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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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 어떤 게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알바를 하나 더 늘렸다. 덕분에 학교는 잠자는 공간이 됐다.

    맨 뒷자리에 앉아 종례 시간까지 잤다. 졸다 깨다 할 때마다 앞자리 녀석의 엎드린 등이 보였다. 앞자리도 하루 종일 졸고 있었다. 마음이 편해져 엎드려 잤더니, 선생님한테 나만 걸려서 혼났다.

    일주일쯤 지나니 나랑 앞자리는 반 애들한테 매일 자는 놈들로 인식되어 있었다. 앞자리 이름은 유연호였다. 유연호는 자고 있지 않을 땐 게임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게임에 한 달에 몇십만 원씩 쓰고 있을 거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돈도 많네, 라고 대꾸했더니 딱히 용돈 쓸 데가 없다고 했다.

    유연호는 말이 많았다. 점심시간 내내 자기가 어떤 게임을 깼는지 그 게임이 얼마나 별로였는지 얘기했다. 유연호 말에 따르면 세상엔 쓰레기 같은 게임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밤을 새워서 새 게임을 해 대는 유연호가 신기했다.

    간혹 유연호가 추천하는 게임도 있었지만, 귀로 들어서야 뭐가 재미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더니 어느 날은 유연호가 불쑥 물었다.

    “게임 해 보고 싶지 않냐?”

    “돈 없어.”

    “얼마 안 해. 유료 게임이라도 비싸야 몇만 원?”

    “나 거지라니까.”

    유연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야아, 팍팍하다. 네 삶엔 낭만이 필요해. 로맨스, 사랑! 게임을 해라, 친구야. 모든 게 게임 속엔 있단다.”

    “응, 돈 없어.”

    “낭만 없는 자식.”

    유연호가 투덜거렸다. 이거 진짜 재미있단 말이야. 한 번만 해 봐, 어? 그가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일러가 좀 거지 같은데 재미있다고, 게임의 진정한 재미는 겉모습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응. 그래? 나는 대답했고 게임은 안 했다.

    학교 끝나고 편의점 알바를 하는 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유연호가 무슨 게임을 선물했다고 떴다. 연애 공략 게임으로, 심지어 주인공은 여자였다. 소개 화면을 보니 낭만이 가득해 보이긴 했다.

    하여간 귀여운 녀석.

    보내 준 성의를 생각해서 깔았다. 다운받는 데만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이 고물 폰으로 돌아가긴 할까. 떠올려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해 본 게임은 지뢰찾기였다. 그래도 유연호에게 들어 온 짬이 있으니 깰 수 있겠지.

    알바 하는 내내 짬짬이 플레이해서 엔딩을 하나 봤다. 왕족을 능멸했다며 플레이어 캐릭터가 살해당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연애 게임 주제에 살벌했다.

    어쨌든 재미있었다. 내일 학교에 가면 유연호한테 감상을 말해 줘야지. 생각보다 어렵더라, 넌 엔딩 다 봤냐고 물을 생각이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 바닥에 쓸리는 소리.

    무언가 덮쳐 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을 찔렀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내 몸이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오르고 바닥에 떨어지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였다. 엄마가 휴대폰 보면서 길 다니지 말랬는데. 난 말 잘 듣는 아들이었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이 망막에 남아, 고통보다 먼저 이명이 찾아왔다. 웅웅거리는 귀로 구급차를 부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이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깨진 액정으로 살해당한 플레이어 캐릭터가 보였다.

    재수 없게…….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 *

    내가 의식을 차리고 처음으로 한 생각은 여기가 입원실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너무 어렸는데, 조금 커서야 아버지 병원비가 우리 집의 모든 돈을 다 빨아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가운 빛이 눈꺼풀을 찔렀다. 역시 병원인가. 최악이었다. 그런데 빛이 인공적인 푸른 조명이 아니라 햇빛처럼 느껴졌다. 뺨이며 팔다리에 태양의 열기와 풀숲의 감촉이 느껴졌다.

    “조프리!”

    무음 모드를 해제한 것처럼 일순간 소음이 들이닥쳤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나는 처음 보는 여성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흐느꼈다.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 입에선 다 죽어 가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차가 날 깔고 지나가기라도 했나?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이렇게 안겨 있다간 정말 죽겠다.

    “조프리, 내 아가, 괜찮니? 조프리! 빨리 의원을 불러오지 않고 뭐 해!”

    여성이 소리쳤다. 그 말에 옛날 유럽인들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도로는? 차들은? 내가 아는 동네가 아니었다. 사실, 여긴 한국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새까만 눈동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맑은 눈동자,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 바람이 불자, 긴 목 위로 풍성한 갈기가 흔들렸다.

    저거 말이야?

    순식간에 현실감이 날아갔다. 나는 입을 벌리고 말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일이 일어났다.

    짝!

    어린애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붉게 부어오른 뺨이 보였다.

    “어떻게! 네가 감히!”

    나를 안고 있던 여성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남자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가 꼼짝도 하지 않자 여성은 다시 팔을 치켜들었다. 나는 놀라서 그 손을 붙잡았다.

    여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아아, 신음한 그녀가 내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비비며 흐느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나는 아연해서 시선을 돌렸다. 남자애는 그때까지 넘어져 있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아이를 일으키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정물처럼 서 있기만 했다. 다들 미친 거 아냐? 아동 학대잖아?

    잠시 뒤, 그 애는 혼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울지도 않고.

    그 애가 나를 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선만 움직여서 그 애는 나를 살폈다. 그러더니 말고삐를 끌고 가 버렸다. 내 현실감을 단번에 날려 버렸던 말이 그 애를 따라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잠깐. 어딜 가?

    어린애가 혼자 어디로 가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 내 머리에 젖은 수건을 대 주었고 어떤 남자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힘이 정말 센 분인데 눈은 안 좋은 것 같았다. 내가 어린애를 가리키며 뭐라고 하는데도 “죄송합니다, 곧 도착할 거예요.”라는 말만 했다.

    남자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뼈가 어긋나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지, 무슨 상황인지, 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조프리, 내 아가.”

    아동 학대의 주범인 여성이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이의 뺨을 때렸던 손이 내 볼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손을 잡아 줬다.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눈물이 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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