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02화 (102/103)

외전 중년(中年) - [2]

“잡았다.”

결국 산적들이 나타났다. 허풍개는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을 무심한 척 바라보며 생각했다.

흔히 산적이라면 떠올리곤 하는 근육질 털보들은 아니로군.

저들의 생김새는 평범했고 위압적일 만큼 떡대도 아니었다. 하기야 순사들의 눈을 피해 전국을 누벼야 하는 녹림도들 아닌가. 두드러지는 생김새는 그러는 생활에 썩 적합한 요소가 아니리라.

그래서 평범한 산적들 사이의 한 소년은 유독 눈에 띄었다.

산적들 사이에서 소년이 중얼거렸다.

“씨······, 놓칠 뻔했네.”

허풍개는 소년을 보았다.

그 나이가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얼굴 아래에는 어지간한 성인의 그것보다 크고 우람한 몸뚱이가 달려있다. 이쪽과는 골격부터가 다른 몸이다. 타고난 무골(武骨)이 바로 저걸 말하는 모양이지.

소년이 물었다.

“너, 나 알지?”

허풍개가 멀뚱히 대답했다.

“모르는데.”

소년이 비웃엇다.

“지랄.”

“누구신데?”

“구자성, 새끼야.”

역시 모르는 이름이라고 말하려던 허풍개는 문득 한 이름을 떠올렸다.

“구자산. 녹림총채주······ 그와 성씨가 같고 이름이 비슷한 걸 보니 아들쯤 되나?”

구자성이 혀를 찼다.

“지금 떠오른 척이야? 연기 잘하네, 자식이.”

구자성이 비아냥거리는 가운데 허풍개는 생각했다.

녹림 대두목의 아들이 이런 산골에서 상인들 돈이나 빼앗고 있었다니, 미친놈인가? 전국 순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저놈을 잡으려 애쓸 텐데······.

산적들이 다가와 허풍개의 양팔을 붙잡았다.

허풍개는 저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 가진 돈은 많지 않아서 얼마쯤 뺏긴들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 괜히 싸우다가 누구 다치기라도 하는 것보다야 돈 좀 뜯기는 편이 낫지.

그리 생각하는 차에 양팔에 통증이 밀려왔다. 허풍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산적들이 붙잡은 팔에 힘을 주어도 너무 단단히 주었다.

허풍개는 인상을 쓰며 양태자를 향해 턱짓했다.

“나한텐 이래도 저 양반한텐 이러지 마십시오. 저기 저 양반은 다리 부러졌다니까 조심히 부축해서······”

말하다 말고 그 눈이 크게 뜨였다.

다리가 부러졌다던 양태자가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산적들 사이에 합류해서는 그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산적들은 양태자를 옭아매려 하거나 위압하려 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한패가 분명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허풍개가 입술을 깨물었다.

‘산적들이 위장한 놈을 마을에 내려보낸다더니.’

여기까지 상황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허풍개는 그대로 소굴에 끌려가 가진 물건을 빼앗길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산적들은 허풍개에게서 돈이나 물건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백이었다. 허풍개가 알지 못하는 정보에 대한 자백.

*******

산적들이 허풍개를 데려간 곳은 웬 조그만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엔 의자 하나가 있었는데, 산적들은 허풍개를 거기 앉히고는 단단히 묶었다. 당연히, 금품을 뺏으려는 상황에 이럴 필요까진 없다. 뭔가 심문하려는 모양새 아닌가.

허풍개는 부릅뜬 눈으로 물었다.

“왜 이러는 거요?”

구자성이 대답했다.

“물을 게 있어서. 너, 이 새끼에게 접근해서 같이 다니자고 요청했다는데 맞나?”

구자성이 가리킨 곳에는 양태자가 미안한 듯이 머뭇머뭇 서 있었다.

“그랬는데 뭐. 문제 있나?”

“산적들이 이 산에 있단 말을 듣고서 그리 제안했단 것도 맞고?”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기 모인 산적들이 웃었다. 덫에 걸린 사냥감 앞에서 사냥꾼들이 지을 법한 웃음.

“그럼 틀림없군.”

뭐가 틀림없느냐고 물을 기회는 주지 않았다.

구자성이 물었다.

“자, 여기 나랑 같이 다니는 산적 새끼들 다 모아놨다. 그래서······ 밀고자가 여기 있나?”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밀고자라니, 그게 뭔?”

“발뺌 좀 하지 마라, 응? 시간 낭비잖아. 다 알고 있다니까.”

“난 지금 상황 하나도 모르겠는데.”

허풍개의 말에 구자성이 한숨 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데 자꾸 순사 새끼들 추격이 따라붙더라고. 산을 타고 넘어서 지역을 옮겨 다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순사들이 계속 쫓아와. 이상한 일 아니냐?

이건 분명 우리 사이에 밀고자가 있는 거지. 간자 새끼 말이야. 그놈이 계속 우리 위치를 알려주는 거야. 데리고 다니기 찝찝한 일이야. 누가 그놈인지 밝혀지지 않았는데 본거지에 데리고서 귀환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

“그러니 아부지한테 돌아가기 전에 밀고자를 찾아서 족쳐야겠다. 그리 생각해서 덫을 놓았거든.”

“덫?”

구자성은 자랑스럽게도 설명했다.

“멍청한 순사 새끼가 걸려들 만한 덫. 저 산에 산적이 있다느니 어쩌느니 지껄여서, 관심 있는 척 다가오는 놈을 꾀어다가 데려오라고 시켰지. 그놈은 분명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한 순사 나부랭이일 테니까. 그래서 순사 나리, 밀고자가 누구지?”

“그걸 내가 어찌 알―”

짝, 하는 소리. 뺨을 통해 얼굴 전체에 퍼진 충격이 허풍개의 입을 다물게 했다.

구자성이 지껄였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너 연기 지랄맞게 못해. 순사 새끼들도 인재가 없나? 연기 좀 잘하는 놈을 위장시킬 것이지, 뭐 이런 새끼를 보내서는?”

연기는 지랄. 허풍개는 겨우 말했다.

“순사라니, 대체······”

“너, 새끼야. 너.”

그리 말하면서 구자성이 허풍개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허풍개는 아연한 가운데 생각했다. 지금 날 순사라고 의심하는 건가? 일제의 명을 받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에 순사를 꾀겠다던 그놈의 작전은 얼핏 듣기에도 영 병신 같았다.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자성은 나이에 걸맞은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다 알고 있으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라. 밀고자 새끼, 지금 이중에 있지?”

허풍개가 말했다.

“난 허풍개요. 의원이고······”

이번에 그 입을 다물게 한 것은 날아온 주먹이었다.

허풍개의 고개가 돌려진 가운데 구자성이 웃으며 말했다.

“말할 생각 들면 말해. 그럼, 얘들아?”

그 말에 따라 산적들이 다가왔다. 그 손에 들린 물건들, 인간의 신체 어딘가를 뽑아내거나 쪼개기 적합해 보이는 물건들을 허풍개는 감히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

고통에는 익숙해질 수 없다. 그저 더 잘 버틸 수 있게 될 뿐이다.

그 사실을 허풍개는 지난 수십 년에 걸친 협객 생활 동안 몸으로 배워왔다.

고통에 가득 찬 머릿속에 웬 약쟁이가 스치고 지나간다.

웬 아줌마의 부탁에 따라 사투를 벌이고 구해낸 약쟁이. 구할 가치도, 살려둘 가치도 없는 그 쓰레기를 구한 다음 이보다 더 다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음을 지금 알겠다.

손톱이 뽑혀 나간 열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톱들은 뽑혀 나가기 전에 여러 차례 쪼개졌다. 지금까지 겪어본 모든 고통의 수위를 아득히 갱신하는 고통.

팔자에도 없는 이놈의 협객 노릇을 진작 그만뒀어야 했는데.

허풍개는 숨을 헐떡거리며 제 몸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이 모든 것을 저지르고도 어린 구자성은 천연덕스럽게도 웃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말할 생각이 드나?”

허풍개가 애써 입을 열었다.

“그래.”

“간자 새끼, 누구지?”

“네 어미.”

구자성이 주먹을 움켜쥐더니, 심호흡하고는 뒤돌아서서 말했다.

“계속해.”

또다시 산적들이 도구를 들고 다가오던 그때였다.

오두막의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거칠게 숨쉬며 외쳤다.

“습격······ 습격이요!”

오두막 안의 산적들이 눈을 부릅떴다.

“습격?”

“순사들이요! 아주 그냥 몰려왔소!”

산적들은 급히 구자성을 바라보았다. 얼른 도망치자는 눈짓이다. 그러나 구자성은 이를 악물더니 중얼거렸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또 어떻게 알고······ 저번에 습격당한 이후로는 분명 다 함께 몰려다녔는데, 누군가 몰래 단독행동하지 못하도록······”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양, 구자성의 고개가 한 남자를 향했다.

“네가 밀고자군. 그렇지?”

그 성난 눈길을 받으며 양태자가 움츠러들었다.

“예?”

구자성이 윽박질렀다.

“맞잖아. 최근에 따로 행동한 건 너밖에 없는데. 마을에 내려간 틈에 순사 새끼들이랑 접선한 거지?”

“전, 전 그런 적이 없······”

“저 새끼가 진짜 순사가 아니란 걸 알고 데려온 거야. 진짜 뭔가 아는 놈을 데려왔다간 네놈이 간자로 지목당할 수 있으니까. 이 새끼가 고문당하다가 아무나 지목하길 바랐나 보지. 그래야 네가 용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렇잖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소년들은 제 생각을 의심하는 법이 없다. 확신에 찬 목소리.

다른 누군가에게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단이 있었을지 모른다든가, 마을에 내려가 소문을 퍼뜨리는 동안에 누군가가 듣고서 고해바쳤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따윈 지금 구자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전 정말 아닙니다! 맹세해요. 전 정말······”

양태자가 변명하려는 모양이었지만 구자성은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멱을 따주지. 최대한 고통스럽게.”

구자성이 산적들에게 선언했다.

“이 새끼 죽이고 간다.”

산적 하나가 조심스레, 여전히 묶여있는 허풍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양반은요? 풀어줄까요?”

구자성은 대답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직접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 산적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억울한 사람을 고문했단 소문이 퍼졌다간 녹림총채주의 후계자로서 체면을 상할 것 아닌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느니 소문을 퍼뜨릴지 모를 입 따윈 없애는 게 낫다.

산적의 표정이 굳더니, 비수 한 자루를 쥐고는 허풍개에게 다가섰다.

구자성은 부하가 이제 뭘 할지 모르는 척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겁에 질린 양태자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구자성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발짝 걸었을 때, 억······.

구자성은 등을 강타한 충격에 비틀거렸다. 뭔가가 날아와서 부딪쳤다. 대체 무엇이?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묶여있던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 숨통을 끊으려 접근했던 산적 놈은 배를 얻어맞았는지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멱을 따려다 밧줄을 잘라버리기라도 했나?

허풍개가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그 앞을 산적 둘이 가로막았지만, 순식간에 둘이 쓰러졌다. 그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나자빠져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그것이 태극권의 금나수법과 거기 연계되는 점혈 동작임을 알아본 것은 구자성뿐이었다.

고수였다. 보기 드문.

나머지 산적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허풍개는 오래 생각할 여유를 주려 하지 않았다. 오래 묶여있다가 풀려난 한을 풀려는 늑대처럼, 산적들 사이에서 날뛰었다.

순식간에 둘을 더 쓰러뜨리더니, 어느새 주저앉아 있던 양태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체 왜?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방해하려는 것은 분명했다. 구자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나 죽겠는데 귀찮게 뭔 지랄이야?”

주변의 산적들이 이럴 시간 없다고, 순사들이 당도하기 전에 얼른 몸을 피해야한다고 부르짖었지만 구자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끼를 움켜쥔 채 허풍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풍개는 그마저 빠르게 제압하려 했다. 자신의 어깨를 노리고 휘둘러진 도끼를 옆으로 후려쳐 밀어내면서, 그대로 손바닥을 휙 하고 뻗었다.

태극권의 장법이다. 손바닥은 정확히 구자성의 가슴을 강타했다······ 빌어먹을.

허풍개는 소리 없이 비명 질렀다. 후려친 이쪽의 손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몸을 단단하게 하는 외공이라도 익혔나? 철포삼이라든가, 뭐 그런? 하지만 그런 무공을 익혀봤자 대성하기 어려워 대부분은 살가죽이 좀 질겨질 뿐이라고 들었는데. 이 어린놈이 대체 얼마나 많은 영약을 처먹었길래 이 정도 성과를 이룬 건지 모를 일이다.

하기야, 녹림의 후계자에게 얼마나 많은 지원이 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허풍개는 이 소년이 분명 십 년만 지나도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서 싸웠다간 짓밟히겠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씨······ 발······”

얻어맞은 나머지 움찔하여 구자성이 휘청거리는 가운데, 허풍개는 그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목을 움켜쥔 순간, 당연히도 구자성의 부하들은 자기네 어린 두목이 목 졸리도록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 손 안 놓나, 새꺄!”

산적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그 몸을 옭아매려 했다. 허풍개는 손에 잡힌 구자성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그들과 맞서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때, 달려들다 말고 산적들이 움찔했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기어이 경찰들이 당도한 것인가? 아니, 그러나 총성은 지나치게 작은 소리로, 그러니까 너무 멀리서 들렸다. 어째서?

모두 영문을 모르고 그저 초조해하던 와중이었다.

*******

오두막과 떨어진 봉우리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산적은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보았다.

순사복을 입은 남자들이 이리저리 뛰다. 그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있다. 날아다니는 무언가를 피해서다.

그 비행체란 새가 아니다. 총알이나 화살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훨신 위험한 무언가다.

그것은 한 자루의 칼이다.

칼이 너무나도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기에 산적은 그 움직임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칼이 잠시 공중에 멈춰선 순간에야 그 회색 검신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칼은 순사들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그들을 찌르거나 베어버리고 있었다. 순사들은 그 날아다니는 칼을 쏴 맞히고 싶은지 총을 마구 쏘아댔지만 맞힐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애초에, 칼을 쏴 맞힌들 그것에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무생물인 칼에는 급소 따윈 없으니.

검의 비행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으므로 순사들이 쓰러지는 속도 또한 지나치게 빨랐다. 짧은 순간이 지나, 비명 따윈 들리지 않았지만 수십 명 모두 피를 흘리며 산속에 누워버렸다.

이 모든 참상을 일으킨 칼 한 자루가 칼끝을 돌렸다.

칼은 칼끝이 돌아간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 방향에 오두막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버린 칼을 보며 산적은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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