 아끼는 아버지가 그걸 수습하려고 마부로 삼아 주신 건 감사해야 마땅할 일이지.”

그레이가 말했다.

“도련님, 이건 아니에요! 정말로! 제가 저지른 짓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괜찮아. 안 들키면 되니까. 그대가 계속 그러고 있으면 들킬 확률이 높아지긴 하겠군.”

“아악, 미쳤어!”

머랭 경이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그가 도망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마부석에 올랐다.

“저래 보여도 실력은 좋아요.”

그레이가 말했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창백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

“괜찮아?”

내가 에드워드에게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마차가 흔들렸다. “왕자님, 왕자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매달린 것처럼 마차가 덜컹거렸다.

뭐야, 벌써?

나는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숙였다.

“읍읍! 읍읍!”

“조용히 해! 날뛰지 마! 도련님, 이 사람 뭡니까?”

머랭 경이 소리쳤다. 그에게 붙잡힌 게 분명한데도 상대는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몸부림만으로 성안의 경비병을 모두 불러올 듯했다. 그레이가 밖으로 나갔다.

“무슨……. 넌 조프리 전하의?”

“으읍!”

난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머랭 경에게 붙잡힌 사람은 도트였다. 대체 어떻게 따라온 거지? 얼굴이 새빨개진 도트가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읍읍읍!”

“조용히 해!”

내가 검지를 들자 도트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놔줘도 조용히 할 거지?”

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지르지 않는 거야, 알았지?”

도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시종이야. 놔줘.”

“예.”

머랭 경은 내키지 않는 듯 조심스레 도트를 풀어 줬다. 해방되자마자 도트는 울며 달려들었다.

“왕자님! 절 두고 어딜 가시는 거예요!”

난 기겁했다.

“조용히 하라니까!”

“왕…….”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진짜 두고 간다?”

엄포를 놓은 후에야 도트는 조용해졌다. 대신 그는 찰거머리처럼 내 옆에 달라붙었다.

“전 시종이에요, 절 두고 가실 순 없다고요!”

“지금부터 휴가 줄게. 오늘 하루 쉬는 걸로 하자. 아니, 한 삼 일?”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제가 삼 일이나 없어도 왕자님은 괜찮으세요?”

도트가 원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휴가를 준대도 왜…….”

“제겐 왕자……. 도련님을 보필할 사명이 있어요!”

도트가 눈치 빠르게 호칭을 바꿨다. 미치겠네.

“그냥 데리고 가죠. 시간 끌릴 것 같은데.”

그레이가 말했다.

“그래도 돼?”

“별수 없잖아요. 전하께선 문제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레이가 차갑게 날 쳐다봤다.

“괜찮은 거 맞죠? 그렇죠, 도련님?”

머랭 경이 물었다.

“전하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괜찮겠지.”

그레이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도트를 태우고 문을 닫자 마차가 출발했다. 난 차마 그레이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봤다.

“얼굴 내밀지 마세요.”

그레이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

난 등받이에 등을 붙이고 얌전히 앉았다.

에드워드는 도트에게 흥미가 생긴 듯했다. 말처럼 순한 눈을 깜빡이며 도트를 쳐다봤다.

고귀한 분의 눈길에 도트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충성심이 강한 시종이네.”

에드워드가 내게 말했다.

“응, 그렇지.”

내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 도트는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건 힘든 일이다. 그것도 우는 어린애를.

밤새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내 옆에서 도트는 함께 밤을 새웠다.

이 세계에서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도트였다. 그는 늘 곁에서 내 질문에 답해 준다. 그가 아니었으면 난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내가 어디 가는 건 비밀이야, 도트.”

“네, 왕자님.”

“밖에 나가면 그렇게 부르면 안 돼.”

“네, 그럴게요!”

“눈에 안 띄게 잘 행동해야 돼.”

“네!”

그레이가 밑에서 목재 상자를 꺼냈다.

“그건 시종의 의지대로 되는 일은 아니겠죠. 최소한 변장을 하지 않으면…….”

“변장?”

“네. 설마 두 분이 눈에 띄지 않으리라 믿으시는 건 아니겠죠.”

그레이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가발과 안경이 튀어나왔다.

“머리카락만 숨겨도 정체를 들킬 위험은 낮아질 거예요.”

“변장 세트네요, 왕자님.”

도트가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쳤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싶었지만 그레이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와 에드워드는 가발을 뒤집어쓰고 안경을 착용했다.

에드워드의 안경은 검은 뿔테 안경으로 현실에서는 이미 몇 년 전에 유행이 지난 디자인이었다. 덥수룩한 검은 가발까지 합쳐져서 그는 외출 기피증에 걸린 괴짜 어린애처럼 보였다.

“이거 흘러내려.”

에드워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

“그래?”

에드워드가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가 에드워드에게 작은 사각 거울을 건넸다. 에드워드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더니 인상을 썼다.

“멍청해 보여.”

“아냐, 똑똑해 보여.”

“거짓말하지 마.”

보통 사람이라면 뻥치지 마, 라고 말했을 타이밍에 에드워드는 진지하게 반박했다.

“너 뻥이 뭔 줄 알아?”

갑자기 궁금해서 묻자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뭔데?”

“거짓말.”

“거짓말?”

“에드워드 전하께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그레이가 말했다.

“네.”

“존댓말하지 마세요.”

“응.”

그레이가 인상을 썼다. 그는 눈을 감더니 팔짱을 끼고 좌석 깊숙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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