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중년(中年) - [完]
오두막의 산적들은 싸우다 말고 얼어붙었다.
다들 여기 날아온 칼 한 자루를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칼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느냐 추궁하는 듯 오두막 안의 산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이쪽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검신에 새겨진 별들이 생물의 눈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산적 하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저건 사인검 아닙니까. 월녀님의······”
자기 소두목을 안심시키려는 듯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지금 그도 겁을 먹은 까닭이다.
과연 칼끝이 그쪽을 향한 순간 산적은 말하다 말고 움찔했다. 구자성이 물었다.
“경찰들도 저 칼이 다 죽여버렸을까?”
산적은 겁먹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쩌면······.”
당연히, 순사들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이 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녹림의 산적이라 해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저 홀로 날아다니는 칼을 상대로 총이며 도끼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물며 그 칼을 멀리서 조종하는 누군가가 절세고수인 바에야.
칼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손끝 하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뒤이어 칼의 주인이 오두막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기척 없이, 한 여자가 오두막 안에 들어왔다.
어깨마저 좁은 것이 척 보기에도 가녀린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칼이며 도끼며 통하겠지만 그렇다고 산적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한 손에는 칼이,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이 들렸다. 그녀가 그 둘 모두를 극한으로 다룰 수 있음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이 아니냔 말을 듣는 여자 아닌가. 절세고수는 모름지기 총에도 반응할 수 있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소총으로 무장한 수십 명마저 당연한 듯 베어버리는 인물은 역사상 이 여자 한 명밖에 없다.
한편 허풍개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월녀, 하아린.
자신의 숨겨진 제자와 눈이 마주치자 허풍개는 눈을 돌렸다.
구자성은 애써 의연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월녀님.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돌아온 월녀의 목소리는 스산했다.
“안녕 못하겠는데.”
그녀의 눈길이 온몸에서, 특히 열 손가락 끝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허풍개를 향했다. 너무 어조의 변화가 없어서 오히려 화를 억눌러 참는 게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니?”
월녀의 물음에 구자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어.”
“어······ 우리가 혹시 실수한 건가요?”
“아주 많이.”
구자성이 변명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오해가 있었다고 무고한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드나?”
“실수였습니다······”
“구자산 그 양반이 아들을 잘 못 키웠군. 그 양반은 무고한 양민한테 손대지 않는 걸 자랑으로 여겼는데. 그 아들놈은 사과에 앞서 변명이나 늘어놓고.”
“잘못했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은?”
그녀가 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모두가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구자성은 그제야 제 나이다운 소년이 되었다. 어른에게 도움을 구하는 어린애처럼, 겁먹은 얼굴로 주변의 산적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도 진작 겁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그 앞을 막아서는 누군가가 한 명도 없는 사실에 구자성은 절망했다. 이내 그는 울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저흴······ 저흴 해치셔선 안 돼요.”
“왜?”
“저도 독립운동가예요······ 저도······ 이번은 진짜 실수고······ 제 아버지랑 잘 아시는 사이잖아요······? ”
“그래. 그러니까 살려는 주지.”
월녀는 한숨 쉬더니 애써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판단하건대, 시시비비를 가르는 것보다는 제 스승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추궁은 네 아비한테 하겠다.”
월녀의 말에 구자성이 희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럼······”
“뭐해? 꺼져.”
그 와중에 양태자는 몸을 웅크린 채 허풍개의 뒤에 숨고 있었다. 구자성이 그를 가리키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월녀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총구를 들어 방아쇠를 당기자, “악!” 불운한 산적 한 명의 귓바퀴가 날아갔다.
항의할 생각 따윈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오두막을 떠났다.
월녀가 양태자에게 말했다.
“너.”
“예?”
“상처에 덧댈 만한 거 가져와.”
양태자는 부리나케 움직였다. 뭔가 챙겨오려는지 오두막을 나섰다.
둘만 남겨진 가운데, 허풍개는 자신을 바라보는 월녀를 보았다.
“사부? 괜찮아?”
이 와중에 허풍개는 긴장이 풀렸다. 월녀의 양팔에 감싸인 채 허풍개는 정신을 잃었다.
*******
허풍개가 정신을 차려보니 건너편 마을이 분명했다.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월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그리워도 다시 보려 하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
“아린아······.”
“응, 사부.”
“여긴 왜?”
허풍개의 물음에 월녀가 대답했다.
“오랜만에 사부랑 좀 만나고 싶은데 소식이 들려오더라구? 소문 따라 여기 왔지.”
오길 잘 하지 않았느냐는 양 월녀가 웃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음을 깨달은 허풍개가 질겁했다.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데도 벌떡 일어나서는 따지듯 물었다.
“너 여기 있어도 되냐?”
“응?”
“너도 쪽바리들한테 수배당한 몸 아니냐? 얼른 떠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사부 만나러 왔다니까?”
“얼굴 마주 보고 대화하는 거야 나중에 하면 되고. 그리 일 저질러놓고 여기 있을 셈이냐? 그러지 말고 당장 가.”
허풍개가 협박했다.
“빨리 가. 안 가면 소리 지른다.”
“사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기야?”
“가!”
그 말에도 불구하고 월녀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허풍개가 나중에 이쪽에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른 이별이 못내 아쉬운 듯 월녀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만나. 사부.”
그녀가 떠나간 뒤, 웬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 천서주인가 하던 놈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선생님?”
이때 허풍개가 괜찮아 보이느냐 쏘아붙이지 않은 것은 그럴 기력조차 없는 까닭이었다.
허풍개가 입 다물고 있자니 천서주가 계속 말했다.
“저흴 보내시느라 이런 봉변이나 당하시고······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선생님. 제가 책임지고 나으실 때까지······.”
허풍개는 아픈 것을 꾹 참고 물었다.
“또 한 명은?”
“예?”
“또 한 명 있었잖나. 김선만인가, 그 양반은 어디 갔소. 무사히 벗어났나?”
“예? 예. 여기 마을에 당도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저 멀리 달려가던데요······”
허풍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놈이 진짜 밀고자인 모양이군. 산적들의 거취를 알자마자 경찰 쪽에 달려가서 일러바친 모양이다.
하여간 그 병신 같은 애새끼.
천서주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여간 산적 새끼들이 소문보다 훨씬 악독한 모양입니다. 놈들한테 붙들렸으면 어찌 됐을지······ 거듭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를······”
자기네를 보내고서 이렇게 됐단 사실에 감명 받은 걸까? 천서주는 그 손을 붙잡고는 이 은혜를 언젠가 반드시 갚겠다느니,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불러서 은인인 줄 알게 하겠다느니 약속했다.
허풍개는 그 모든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말했다.
“나중에 뭘 하든 일단, 나가주시겠소?”
“예, 그러지요. 선생님······”
혼자 남겨진 허풍개는 혼자 끙끙 앓았다. 그리고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빌어먹을, 진짜 빌어먹을.
결국 사람 하나 살린 셈이지만 보람이고 뭐고 없다. 누가 봐도 호구 짓을 했을 뿐 아닌가.
자신을 속여먹으려 한 산적 놈을 대체 왜 살렸는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는데, 의뢰자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협객의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그놈의 공과경에 몇 줄 적는 게 욕심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커져 가는 이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자신이 남의 죽음을 신경 쓰는 게 자신의 선량함 때문이 아님을 허풍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들을 그리 사랑하기엔 부처나 예수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정말 통탄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기어이 그 기지배가 도와주게 만들다니······.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베풀어주는 스승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제자보다 약해빠져선 구해줘야 할 등신 새끼가 아니라.
수치스러워 미칠 것 같은 가운데 허풍개는 흐느꼈다.
언제쯤 되어야 이놈의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
그날의 사건은 허풍개의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후로는 협객 노릇 따윈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더랬다.
그러나 얌전히 떠돌아다니며 의원 노릇이나 하는 와중에 왜놈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코쟁이들과의 전쟁에서 밀린 그놈들은 조선 땅에서 청년들을 죄다 끌고 갔더랬다.
그 와중에 어쩌다 보니, 허풍개는 병사로 징집된 젊은 남자들을 숨겨주거나 징집에 응하려는 면서기를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그리 협객으로 복귀한 어느 날, 언젠가는 여자들도 끌려갔다는 말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이쯤 되니 구자성과 그놈의 산적들이 왜 그리 독립을 하겠답시고 지랄을 떨었는지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들이 옳았을까? 자신은 그들 말고도 다른 독립군을 가로막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모든 일은 대의 따윈 알지 못하는 협객 나부랭이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이 일을 완수하면 그놈의 수치가 조금은 줄어들지도.
바다를 건널 마당에 조악한 배를 가져오진 않았다. 나룻배치고 큼지막한 데다 돛까지 달린 배였다. 선실이라기보단 개집에 가까운 방도 한 칸 있어서 여자들은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누구 하나가 떨어져 내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작 노를 저어야 하는 허풍개는 몇 번이고 바다에 빠질 뻔했다.
힘이 들어도 너무 힘겹다.
공과격에 자랑스레 기록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정말 보람 있는 일이 되리라 예상하고 일에 나선 바였다.
그러나 막상 보람 따위를 느낄 여유가 없다.
무공을 단련하며 가장 자신 있게 된 것은 인내심과 지구력이지만, 그마저 열네 시간에 걸친 항해 속에서는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배가 뒤집혀 모두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면 노 저을 힘이 사라진 가운데 배가 저 멀리 떠밀려가 풍랑 속에서 굶어죽게 될지도.
더없이 불안한 가운데 수치스러운 사건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반복되고 있다. 이 와중에 팔이 저리고 온몸이 춥다.
심신의 고통이 계속되었다. 지난 삶의 거의 모든 순간이 이랬다. 끔찍한, 아주 끔찍한 고통만이 계속될 뿐이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은 대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땀과 빗물이 섞이는 가운데, 등 뒤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여자 하나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
허풍개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들어가서 쉬어요.”
그러면서 허풍개는 일부러 힘있게 노를 저었다. 몇 번 더 노를 젓고 나니, 그 눈이 크게 뜨였다.
수평선 너머에 뭍이 보였다. 가닿아야 할 조선 땅이 아니라 이름 모를 섬이기는 했다. 그래도 잠시 한숨 돌릴 수는 있게 된 셈이다.
폭풍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허풍개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외전 중년(中年) - [完] 끝
후기
또 한 소설을 끝냈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아쉽군요...
선계 외전, 그러니까 허풍개가 월녀 및 아내와 재회하는 장면을 요청한 분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은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등선 후 도달할 선계는 신비의 공간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또한 초월의 공간이어야 할 선계를 완벽하게 묘사할 자신도 없었고요.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허풍개든 월녀든 정보라든, 모두들 그곳에서 만족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ㅠ
상당히 고민 끝에 쓴 소설이었습니다. 전작 게임4판타지가 기나긴 휴재와 호불호가 갈리는 결말로 여러 독자님들께 실망과 아쉬움을 드렸지요. 이번에는 더 잘 써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그 와중에 무료연재 당시의 조회수가 영 좋지 않았습니다. 계속 연재해야 하나 고민도 컸는데. 조회수에 비해 댓글과 추천은 놀라울 정도로 많아서 어찌어찌 계속 연재하다 보니 어떻게 완결을 냈군요.
당연히도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언제나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영향받은 작품이 여럿 있었습니다.
우선 묘엽 작가님의 야구 소설들... 연재하지 않는 동안 몽땅 다 읽었는데요. 스포츠 소설로는 특이하게도 주인공의 전성기 이후, 쇠락의 시간을 다루더군요. 그것이 맘에 너무 와닿았기에 늙은 주인공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BB탄과 야구의 관계도 묘엽 작가님의 야구 소설들을 보며 생겼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하고도 존경하는 좌백 선생님의... 스포일러가 될 것이라 무슨 작품인지 딱 잘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아실 분들은 알 그 명작이 이 작품의 결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모쪼록 쾌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컵라면 작가님의 무림서부를 보면서 ‘독특한’ 무협 소설을 써볼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어찌나 명작이고도 재밌었는지... 세상에, 서부극과 무협이 섞일 수 있다니? 그렇다면 이미 명작들이 여럿 있는 현대 무협을 시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지요!
이 글의 바탕이 된, 여러 좋은 작품을 써주신 모든 작가님들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또한 계속 차기작 언제 쓸 것이냐며 전화로 독촉하시고 신경을 써주신 금강 선생님, 그리고 연중을 고민하는 중에 계속 써보라 권유해주신 데다 이후로도 여러모로 챙겨주신 담당님께도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거듭해서, 부족한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