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화 (2/293)
  • 2.

    게임 <러브 트랩 메리지>의 주인공 이델라는 현실적인 성격의 귀족 소녀다. 태어나 보니 가문은 이미 영락해, 귀족이라고는 해도 하인 하나 없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자란다.

    그녀의 꿈은 하루빨리 아카데미를 졸업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만한 직업을 갖는 것.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아버지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진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즉시 가문을 위해 결혼하거라.’

    상대는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상인으로, 이델라보다 열 살은 더 먹은 자식들이 딸려 있다. 그것만은 싫었던 이델라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아카데미에서 신랑감을 찾아 먼저 결혼해 버리기로.

    아카데미에서 이델라가 만날 수 있는 남자는 총 다섯으로 그중 둘이 왕자다.

    1왕자 에드워드와 2왕자 조프리.

    에드워드는 금발 벽안, 그야말로 왕자다운 외양의 소유자다. 성적이 우수하고 검술에도 능해 완벽하고 빈틈없다는 인상을 준다.

    조프리는 그와 반대로 모든 게 평범하지만, 성격이 좋아서 많은 사람과 잘 어울린다.

    이델라로 플레이할 때 나는 에드워드를 노렸다. 에드워드 스펙이 가장 짱짱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이 될 왕자 아닌가?

    그런데 에드워드와 친밀도를 올렸더니 조프리가 접근해 왔다.

    무뚝뚝한 에드워드와 달리 조프리는 다정했다. 뛰어난 형제에게 비교당하며 자라 온 왕자는 이델라의 열등감이나 약한 부분을 위로할 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출세가 아니라 자길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여주인공이 안쓰러웠기 때문에, 조프리 이벤트를 몇 번 본 뒤 공략 상대를 그로 바꿨다.

    그리고 내 여주인공은 에드워드에게 살해당했다.

    엔딩에서, 에드워드는 죽어 가는 이델라를 끌어안고 말한다.

    [왜 나를 떠났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괜찮아, 이델라. 이젠 떠나지 못할 테니까. 날 외롭게 하지 마. 혼자 두지 마. 그래 줄 수 있겠지? 약속할 필요는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같이 있자.]

    * * *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나는 다음 날 얻었다.

    밤사이 몇 번을 기절하듯 잠들었다 깼는데도 나는 이곳에 있었다. 다시 눈뜨면 현실이길 바랐는데. 잠결에 기계음을 들은 것도 같았다. 나는 병원에 잠들어 있고, 거기서 깨어나지 못한 채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곤란했다. 알바는 어떡하지? 엄마한테 사장님께 연락할 정신이 있을까? 없겠지. 민폐 끼치고 싶진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인상을 썼는지 시종이 물었다.

    “어디가 아프세요?”

    “아니.”

    “물수건이 너무 차가우세요?”

    “아니. 괜찮아.”

    “그러면, 차를 좀 가져다 드릴까요?”

    시종은 내게 무척 도움이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응. 부탁할게.”

    “네!”

    시종은 서둘러 옆방으로 넘어가다가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조심해.”

    “앗, 죄송합니다!”

    시종이 발딱 일어났다.

    “아니,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만.”

    그러고 보니 저 시종은 이 방에서 나와 같이 밤을 새웠던 것 같다. 내가 깰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괜찮으시냐고 물어봤다.

    내 무의식이란.

    아플 때 누가 옆에 있어 줬으면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돈벼락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 진짜 소원은 복권 당첨이 아니라 귀족이 되는 거였나 보다.

    옆에서 누가 시중들어 주길 바랐나? 게다가 몸까지 어려져서, 나는 아픈 어린애 역할에 충실하게 울 수도 있었다. 몸이 아프니까 누워만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흘러서 머리카락을 적셨다.

    시종은 나를 왕자라고 불렀고 나를 붙잡고 울던 여성은 왕비님이라고 불렀다. 내 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외국인같이 생겼는데도 한국어를 썼다. 사자성어도 알아들었다. 정말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꿈이었다.

    “왕자님. 밖에 크래커 소공작이 병문안을 왔는데요. 들여보낼까요?”

    시종이 물었다.

    “그게 누군데?”

    “네?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이요. 함께 수학하시는…….”

    쓸데없는 설정이 많은 꿈이다.

    “들어오라고 해.”

    시종이 문을 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만들어 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생긴 남자애가 들어왔다. 나이는 열 살쯤 돼 보였다.

    “말에서 떨어지셨다면서요. 크게 다치시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레이 크래커가 말했다. 웃긴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그렇게 들었는데요. 아닌가요?”

    교통사고가 낙마 사고로 치환된 건가. 말 된다.

    “맞아. 음……. 그렇지. 와 줘서 고마워.”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한가해서 온 거냐?

    “에드워드 전하는 근신이라 만날 수 없고, 수업도 취소됐거든요.”

    그레이가 더 많은 설정을 풀기 시작했다.

    “아……. 그래. 왜 근신이래?”

    “조프리 전하를 괜히 말에 태웠다가 낙마시켰으니까요.”

    “아아. 그렇구나.”

    알아들은 척을 하자 그레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에드워드 전하가 조프리 전하를 낙마시켰단 말이잖아. 낙마가 흔히 일어나는 사고인가.

    그럴 리가 없지. 나를 조프리라고 부르던 왕비님이 떠올랐다. 낙마시켰다는 조프리 전하가 나야?

    그렇다면 벌을 받는 에드워드 전하는 전날 본 그 애일 거였다. 누구도 신경 써 주지 않던 어린애. 이 가족, 막장 드라마 서사 하나 나올 것 같다.

    “근신이라면, 아무도 못 만나게 한다는 소리야?”

    “네. 일단 침실 밖으로 못 나가시니까요.”

    “밥은?”

    “시종이 가져가겠죠.”

    시종은 만날 수 있나 보다. 그럼 ‘아무도’가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내 방을 지키던 어린 시종이 따듯한 차를 두 잔 가져왔다. 그레이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받았다.

    “말은 왜 타셨어요?”

    그레이가 물었다.

    “몰라.”

    “그러세요?”

    그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동 안 좋아하시잖아요. 말도 무서워하시고.”

    “그래?”

    “에드워드 전하가 승마 배우실 때 같이 안 배우셨잖아요?”

    “정말? 어제는 왜 탔던 거지?”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꼭 남 일처럼 말씀하시네요.”

    나야 정말 남 일이지만, 꿈속에서 ‘이거 꿈이잖아’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있었으니까.

    “그러게.”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오늘 좀 이상하시네요…….”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에드워드 전하께선 정말 말을 잘 타시니까요. 곁에서 구경하다 흥미를 느끼셨을 수도 있죠.”

    “그러게.”

    그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승마 배우고 싶어지셨어요?”

    “글쎄.”

    “에드워드 전하는 균형 감각이 좋아 말을 다루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시죠. 파이 공도 몹시 칭찬했고요. 폐하께도 얘기가 들어갈지 모르겠네요.”

    그레이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레이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의욕에 찬 얼굴로 그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무예 수련을 몹시 높게 평가하시니까요. 예로부터 승마와 사냥, 궁도는 귀족의 덕목이었죠. 에드워드 전하는 폐하를 빼닮아 워낙 체격이 좋으시고 검에도 흥미를 보이시니, 폐하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시겠죠.”

    그레이는 나를 도발하고 싶은 것 같았다. 발끈해라, 화내, 라는 속마음이 말투에서 읽혔다. 그런데 내가 왜 발끈해야 하는지 맥락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왕도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리진 않았어. 전쟁광이 되는 건 왕의 덕목이 아닐걸.”

    분위기에 맞춰 멋있는 말을 해 봤다.

    말 등에 올라 천하를 얻었다고 말 등에서 천하를 다스릴 순 없다. 삼국지 소설에서 나온 구절이다. 멋있어서 외워 뒀는데,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레이는 김이 샌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이상한 얼굴로 “오늘 정말 이상하시네요, 왕자님.”이라고 말했다.

    그레이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끔찍하게 피곤했고 여전히 몸이 아팠다. 차가 날 으스러뜨리고 지나간 게 틀림없었다. 너무 아파서 꿈속에서도 고통을 잊을 수 없을 지경인 거다. 병원비는 얼마나 나오고 있을까.

    그런데 사람의 두뇌란 이상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가서, 하루 종일 고민하던 문제가 잠들기 직전 풀릴 때가 있었다.

    그레이 크래커라니 정말 이상한 이름이잖아. 다음엔 블랙 쿠키라는 사람이 나타나도 안 놀라겠네. 무슨 게임 캐릭터 이름도 아니고……. 그레이 크래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졸던 시종이 깜짝 놀라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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