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6화 (6/293)
  • 6.

    에드워드 이벤트를 몇 번 보고 나자, 에드워드 호감도는 하트 두 개를 채웠다. 그때부터 그레이의 방해가 시작됐다.

    [……에드워드 전하는 바쁘십니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당신같이 주제 모르고 접근하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마세요. 당신은 자격 미달이니까요.]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 대사다.

    그레이는 에드워드 공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에드워드 하나도 무뚝뚝하고 속을 알기 힘들어 공략 포인트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옆에 강한 방해꾼까지 붙어 있었다.

    내 여주인공이 뭐 어때서. 얼굴 예쁘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은데. 그레이한테 욕을 안 하는 것만 봐도 성격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에드워드는 여주인공한테 호감도 하트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레이는 못 봐도 게임 플레이어에겐 보였다.

    에드워드는 여주인공에게 호감이 있었다. 심지어 여주인공도 몰랐지만.

    그레이는 시종일관 여주인공을 무시했다. 에드워드가 여주인공을 한 번만 감싸 줬더라면 난 에드워드를 계속 공략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러지 않았다. 여주인공은 울적해졌고, 스스로를 비하하기 시작했다.

    [그레이 말이 맞아. 난 기분 나쁜 여자야.]

    [왕자님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죽고 싶어.]

    그때 이델라를 위로해 준 사람이 조프리였다.

    아무튼 지금 모습을 보면, 그레이는 영리한 캐릭터였던 것 같다. 게임 속에서는 1인자 에드워드와 2인자 조프리에게 밀려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아니면 역시 게임에 오류가 있는 걸까. 에드워드의 지능을 그레이가 가져간 게 아닐까?

    에드워드는 나만큼이나 수업에 흥미가 없었다. 아침 식사 때 왕은 에드워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그 ‘에드워드’가 된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게임 속 에드워드는 완벽한 캐릭터였다. 좋은 설정을 한 캐릭터에게 너무 몰아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마 게임의 진엔딩 상대는 에드워드였겠지. 게임 시작 화면에서도 에드워드가 공략 캐릭터들 한가운데 서 있었으니까.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수업이 끝났다. 파이 공작은 교실에 없었고 내 앞에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조프리, 얘기 좀 해.”

    에드워드가 내 팔을 잡았다.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어렸을 때는 둘 사이가 나쁘지 않았나?

    “지금?”

    “응. 지금.”

    식당에서 에드워드가 나를 쳐다보던 게 떠올랐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난 에드워드에게 붙들려 사람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어두웠고 먼지 냄새가 났다. 에드워드는 방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에드워드의 마른 목이 보였다. 옷의 품이 큰 듯했다. 왕자인데 옷을 물려 입은 건 아닐 테고.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없는 걸까? 이상한데.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혔다.

    밖과 연결이 차단되자, 에드워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멍하니 넋을 놓은 듯한 얼굴에 총기가 돌면서 눈이 형형해졌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나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약속을 지켜. 네가 원하는 대로 했잖아.”

    “뭐?”

    “내 말을 태워 주면 내가 궁 밖으로 외출할 수 있게 해 주겠다 그랬잖아!”

    “내가?”

    “놀린 거야?”

    에드워드가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예상외로 힘이 셌다. 숨이 탁 틀어막혔다.

    “아니, 이것 좀 놓고 말해!”

    “거짓말쟁이!”

    “이거 놓으라니까?”

    “널 믿는 게 아니었어!”

    넘어질 것 같았다. 등이 벽에서 쭉 미끄러졌다.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에드워드도 내 위로 고꾸라졌다. 그 와중에도 에드워드는 멱살을 놓지 않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분 뭐 하시는 거예요? 에드워드 전하!”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떼어 냈다. 에드워드가 그레이를 노려봤다.

    “말리지 마!”

    “이러시면 안 돼요!”

    “날 속였어!”

    “조프리 전하께 상처를 입히면 다시 근신이에요! 이번에는 한 달 정도가 아닐지 모른다고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에드워드가 몸부림을 멈췄다. 그레이가 에드워드를 뒤로 밀어냈다. 난 주저앉아서 기침했다. ‘조프리’가 에드워드를 속였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조프리 전하.”

    그레이가 그만하라는 듯 말했다. 뭘 그만해?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고. 설명을 하고 사람 멱살을 잡든 해야 할 거 아니야! 약속이 뭔데?”

    “그걸 잊었다고?”

    에드워드가 날 노려봤다. 눈에서 뭔가 반짝였다. 저거 눈물이야?

    “말에서 떨어져서 기억도 날아갔다, 왜! 입 뒀다 뭐 해? 말을 해!”

    “네가 그랬잖아. 내 말을 한번 타게 해 주면,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네가 할 수 있다고.”

    에드워드가 눈을 슥슥 문질렀다. 어린애를 윽박지르는 나쁜 놈이 된 것 같았다.

    생각해 보자.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다. 신분이 낮아서 성 밖에 산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어머니를 못 만난다.

    에드워드가 이 성에서 무슨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그를 두 번밖에 못 본 나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어머니가 보고 싶겠지.

    조프리 너……. 그런 걸 조건으로 걸었냐?

    말을 무서워한다면서 왜 에드워드의 말을 타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조프리는 낙마했고 에드워드는 벌로 침실에 한 달이나 갇혔다.

    그런데도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한 번도 안 찾아간 셈이다. 게다가 오늘 몇 시간이나 사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시치미 떼고 있었다.

    그레이는 묘한 웃음을 지은 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겠다.

    “미안해. 내가……. 내가 까먹었어.”

    “……뭐?”

    에드워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죄책감이 들었다.

    “너희 어머니 만나러 나가자.”

    “뭐?”

    내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나?

    “내가 허락을 받아 주면 돼? 외출이나……. 뭐 그런…….”

    “뭐?”

    “아니, 그냥……. 내가 뭘 하면 되는지 딱 말해 주면 안 돼? 그냥 성에서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왕비님께 물어볼까?”

    왕비님은 ‘조프리’가 원하면 마차라도 대령해 줄 것 같은데.

    “될 리가 있어요?”

    그레이가 어이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네가 도와줄 수 있다고 했던 건 뭐야?”

    에드워드가 따져 물었다.

    “마차를 준비해 줄 순 있잖아.”

    ‘조프리’에게 무슨 계획이 있었는지 내가 알 게 뭐야?

    “진심이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뭐가?”

    “정말로 에드워드 전하를 도우시겠다고요?”

    “응.”

    그레이는 나를 빤히 보더니,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에드워드 전하. 동행을 요청하세요. 로제 부인을 방문하는 길에 조프리 왕자님이 함께해 달라고요.”

    “조프리. 동행해 줘.”

    “알았어. 그게 다야?”

    “……응.”

    그러더니 에드워드와 그레이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프리의 일과는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 수업을 듣는다. 이때 수업이 파이 공작의 정규 수업. 아침은 보통 먹지 않았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먹었다.

    이후 자유 시간. 자유라고 해도 내가 할 건 공부밖에 없었다. 파이 공작이 내준 숙제를 하고 ‘조프리’가 예전에 공부했다는 책을 다시 읽었다. 도중에 왕비님이 찾아오면 차를 마시기도 했다.

    저녁을 먹은 뒤엔 저녁 수업. 왕비님의 추천을 받아 온 학자들과 책이나 기사에 대해 토론했다.

    수업이 끝나면 아홉 시쯤 됐다. 이후 다시 자유 시간.

    이때 숙제가 남아 있으면 했고, 아니면 시종들과 놀았다. 조프리의 시종들은 대개 한미한 귀족 가문 아들들로, 어려서부터 시종 생활을 해 와 성안의 일에 빠삭했다. 내가 성내 소문을 듣는 시간도 보통 이때였다.

    ‘조프리’가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 이후와 저녁 수업 이후의 몇 시간밖에 없었다. 저녁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점심 이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탈출 계획은 조프리의 일정에 맞춰 짜였다. 에드워드는 파이 공작의 수업 외엔 일정이 없었고 그레이는 내게 맞추겠다고 했다.

    “아시겠지만, 왕비님 귀에 들어가선 안 돼요.”

    그레이가 당부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왕비님이 아신다면, 조프리 왕자님께서 귀띔한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네요.”

    “말 안 해. 내가 왜?”

    “그러게요. 왕자님이 왜 그러시겠어요.”

    그레이는 나보고 대답하라는 듯이 말했다.

    조프리는 입이 싼 편이었을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