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 달 만에 보는 에드워드였다. 커다란 식탁에 오도카니 앉아 있어 맘이 짠했다.
나는 에드워드의 옆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 흉터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무섭게 맞았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왕은 그 일을 알고 있을까?
왕이 모른대도, 혹은 알고 있대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늦었다고 말한 걸 못 들은 거냐?”
갑자기 왕이 물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왕비님과 에드워드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늦었다고 말한 걸 못 들었느냔 말이다.”
왕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새벽에 불러 놓고 뭐라는 거야?
왕비님이 내게 열심히 눈짓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
“식사를 시작하지.”
왕이 한숨을 쉬었다. 계란프라이 냄새를 맡아서 입에 침이 고이던 참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순간 입맛이 싹 사라졌다.
하인들이 접시를 내왔다. 왕이 식기를 들자 왕비님도 포크를 들었다. 신선한 샐러드와 빵과 잼, 계란프라이가 접시에 놓여 있었다. 나는 빵에 잼을 발랐다.
“빵을 손으로 들어.”
왕이 말했다.
“네?”
“빵을 한 손으로 들고 잼을 바르란 말이다. 접시에 두면 불안하잖느냐.”
세상에.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왕비님이 재빨리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빵을 왼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든 나이프로 잼을 떠서 빵에 묻혔다.
“잼으로 샤워를 하는군.”
왕이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왕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빵 맛이 안 느껴지지 않느냐.”
“잼 맛을 좋아하거든요.”
왕이 멈칫했다.
“뭐라고?”
“조프리 왕자. 우유를 마시겠어요?”
왕비님이 우유병을 들며 물었다. 병이 무거운지 팔이 떨렸다. 하지만 왕비님이 필사적으로 웃고 있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주세요.”
내 컵에는 이미 과일 주스가 담겨 있었지만.
하인이 새 컵을 가져왔다. 그러는 동안 식당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런 자리일 줄 알았다면 안 나왔을 텐데. 내가 아픈 척했으면 왕비님은 틀림없이 쉬라고 해 줬을 거다.
에드워드는 이 분위기에서 잘도 먹고 있었다. 속도는 빠르지 않은데 한 번에 입에 넣는 양이 많았다. 그는 쉴 새 없이 자르고 바르고 씹고 있었다. 며칠 굶은 사람 같았다.
“에드워드. 그러다 체하겠어요.”
왕비님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행동을 멈추더니, 포크를 내려놓고 팔을 식탁 밑으로 늘어뜨렸다.
뭔가 분위기가…….
왕비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식사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다만, 품위를 지키면서……. 게걸스러운 모습은 좋지 않아요, 에드워드. 그렇죠?”
왕비님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얼굴은 창백해서, 도저히 웃으며 볼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하인이 컵을 가지고 왔다. 왕비님은 우유를 직접 따라서 내 앞에 놓았다. 컵이 식탁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식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에드워드는 식사를 멈췄고 내 앞에는 컵이 두 잔 놓여 있었다. 드디어 왕이 우릴 부른 용건을 꺼냈다.
“조프리, 말을 타다 떨어졌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왕을 봤다.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대답하라는 거겠지.
“네.”
“아직도 말이 두려우냐?”
왕비님이 고개를 휙 들고 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대답이 중요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렵지는 않아요.”
“그래?”
왕은 의외인 듯했다.
“그런데 왜 사고가 났지?”
“탈 줄 모르니까요.”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왜 이 사람은 사사건건 싸우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말을 잘 탈 줄 몰라서, 배우려다가 낙마했어요. 그냥 그것뿐이에요.”
왕은 눈싸움을 하듯 나를 빤히 봤다. 내가 눈을 네 번쯤 깜빡이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은 교사에게 배워야겠구나.”
왕이 결론을 내렸다.
“폐하. 조프리 왕자는 몸이 약해요. 아시잖아요.”
왕비님이 호소했다. 왕은 꿈쩍하지 않았다.
“승마는 왕족의 기본 소양이에요. 그대는 조프리 왕자에게 너무 물러요.”
“하지만 얼마 전에 그런 사고가 있었는데…….”
“밀라네. 그대는 좋은 어머니지만, 자꾸 이러면 왕자들의 교육을 맡기는 건 재고해 봐야겠어요. 어디 부러진 데도 없고 멀쩡하잖아요. 남자애들은 다치면서 크는 거요.”
왕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조프리. 말을 타기에 네가 너무 허약한가?”
여기서 ‘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니요.”
왕비님이 인상을 썼다. 에드워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뭔지 몰라도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나는 왕에게 아닌가 봐요, 라고 다시 말하려고 했다.
“좋아. 석 달 뒤에 널 사냥터에서 보고 싶구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붙잡으려는 듯한 왕비님에게 왕이 말했다.
“그대는 식사 마저 하도록 해요. 나는 정무가 있어 일어나 봐야겠어요.”
왕이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왕비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겠어요, 조프리 왕자? 정말 용감하군요. 왕자가 이리도 굳게 마음을 먹은 걸 모르고 어미가 어리석은 소리를 했네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 어미가 왕국 제일의 기수를 찾아 줄게요.”
왕비님의 어깨 너머로 머뭇거리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어마마마, 잠시만…….”
“아아, 눈물이 나는군요. 품 안의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왕비님은 훌쩍이고 있었다. 우는 시늉이 아니라 눈가가 반짝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비님은 ‘조프리’를 사랑했다.
“조프리 왕자, 몸조심해야 해요. 그대가 아프면 이 어미는 잠도 이루지 못해요.”
엄마도 날 이렇게 걱정하고 계실 텐데.
“네. 어마마마.”
나는 왕비님을 마주 안았다. 왕비님은 나를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뒤늦게 에드워드가 떠올랐지만, 그는 이미 식당을 나간 뒤였다.
* * *
세 사람이 함께한 정규 수업은 그레이 크래커의 독무대였다. 난 교실에 그레이와 파이 공작 둘밖에 없는 줄 알았다.
두 사람은 뭔지도 모를 책 내용으로 토론을 했다. 나도 과제로 읽은 책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토론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궁금한 점 없으십니까?”
수업이 끝나고 파이 공작이 물었다. 난 멍하니 파이 공작만 보고 있었다.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니 궁금한 점도 안 생겼다. 학교 다니는 동안 자주 있었던 일이었는데 오랜만에 또 겪으니까 신선했다.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책장을 접으며 놀고 있던 에드워드가 머리를 들었다. 무슨 말 했느냐는 눈빛이었다.
꼭 고등학교 수업 시간 같았다. 선생님이 질문 있느냐고 물어보면 조용해지는 게.
이 수업이 끝나면 점심시간이라는 것까지 완벽했다. 대체 누가 저런 질문에 손을 들어서 애들 원성을 사겠어?
그레이가 손을 들었다.
“예. 그레이 군.”
“추천하신 책을 함께 읽어 보았는데 의문이 풀리지 않아 여쭙고 싶습니다. 다마스커스 해협의 전투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왕국이 승리했던 것은…….”
물어보는 학생이 있을지도. 게임 속 세상에는.
파이 공작이 내가 받았던 수업을 ‘보충 수업’이라고 했던 건 농담이 아니었다. 공작은 농담을 몰랐다.
다만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보충 수업이 필요한 사람은 두 명이라고.
이 수업에서 진도를 나가고 있는 건 그레이뿐이었다.
그레이가 이렇게 똑똑한 캐릭터였나? 그도 게임 속 공략 캐릭터 중 하나긴 했다. 안경 캐릭터였고 잔소리가 많았고, 매력은 별로 없었다. 사랑의 방해꾼 정도일까.
그레이는 재상의 아들이었다. 게임에서 에드워드의 친구로 등장하는데, 친구라기보다는 비서처럼 에드워드를 따라다녔다.
말투나 행동도 비서나 부관 같았다. 에드워드의 스케줄을 챙겼고 에드워드에게 조언을 했다.
내가 처음 에드워드를 공략하려고 할 때, 그레이는 여주인공의 방해자로 등장했다.
여주인공이 에드워드에게 말을 걸면 뒤에서 ‘…….’ 같은 대화창을 띄우거나, 여주인공을 지켜보며 안경을 치켜 올리는 일러스트를 보여 주거나, 여주인공이 ‘(주시당하고 있다. ……모르는 척하자.)’는 식은땀 나는 대화창을 띄우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레이가 여주인공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는 방해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