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4화 (4/293)
  • 4.

    [난 한 번도 에드워드를 이겨 본 적 없어. 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 네가 나를 선택했으니까.]

    ‘안아 준다’를 고른 뒤에 조프리의 호감도는 하트 4개를 채웠지만, 내 기분은 찝찝했다.

    얘가 과연 여주인공을 진짜 좋아하는 걸까. 그냥 자기 형 여자를 뺏어서 기분 좋은 거 아닌가.

    대사만 해도 그랬다. 여주인공이 제일 소중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지만 에드워드 비중이 너무 높았다. 내 여주인공이 조프리의 열등감을 채우는 도구가 된 것 같았다.

    조프리는 사교적인 캐릭터인데도, 게임상에서 에드워드와 제대로 대화하는 장면이 없었다.

    둘은 서로를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이가 나빴다. 무뚝뚝한 에드워드조차 조프리를 대할 때면 인상을 썼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프리 왕자는 올해 열한 살이었다. 사람들은 조프리가 총명하다고 했다. 마치 후계자로 정해져 있다는 듯이 대했고 그건 왕자들의 스승이라는 파이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프리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따르고 있었다.

    사흘 만에 열이 어느 정도 내리자, 파이 공작은 나를 찾아왔다. 미열 때문에 멍한 머리로 나는 수업을 들어야 했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복습이 많이 필요하실 것 같군요.”

    파이 공작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열에 들뜬 나만큼이나 안 좋았다.

    처음에 그는 내가 아파서 멍청하게 군다고 믿었다. 수업에서 그가 한 말을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음 날 수업 시간, 파이 공작은 아주 곤란하다는 얼굴로 책을 덮었다.

    “전하, 열이 심하시면 수업을 잠시 쉬시는 게…….”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공작과 나는 서로를 곤란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침묵했다.

    나야 파이 공작에게 멍청이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조프리’의 어머니였다.

    “조프리 왕자. 무슨 일인가요? 낙마의 후유증이 남은 건가요? 이 어미는 너무나 걱정된답니다.”

    왕비님은 매일 저녁 나를 찾아와 함께 식사했다. 사랑이 지극하시다고, 조프리의 시종 도트가 말했다. 아픈 자식이라고 해도 왕족이 이렇게 아이를 직접 챙기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하지만 애를 챙기며 한다는 소리가 공부밖에 없어서야 애정으로 느껴질 리 없었다. 내가 진짜 조프리였으면 삐뚤어졌다.

    수업 재개 일주일째, 파이 공작은 기어코 내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본 걸까? 이 성엔 비밀이랄 게 없어서, 그 장면은 온 성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복도에서 시종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왕자님이 백치가 되셨다며?”

    “공작님이 한탄하셨다더군. 전하께서 수업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저번엔 전하께서 식당이 어디냐고 물으시질 않겠나?”

    “아니, 어린 나이에 치매신가? 쯧쯧. 나라가 어찌될는지.”

    그런 소린 좀 안 들리는 데서 하지. 복도는 너무 개방된 공간이었다. 소문을 들은 왕비님은 불같이 노했다.

    “조프리 왕자. 걱정 말아요. 전국의 의사를 불러들여서라도 그대를 꼭 원래대로 고쳐 주겠어요. 감히 그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잡것들을 처벌하고, 폐하의 귀에 독을 흘려 넣는 벌레들을 찢어 놓은 다음……. 그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왕비님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무서웠다. 내가 가만있으면 피의 숙청이 펼쳐질 기세였다.

    “그러지 마세요, 어마마마. 제가 공부 열심히 할게요.”

    “아아, 조프리, 착하기도 하지.”

    왕비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내 몸을 으스러뜨리려는 듯했다.

    왕비님이 떠나고 나는 도트에게 내가 지금껏 공부해 온 책을 모두 책상에 올려 달라고 부탁했다. 도트는 기뻐하면서 그렇게 했다. 열몇 권도 넘는 책이 척척 쌓였다.

    괜한 소릴 한 것 같았다. 어린 조프리는 천재였던 걸까? 게임 설정은 어디 팔아먹은 걸까? 천재는 에드워드였잖아.

    그날부터 나는 일어나서 공부하고 밥 먹고 공부하고 자기 전에 또 공부했다. 수면 시간은 평균 여섯 시간으로, 역시 아동 학대의 범주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척하던 파이 공작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나를 찾아와 강독했다. 나는 수업의 반절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고, 파이 공작은 수업을 멈추고 앞 내용으로 돌아가 설명하는 일이 줄었다.

    이런 일과가 매일 반복됐다.

    “대체 방학은 언제야?”

    황당해져서 묻자, 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학이요? 왕자님은 아카데미생이 아니시잖아요?”

    이 말도 안 되는 공부 삼매경을 열한 살 조프리는 365일 행하고 있었다는 거다.

    대체 에드워드는 어떻게 된 걸까.

    에드워드 왕자는 사람들에게 백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나는 시종에게서 들었다. 책을 읽는 것과 별개로, 이 세계의 진짜 쓸모 있는 지식은 시종들의 입에서 나왔다.

    에드워드가 정말로 백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종들이 그를 모실 만한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건 분명했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않고, 볕 아래서 노는 것만 좋아하는 왕자.

    ‘조프리’는 그 백치 왕자에게 알 수 없는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말 따위 위험하기만 하다고, 왕자님은 마차를 타시면 된다고 투덜거리는 도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를 힐끔거리면서 아닌 척 위로해도 티 났다. ‘조프리’는 말을 못 탄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던 걸까.

    대체 설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오류 난 공략집을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내가 속한 세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2. 에드워드

    수업이 막 끝났을 때였다. 책상에 엎어진 내게 파이 공작이 말했다.

    “내일이면 에드워드 전하의 근신이 풀리는군요. 수업을 정상적으로 재개할 수 있겠습니다.”

    본래 파이 공작의 수업은 왕자들을 위한 것으로, 조프리와 에드워드가 함께 들었다.

    그레이는 왕자 친구 자격으로 동참했던 모양이다. 도트가 그레이를 ‘함께 수학하는 친구’라고 말했던 건 그 뜻이었다.

    문제는 에드워드의 한 달짜리 근신이었다. 왕비님은 에드워드의 궁에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막았는데, 그 ‘아무도’에 파이 공작도 포함됐던 것이다.

    세 사람이 듣는 수업에 한 명이 빠지면 두 명이 남아야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레이도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혼자 파이 공작의 수업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 진도 너무 열심히 나간 거 아니에요? 다른 애들이 따라올 수 있을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난 웃으면서 물었다. 파이 공작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이 들으신 건 보충 수업이니까요.”

    나는 스승님도 참, 농담이 지나치시네, 라는 얼굴로 파이 공작을 쳐다보다가 슬퍼졌다. 공작은 농담 같은 건 모르는 인물이었다.

    “농담할 기운이 있으시다니 기쁘군요. 최근 왕자님이 완전히 지치신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음 수업에 필요한 책 정도는 읽으실 수 있겠군요.”

    그리고 공작은 주말 동안 읽을 책 세 권을 던져 주고 갔다. 한 권 한 권이 사전처럼 두꺼웠다.

    공작의 믿음은 기뻤지만, 난 내게 이틀 만에 저 책들을 읽을 능력이 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었다. 나보고 주말 내내 자지 말라는 걸까?

    * * *

    이틀 뒤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식당에 들어섰다. 조프리의 아버지, 그러니까 왕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겠다고 새벽부터 사람을 시켜 불렀기 때문이다.

    왕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은 ‘조프리’가 아플 때는 물론, 다 나은 뒤에도 보러 온 적이 없었다. 왕비님이 지극정성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막연히 왕에 대해 삭막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본 왕은 아주 젊고 잘생긴 남자였다. 왕비님도 20대 같은 외관이었지만, 나는 그걸 연예인이 늙지 않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짐작했었다. 돈을 들이면 피부는 좋아진다.

    하지만 왕은 정말 20대 중반은 됐나 싶은 얼굴이었고, 왕비님과 달리 화장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조프리는 열한 살이었다. 왕이 옛날 조선 시대처럼 열네 살쯤에 결혼해서 애를 가졌다고 치면 스물다섯쯤 먹었을 것이다.

    “늦었군.”

    왕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프리’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왕비님이 내게 재빨리 눈짓했다. 하지만 내게 그런 복잡한 신호를 알아들을 눈치는 없었다.

    ‘뭐라고요?’라는 표정을 짓자, 왕비님은 왕을 힐끗 보더니 눈을 식탁으로 내렸다.

    식탁 상석에는 왕이 앉았고, 양쪽에 왕비님과 에드워드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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