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왕자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세요?”
“나 성이 뭐지? 아니, 이 나라 재상 성씨가 뭐야?”
“조프리 비스코티 왕자님이시죠……. 재상은 크래커 공작이잖아요?”
“몽블랑 상단은?”
“왕국 3대 상단 몽블랑이요? 그곳이 왜요?”
“와…….”
꿈의 맥락이 잡혔다. 에드워드 왕자니 조프리 왕자니 이미 힌트가 있었던 거다.
난 게임 속 공략 캐릭터 2왕자가 된 꿈을 꾸고 있었다. 내 여주인공과 이어 주려고 했던.
이 게임 등장인물의 성씨는 모두 디저트류로, 몽블랑이나 바움쿠헨이라는 성을 가진 캐릭터도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디저트 이름이라고 알려 준 사람은 유연호였다.
자각몽이 이런 거구나. 처음 꿔 봤다. 실제처럼 생생한 꿈. 와, 정말, 조금 무서워지려고 했잖아. 이렇게 생생한 게 꿈이라니.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한댔지? 어디서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났다.
어차피 꿈이니까. 꿈은 깨기 마련이니까.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병원에 있겠지.
엄마가 너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죄송하다고 말해야지. 다신 휴대폰 보면서 안 다니겠다고. 걱정되면 휴대폰 정지시켜도 된다고 말해야지.
하지만 다음 날에도 나는 게임 속 세상에서 눈을 떴다.
* * *
그레이 크래커는 재상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일 년 전부터 두 왕자의 놀이 친구가 되었는데 이는 왕비의 요청 때문이었다.
‘내 왕자에게 친구가 필요해요. 재상의 아들이 같은 나이라고 들었어요.’
왕비가 요청한 건 ‘조프리 왕자의 친구가 되어 달라’였으나 일이 그렇게 될 리 없었다. 형식적으로라도 두 왕자는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레이가 누군가의 친구가 된다면 다른 왕자와도 친하게 지내야 했다.
그레이는 수업 첫날 자신이 조프리 왕자와 안 맞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열한 살의 나이에 그레이는 여러 번 질투의 대상이 되어 봤다. 상대방은 대부분 그레이의 친척이었다.
그레이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짖어 봤자 그레이에겐 타격이 없었다.
왕궁에 와서는 자신이 상위 계층의 인물을 상대로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는 상층의 신분을 가진 상대가 그레이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였다.
조프리는 최악의 상대였다. 그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비겁하다는 데서 그레이의 사촌들과 비슷했지만, 그 지위와 권력으로 그레이를 괴롭힐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다행이라면 조프리는 그레이보다 에드워드를 더 질투한다는 거였다. 그레이는 직접적인 괴롭힘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조프리가 에드워드를 괴롭히는 걸 옆에서 목격하게 될 뿐.
그레이는 식사 중에 조프리의 낙마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가져온 시종은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억지로 말에 태웠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전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레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누굴 말에 억지로 태워? 실상은 정반대일 거라고 그레이는 내기도 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말을 조프리가 빼앗아 탔겠지.
그러나 그레이는 명색이 왕자의 놀이 친구였다. 병문안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과 시종들을 지나쳐 그레이는 조프리의 침실로 들어섰다. 조프리의 궁은 잘 가꿔져 있었고 수많은 궁인들이 그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조프리의 시종이 그레이의 방문을 알렸다.
“들어와.”
시종이 문을 열어 줬다. 그레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조프리는 심지어 손님을 일어나서 맞지도 않았다. 그레이는 이 왕자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럴 때마다 짜증스럽긴 했다.
공부에서 그레이를 이길 가망이 보이지 않자, 조프리는 그레이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난 왕자고, 넌 신하야.’ 조프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레이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조프리 같은 왕자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니 최악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타고난 신분이 지엄한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조프리가 노골적으로 그레이를 무시하려 들 때마다 왕자가 하찮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프리 왕자는 기본예절은 지켰다. 재상의 아들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아마 예의를 지키라는 왕비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조프리 왕자 자신은 늘 무례하게 굴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걸 보니 심사가 별로인 모양이었다. 뭐 때문에 기분이 별로인지 그레이는 궁금하지 않았다.
인사나 하고 나가 버려야지.
“말에서 떨어지셨다면서요. 크게 다치시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레이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 말투가 좀 이상했다고 느꼈다.
조프리 왕자는 빈정거리지 말라고 화내려나? 별로 빈정거리는 것도 아닌데, 조프리는 늘 짜증을 냈다.
그런데 조프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남의 소식을 전해 들은 듯 말했다.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그렇게 들었는데요. 아닌가요?”
“맞아. 음……. 그랬지. 와 줘서 고마워.”
그레이는 귀를 의심했다. 저 왕자가 나한테 감사 인사를 했다. 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머리라도 다쳤나?
조프리는 심지어 에드워드를 걱정하는 듯한 말까지 했다. 그레이는 기가 막혔다. 가해자가 피해자 걱정하는 소리 하고 앉아 있다.
조프리가 불쌍한 어린애인 척하는 건 왕비 앞에서면 충분했다. 왕비야 조프리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을 사람이니까.
그레이는 조프리가 에드워드를 어떤 식으로 곤경에 몰아넣는지 보아 왔다. 이번 일도 뻔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왕자를 걱정하는 척해?
“폐하께서는 무예 수련을 몹시 높게 평가하시니까요. 예로부터 승마와 사냥, 궁도는 귀족의 덕목이었죠. 에드워드 전하는 폐하를 빼닮아 워낙 체격이 좋으시고 검에도 흥미를 보이시니, 폐하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시겠죠.”
그레이는 조프리의 속을 뒤집어 놓을 요량이었다. 조프리는 전부터 에드워드를 신경 썼다.
슬슬 조프리가 다 뒤집어엎으려고 들 때가 됐는데. 이제 소리를 지르려나?
조프리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왕도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리진 않았어. 전쟁광이 되는 건 왕의 덕목이 아닐걸.”
조프리는 침착하게 대답하고는 이불을 끌어 올려 턱까지 덮었다.
말은 또박또박 하더니 입매가 시무룩했다. 그는 순식간에 아픈 어린애처럼 보였다.
풍선처럼 팽팽하던 전의에 바람이 빠졌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그냥 아파서였나?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 모양이다.
조프리 왕자에게 인사하고 그레이는 궁을 빠져나갔다. 마차에 오른 뒤에야 조프리가 아픈 건 자업자득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상한 소리를 하든 말든 조프리는 조프리였다.
에드워드 왕자는 한 달간 갇혀 있겠지. 나쁜 버릇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체벌당하고 궁에 방치될 것이다.
그 모든 건 조프리 때문이었다.
* * *
조프리 비스코티 왕자.
<러브 트랩 메리지>의 두 번째 공략 캐릭터인 조프리는 2인자 캐릭터였다. 에드워드에게 학문이면 학문, 검이면 검 전부 밀려서,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은 만년 2등. 검술 수업에서는 에드워드와 부딪칠 때마다 패배한다.
여주인공은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며 노력하는 모습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이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본인의 열등감과 관계없이 조프리는 다정한 사람이다. 신분을 신경 쓰지 않고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며 그 친분 관계는 아카데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주인공은 그 모습을 보고 조프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는 그 칭찬을 편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봐 줘서 고맙지만.]
그도 그럴 게 조프리가 여주인공에게 접근한 이유는 그녀가 에드워드가 관심을 보인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고백하면서, 조프리는 그녀에게 ‘내 뺨을 때리고 다신 날 안 봐도 좋아.’라고 말한다.
난 ‘안아 준다’를 골랐다. 굿엔딩을 보고 싶었으니까.
아무튼 에드워드에 대한 조프리의 열등감은 뿌리가 깊다.
왕국에는 두 명의 왕자가 있다. 1왕자 에드워드와 2왕자 조프리. 에드워드는 조프리보다 4개월 먼저 태어나 장자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두 왕자는 어머니가 다르다.
1왕자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다. 이 나라의 왕비는 2왕자인 조프리의 어머니다. 그런데 후계자로서 뛰어난 왕자는 단연 에드워드여서 조프리는 사사건건 그와 비교당하며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