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01화 (101/103)
  • 외전 중년(中年) - [1]

    길쭉한 노가 바닷물을 밀어냈다.

    나룻배가 살짝 전진한 뒤, 허풍개는 잠시 노질을 멈추고는 안면의 땀을 닦아냈다. 이마에서 땀이 너무 많이 흘러내리는 나머지 시야가 뿌예질 지경이었다.

    이 끝없는 바다에서 노질한 지 어느덧 열한 시간째. 그마저도 허풍개는 나룻배 한 척과 자신의 무게만 밀어내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배에는 여자 네 명이 함께 탔다.

    저기 태평양의 어느 섬, 일본군 어느 대대의 주둔지에서 몰래 빼돌린 여자들이었다. 조선 여자도 있고 오키나와 여자도 있었다. 그녀들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굳이 떠올리거나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나룻배 바닥에 땀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애써 심호흡했지만 지친 팔에 기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쉴 수는 없다. 허풍개는 다시 노를 저었다.

    더워 죽겠다고 생각하는 차에 팔뚝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동반한 비였다. 비바람이 불자 파도가 거세졌다. 허풍개는 나룻배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발에 힘을 주어야 했다.

    이윽고 ‘콰르릉’······. 벼락까지 치자 허풍개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저 하늘, 저놈의 하늘. 고요해도 모자랄 마당에 저 지랄이라니? 원망스럽다 못해 증오스러울 지경이다.

    하늘의 뜻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도가 서적에 따르면 선행은 곧 하늘의 복(福)을 불러온다고 했건만, 살아보니 그런 헛소리가 따로 없다.

    이 와중에, 제기랄.

    하반신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순간 팔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노를 놓친 허풍개는 황급히 바다에 뛰어들어 노를 건져 올린 다음 겨우 배에 올라와선 헉헉거렸다.

    아까는 더워죽겠더니 이젠 추워죽겠군.

    조금이라도 몸을 덥히기 위해, 폭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허풍개는 계속 노질했다.

    이 와중에 생산적이거나 희망적인 생각 따윈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울증 환자라면 흔히 그렇듯, 고된 상황에 머릿속을 잠식하는 것이라곤 인생의 암울한 순간뿐이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떠올릴 때마다 굴욕감에 몸서리치곤 하는 그날의 장면이.

    *******

    도사 허풍개가 주안산에서 홀로 수행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것은 바로 자급자족해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사리를 캐어 먹던 백이와 숙제가 결국 굶어 죽었듯, 산에서 나물만 캐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허풍개는 나름대로 감자 농사까지 지어보았지만, 한해 농사를 망쳐버리자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하기야 포박자에서도 도사 홀로 산중에 칩거했다간 골병이 들 뿐이라며 경고했던가?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하는 것은 신선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 사실을 허풍개는 제대로 먹지 못한 나머지 온몸의 체중이 어린아이와 같아진 시점에야 인정했다.

    정말 그러기 싫었지만, 허풍개는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아내와 자식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절한 뒤 허풍개는 십 년 가까이 머물렀던 산을 떠났다.

    산에서 내려온 뒤로도 시간이 흘러, 허풍개가 사십 대에 겪은 일이었다.

    *******

    혼자 오래 지내다 보면 절로 성격이 괴상해지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우울증을 앓았다면 더욱 그렇다.

    결국 중년이 된 허풍개에게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지낼 만한 사교성이라곤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돈벌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허풍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침술에 재능이 있었는데, 침술은 처방에 비싼 약재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지간한 의원보다도 인기가 있었다. 대충 마을 사이를 떠돌아다니기만 해도 식량 삼을 견과류며 싸구려 영약 재료 따위를 사기는 충분했다.

    밥벌이를 겸한 도사로서의 수행이었다.

    누군가를 치료하는 것은 공과격에 공(功)을 더할 수 있는 행위다. 많은 도가 서적에서 말하길 인간의 운수와 수명은 선악에 달려있다 하였으니, 억지로라도 선행하는 것 또한 수명을 늘리는 일이 틀림없었다.

    선행이 그리 장생에 도움 된다면 자신의 아내는 대체 왜 요절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머리를 잠식하려는 우울한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린 채 주막에 들어섰다.

    석쇠에 구워지는 너비아니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이미 찌푸리고 있던 허풍개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끼니랍시고 견과류나 씹어먹는 도사에겐 너무 강한 자극 아닌가. 늘 그랬듯 참아내야 할 것이다.

    “주모, 여기.”

    제대로 먹지도 않을 음식과 술을 주문하고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돗자리 깔고는 침구며 싸구려 약재를 펼쳐둘 것이다. 그리 의원입네 하고 있으면 쭉정이들이 와서 얼마요, 하고 물을 테지. 자신은 싼 가격을 부르고는 여비와 공덕을 챙기면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공덕을 쌓아 신선이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에 사람 여럿 살린 의료인이 많지만 그들이 등선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의술 말고도 공덕을 쌓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무언가’란 다름이 아니라······.

    탁자 앞에 걸터앉아 있으려니 손님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산적들이 저 산에 있다 이거요?.”

    “그래요. 산 넘어가려는 새끼들 붙잡아선 통행세로 죄다 뺏어버린 다구.”

    허풍개가 흘긋 보니 남자 셋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이 근처 농사꾼들은 아닌 것 같은데, 행상들일까?

    “엿됐군.”

    “였됐지, 물론. 우리처럼 짐 바리바리 짊어진 놈한테선 절반쯤 뺏어간다던데? 그러면서 악감 가지지 말라던가. 독립운동 군자금을 거두려는 거니까······”

    “씨발 놈들, 독립운동에 돈을 보태도 우리가 직접 보태지 왜 갈취를 해? 하여간 산적 새끼들이 뭔 놈의 독립운동을 한다고······”

    허풍개는 웬 산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을 껌벅였다. 거긴 내가 넘어가야 할 곳인데.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 상인에게 다가갔다.

    “그 산에 산적들이 진 치고 있단 말입니까.”

    허풍개의 물음에 세 상인은 긴장한 눈치였다.

    “그래요, 그런데······?”

    허풍개는 상대방의 태도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순사들한테 고발 안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행상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 행상이 가장 젊은 행상을 가리키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글쎄, 그 산에 산적들 있단 걸 아는 놈이 여기 이 아재 한 명밖에 없더라구······.”

    “그래서 확실한 정보가 아니다?”

    “그래요. 잘못 알고 신고했다간 순사 놈들한테 얼마나 얻어 맞으려구? 게다가 자칫 고발한 게 걸렸다간 뒷감당은 또 어쩌구······.”

    행상이 걱정하는 바는 허풍개도 짐작할 만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군자금을 모으는 산적들이라면 녹림(綠林) 아닌가.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에서까지 신출귀몰하는 그들의 반일투쟁은 이미 전설이다.

    그들은 몇몇 산간오지 마을에서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 원성을 사기도 하지만, 대부분 지역에서는 활빈당의 재림쯤으로 통한다. 행상 나부랭이들이 의적들을 일본 순사들에게 고발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민족 행위로 여겨지리라.

    그래도 역시 돈과 짐은 넘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애국자와는 거리가 먼 허풍개 또한 그들의 심정에 공감했다. 생각 끝에 제안했다.

    “그럼 나랑 같이 갑시다.”

    세 상인이 눈을 껌벅였다. 젊은 상인이 물어왔다.

    “성함이?”

    “허풍개.”

    “그래서, 누구시길래?”

    “떠돌이 의원이요. 무공 좀 익혔고.”

    상인의 눈매가 좁혀졌다.

    “무공을 익혔다니, 그래서······ 산적들을 혼자 다 때려눕히기라도 해주시려고?”

    허풍개가 고개를 저었다.

    “몇 명이나 있는지도 모르니 그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짐 안 뺏기도록, 산 넘어가게 도와줄 수는 있을걸.”

    워낙에 난데없는 제안인 탓일까? 행상 셋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잠시만, 의논 좀 합시다······”

    허풍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과 떨어져 앉았다.

    셋이서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그들 딴에는 작게 말하고 있었지만 무공을 수련한 성과로 귀가 밝은 허풍개에게는 잘만 들렸다.

    “수상하지 않나?”

    “그렇지. 엄청 수상해.”

    “소문으로는 산적 놈들이 보통 사람인 척 산적을 위장시켜서 마을에 내려보낸다던데? 자기네들 쪽에 행인들이 오도록 꾀라고 말이요. 저놈이 딱 그런 놈 아닌가······.”

    그 대화를 들으며 허풍개는 생각했다. 글렀나?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자신도 충동적으로 한 제안이었으니까.

    허풍개는 방금 협행(俠行)을 하기 위해 그런 제안을 했더랬다. 도적들에게서 무고한 양민을 돕는 것은 공과경에도 적힌 선행 아닌가. 큼지막한 공덕을 쌓으려거든 해봄 직했다.

    하지만 뭐, 저쪽에서 도움받기 싫다니까······.

    그때 주모가 세 상인에게 다가갔다. 상인 하나가 주모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인간, 누군지 아쇼?”

    그 손가락이 몰래 허풍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모가 대답했다.

    “아, 나 저분? 작년이랑 재작년에도 뵌 적 있수. 이 근처에서 용한 의원님으로 통해요. 성격 한번 괴팍하긴 한데······”

    세 명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짜인 줄 알았던 신분이 진짜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일까. 그들의 대화 방향이 바뀌었다.

    “하기야 산적 놈이 위장할 거면 우리처럼 봇짐장수인 척하겠지. 뜬금없이 의원인 척하진 않겠지?”

    결국에는 밑져야 본전이라 여긴 모양이다.

    셋은 의논 끝에 허풍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감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고 세 행상은 차례대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천서주입니다.” “김석만이요.” “양태자······”

    *******

    세 명을 이끌고 허풍개가 산속을 걸었다.

    이렇듯 초면에 누군가를 돕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수련해온 무공으로 싸워본 적도 이미 수십 차례 있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보면 자릿세를 내놓으라는 동네 건달부터 마약 밀매상까지 별 잡다한 놈들과 부딪치게 되기 마련이다. 그들과 충돌하다 보니 절로 이런저런 일에 끼어들었다. 덕분에 저 황해도에서는 그 이름이 제법 알려진 마당이기도 했다. 마적들을 손봐준 적전이 꽤 있었던 덕이다.

    그 모든 일이 가치가 있었느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요새는 팔자에도 없는 협객 노릇 따윈 집어치울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만큼 보람 있는 일이 아니었고 너무 고생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몸이 자주 다치게 되는 것은 물론 가끔은 마음까지 다치게 되는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뭐, 이번 일까지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작 세 명을 산 넘어가게 해주는 일 아닌가.

    이 정도면 사실 협객의 협행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치 간단한 일이다. 별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별 대단한 곤경에 처하는 일도 없겠지. 몸이든 마음이든 크게 다치는 일도 없을 테고.

    어두운 산을 걷고 또 걷던 와중이었다.

    가장 젊은 행상, 양태자가 중얼거렸다.

    “저기······”

    허풍개가 속삭였다.

    “작게 말해요.”

    “아무 데로나 가면 길을 잃지 않겠습니까?”

    허풍개는 화내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작게 말하라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는군.

    허풍개는 잠시 위를 향해 턱짓하고는 말했다.

    “저 위를 보고 가면 안 잃소.”

    “하늘을?”

    “별들을.”

    허풍개는 계속해서 셋을 인솔했다. 어둠은 허풍개의 시야 또한 가로막았지만, 그래도 허풍개는 원체 감각이 좋았다. 시야에 의지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쯤은 능히 해낼 수 있었다.

    수행 끝에 상단전을 개통하여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제자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일이었지만 어쨌건.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허풍개가 모두에게 속삭였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들 하고. 혹시 넘어지면 당황하지 말고, 앞 사람에게 작은 소리로 도와달라 해요.”

    그러나 경고한 보람이 없었다.

    꽤 오래 걸었을 때, 그러니까 새벽이 지나 산속에서 어둠이 걷히고 이제 수십 분쯤 더 걸으면 산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세게 넘어진 모양이었다.

    허풍개가 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으, 어으어어억!”

    뭔 놈의 비명이 이리 큰지 산속에 메아리가 다 칠 지경이었다.

    모두가 놀라 눈을 부릅뜬 채 넘어진 양태자를 바라보았다. 허풍개가 다가가서 윽박 질렀다.

    “닥쳐.”

    그러나 허풍개가 뭐라 말하든 말든, 양태자는 제 넘어진 고통에나 신경 썼다. 아이고, 나 죽네 하면서 제 다리를 붙잡고는 큰 소리로 끙끙대는 게 아닌가.

    이 와중에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저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려고 다가오는 사람들? 아니, 예의 산적들인 모양이다.

    “못 일어나겠나?”

    허풍개의 물음에 양태자는 비명을 지르듯 고통을 호소했다.

    “예? 예! 못 일어나겠어요. 부러졌나 봐. 너무 아파······”

    허풍개는 혀를 차고는 나머지 두 행상을 바라보았다. 불안에 찬 그둘에게 말했다.

    “먼저 가시오.”

    천서주가 기겁했다.

    “예?”

    “먼저 가라고. 어차피 잡힌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산을 꽤 많이 내려왔기 때문에 이제는 인솔 없이도 그들끼리 방향을 찾아갈 수 있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웠소!”

    이 은혜를 나중에 어쩌고, 지껄이면서 둘이 달려 나갔다.

    한편 허풍개는 양태자 앞을 지키고 섰다.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산의 산적들은 사람을 죽이고 가진 모든 걸 털어가는 그런 도

    적이 아니라 의적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굳이 여기 넘어진 천치를 지켜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 둘이 도망치게 하려면 시간을 끌어야겠지.

    아무리 요새는 다 집어치우고 싶어진 협객 노릇이라 해도 할 일은 제대로 해야 했다.

    허풍개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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