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7화 (7/293)
  • 7.

    “네 원래 계획은 뭐였는데?”

    난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그레이가 타고 온 마차에 숨어 몰래 성 밖으로 나가서, 거기서 말로 갈아타는 거.”

    성을 몰래 빠져나가는 게 기본 조건인 모양이다. 그레이의 마차도 계속 타면 안 되는 건가.

    “좋은 계획인데?”

    “큰일 나기 좋은 계획이겠죠.”

    그레이가 말했다.

    “그럼 네 계획은 뭔데?”

    “제 마차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가서, 마을에서 마차를 바꿔 타고, 제 호위와 함께 가는 거죠.”

    “그건 안전해?”

    “에드워드 전하 계획보다는요.”

    하기야 어떤 방법이든 애들 셋만 다니는 것보단 안전하겠지.

    “근데 그 계획 어디에 내가 필요해?”

    “뭐……. 왕자님은 존재만으로 도움이 되시니까요.”

    그레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거 기쁜 말이네.”

    내가 뭐 불상도 아니고 존재만으로 도움이 될 리가 있나. 나중에 들켰을 때 날 내세우면 왕비님께 덜 혼날 것 같아서 그런가?

    “알았어. 그럼 그레이가 수업 끝나고 점심시간 이후까지 성에 있어야겠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나랑 같이 점심 먹을래?”

    “네? 아……. 좋네요.”

    그레이의 표정은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싫으면 말고.”

    “싫지 않은데요.”

    부담 갖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에드워드랑 있어도 되는 거니까.”

    “저랑 밥 먹기 싫으세요?”

    그레이가 되레 물었다.

    “그럴 리가.”

    “날은 언제로 할까요?”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내일.”

    * * *

    그레이가 집으로 돌아가자 나와 에드워드는 어색하게 남겨졌다. 이대로 헤어져 각자 점심을 먹으면 되겠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금발이 햇빛에 빛났다. 머리꼭지에 둥글게 빛의 고리가 생겼다.

    정말 엄청난 금발이었다. 속눈썹까지 금색이라 빛 속에선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딘가 사람 같지 않았다. 머리를 누르면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할 것 같다.

    난 충동을 따르는 대신 그의 눈을 쳐다봤다.

    이 애는 자라서 여주인공과 ‘조프리’를 죽인다.

    내가 본 유일한 엔딩은 그랬다.

    조프리의 죽음은 별 비중이 없었다. 여주인공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에드워드가 일러스트의 메인을 차지했고 조프리의 시체는 그 구석에 작게 그려져 있었다.

    다 그려진 것도 아니고 신체 일부분만 나왔던 것 같다. 손이 아니면 발이었을 거다. 어쨌든 얼굴은 아니었다.

    그땐 여주인공이 살해당한 게 충격적이라 조프리의 죽음은 별 관심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관심 좀 가져 보는 건데.

    연애 공략 게임에는 수많은 엔딩이 있고, 그게 굿엔딩이나 베드엔딩으로 나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본 건 베드엔딩이겠지. 조프리의 죽음은 여러 개의 베드엔딩 중 하나의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여주인공이 에드워드의 호감도를 일정치 이상 올린 뒤 조프리의 호감도를 올리면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을까.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내 미래 중 하나가 에드워드에게 살해당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냉정할 수가 없었다.

    난 별로 고민이 없는 성격이다. 베개에 머리만 대도 곯아떨어지기 때문에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을 설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종종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유연호 같은 게임 폐인도 아닌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낭만이 부족해서?

    알고 보니 유연호가 마법사라 날 보고 쟨 이번 생엔 안 되겠다 싶었나? 죽여서 낭만 가득한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해 줬어? 하나도 안 고마운데.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답이 안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정말로 죽은 건지 궁금해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건지.

    이런 고민은 정신 건강에 안 좋았다. 그래서 난 게임 내용이나 떠올려 보자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여주인공과 에드워드는 새 학기가 시작하는 시점, 아카데미로 가는 길에 만난다. 여주인공의 마차가 문제를 일으켜서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친절을 베풀어 여주인공을 자신의 마차에 태워 준다.

    이게 두 사람의 첫 이벤트다. 여기서 에드워드는 여주인공에게 우리 어디서 본 적 없냐고 묻는다.

    [지금 작업 거시는 거예요?]

    여주인공이 그렇게 물어보도록 선택지를 고르면 에드워드의 호감도가 오른다. 대체 왜 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카데미에서 괜찮은 신랑감을 찾아보자고 결심한 여주인공은 학생회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럴듯한 직함을 가져야 여러 교내 파티에 참석하기 쉽기 때문이라는데, 실은 학생회에 공략 캐릭터 다섯 명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은 담당 교수를 찾아가 바쁘다고 고사했던 학생부 서기 일을 맡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좌충우돌 사랑의 허리케인…….

    연애 게임이니까 당연하겠지만, 학생회의 모든 캐릭터는 여주인공에게 호감이 있다. 그레이를 제외하고.

    한 공간에 있는 네 명의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하면 끔찍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할 것 같은데 게임 분위기는 가벼웠다.

    게임 플레이 중 여주인공은 몇 개의 교내 이벤트에 참석해야 했다. 플레이어는 그곳에 동행시킬 공략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었다.

    호감도가 일정 수치 이상이면, 공략 캐릭터는 여주인공의 요청을 수락한다.

    에드워드와는 처음 두 번 이벤트에 동행했다. 나머지는 조프리를 골랐다. 에드워드도 조프리도 여주인공을 거절하지 않았다.

    역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에드워드와 조프리는 볼 때마다 안 좋은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여주인공이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프리가 에드워드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지점인데. 에드워드는 왜 조프리를 죽일 정도로 싫어했을까?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겨서 그런 거면 그냥 미친놈 아닌가.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같이 죽여 버렸잖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략 캐릭터가 미친놈이어도 괜찮은 건가? 로망과 사랑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눈앞의 에드워드는 피나 폭력과는 관계없는 세상의 사람 같았다. 천사 같은 어린아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에드워드를 택할 것이다.

    에드워드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는 이제껏 본 적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감정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첫인상이 별로인 사람이라도 겪어 보니 다른 경우는 자주 있다.

    에드워드가 아직 조프리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조프리로 살아간 지난 한 달은 편했다. 보통 열한 살 어린애에게 발목 잡힐 과거는 없다.

    지금도 에드워드는 조프리와 대화를 했다. 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서로 부탁을 들어주자고 약속은 할 수 있는 관계다. 게임 본편에서처럼 최악은 아니다.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왜 같이 가 주겠다는 거야?”

    에드워드가 바닥을 보며 물었다.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투였다.

    자기는 멱살까지 잡아 놓고.

    “약속했잖아.”

    “들키면 왕비님한테 혼날 텐데.”

    “우리 들킬 거야?”

    “아니.”

    “그런데 왜 혼나겠어?”

    어깨를 으쓱이자,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게. 안 들키면 되네.”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싫어하지 않는다. 둘이 원수가 되는 건 나중의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막을 수 있다.

    “같이 점심 먹을래?”

    내가 물었다.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돼?”

    이상한 물음이었다.

    “당연하지.”

    나와 에드워드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시종들의 기색이 이상해졌다. 복도를 걸어올 때부터 받은 시선이었다. 너희가 왜 같이 있어? 하지만 신분이 지엄해서 우리에게 뭐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점심 시중을 들러 나온 도트가 우릴 보고 깜짝 놀랐다.

    “왕자님?”

    “도트, 어제 간식으로 내온 쿠키 남았지? 그것 좀 가져다주라. 에드워드, 샌드위치 좋아해?”

    “응?”

    “좋아. 그럼 햄 샌드위치랑 초콜릿 굳혀서 자른 거랑 주스, 샐러드랑 과일도 준비해 줘. 에드워드,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에드워드는 멍하니 눈만 뜨고 있었다. 놀란 건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생각나는 거 있으면 얘기해. 도트, 일단 그렇게 부탁해.”

    “네!”

    도트가 달려갔다. 달리지 말라니까.

    난 에드워드에게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편하게 앉아.”

    에드워드는 불편하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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