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00화 (100/103)
  • 후일담 이풍 - [2]

    “이록 자네, 검사 노릇 계속할 수도 있다고 했지 아마?”

    박 회장의 물음에 이록 검사가 대답했다.

    “예. 요새 여론을 신경 써서인지 저 옷 벗기려다 그만둔 모양입니다. 제 발로 떠날 거 아니면 일단 내버려 두려는 것 같던데요. 덕분에 하려던 일은 계속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박 회장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그만두지 그래.”

    “예?”

    “이미 왕따 됐으니 거기 더 있기가 괴로울 거잖나.”

    이록은 놀란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지금 박 회장은 이록에게 무림과 투쟁하는 검사 노릇을 그만두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박 회장이 그동안 이록을 시켜 꾸며온 일들의 종료를 의미했다.

    이대로 다 그만두려는 건가? 돈도 시간도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쏟아붓던 노인네가 정말?

    박 회장이 물었다.

    “그래서 검사 그만두면 푹 쉴 거야? 계속 일할 생각 있으면 법무팀에다 자리 마련해놓으라고 말할 건데.”

    이록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절 그룹에 넣으시면 안 좋을 텐데요. 저 완전 검찰에 찍힌 놈이잖습니까? 혹시 모를 불이익을 받을 수도······”

    “내가 시킨 대로 하다가 그리된 건데 뭘. 그리고 뭐, 괜찮아! 웬놈들이 자넬 밉보든 말든 해봤자 결국 다 좆밥 새끼들이야. 떡 좀 물려주면 다 잊게 돼 있어.”

    이록은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 말씀해주신다면야, 감사히······”

    박 회장이 혀를 찼다.

    “감사하긴, 내가 고맙지. 노망난 늙은이 억지에 어울려주느라고 자네가 아주 수고했어.”

    박 회장의 말에 이록은 안절부절못했다.

    “제가 무슨 수고를 했다고 그런 말씀을?”

    그러는 이록을 보며 박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대로 포기하셔선 되겠느냐 따지고 들지는 않는군. 하기야 맘에도 없는 열혈 검사 노릇이었겠다, 처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박 회장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너무.”

    이록이 기겁했다.

    “아닙니다, 전 그저······”

    이록이 아연한 얼굴로 떠나간 뒤, 박 회장은 신음했다.

    아직 사과할 사람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오랜 스승에게도 가서 머리를 숙여야 하리라,

    젠장. 박 회장은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천하의 천서인이 또다시 누구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맘이 불편해지는 가운데, 그것과 상반되는 감각이 동시에 느껴졌다.

    머릿속에 얹혀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박 회장은 뭔지 모를 감각에 놀라 눈을 껌벅였다.

    *******

    그날도 이풍은 모산파의 자기 방에서 명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가 날만치 명랑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이풍 아저씨!”

    눈을 떠보니 과연, 익숙한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풍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저도······. 다시 봬서 저도 반갑습니다, 라나 아가씨.”

    “곤니찌와!”

    “그건 아침 인사인데······.”

    라나 레반도프스카는 만면의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건 일본어나 그렇구, 제가 한 건 폴란드어라서 괜찮아요! 그런데 말만 그렇지 별로 안 반가운 표정이네? 섭섭하게.”

    확실히, 이풍은 눈앞의 소녀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이쁘고 귀여운 얼굴이니 어쩌느니 하는 건 조금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저 마교 수괴는 최고등급의 위험인물 아닌가. 이풍 개인이 저번에 만났을 때 겪은 일 때문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준에서도 그렇다. 멕시코에 저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 뒤, CIA와 멕시코 카르텔이 반쯤 미쳐 지낸다는 것은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일이다.

    이풍은 긴장감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그래서, 존귀하신 분이 여긴 어쩐 일로······?”

    “아, 살 게 있어서요!”

    “살 거요? 저한테서?”

    “응! 허풍개 의사님이 떠나실 때 남긴 물건 있잖아요?”

    뭘 말하는지는 이풍도 바로 알아들었다. 그날 허풍개가 등선한 자리에 남겨진 물건이 있다.

    “그 칼······.”

    “예, 그 칼이요! 사고 싶은데, 어때요?”

    그리 제안하며 라나는 예전 이풍의 사무실에서도 보였던 미소를 지었다.

    이풍의 딸 이바람을 언급하며, 허풍개에게 웬 영약을 복용하도록 강요할 때 지었던 예의 미소였다. 팔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가져가겠단 것일까?

    의외로, 이풍은 별로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한데 그 칼, 나한테 없어요.”

    라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요?”

    “없으니까 없지 뭘.”

    “그거 허풍개 의사님 물건이잖아요. 아저씨는 그 후계자고요.”

    “그래요.”

    “그럼 아저씨가 물려받은 거 아니에요?”

    이풍은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물려받긴 했지. 그런데 내 형님이 허풍개 의사님이었다고 알려진 순간 바로 박물관에 기증했소. 도둑 들까 봐 당장엔 공개 안 한 모양인데, 한 반년쯤 뒤에 정식으로 전시될걸.”

    라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가 따지고 들었다.

    “미쳤어요? 그 보물을 대체 왜!”

    확실히, 그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보물로 인정받는 물건이다. 사이비종교는 물론 번듯한 도가의 대문파까지 탐을 내 마땅할, 값을 따질 수 없는 도가의 성물(聖物). 도해선인의 백검(白劍).

    이풍이 말했다.

    “그야 뭐. 우리 형님도 이제 우러름 좀 받으셔야 할 거 아니요? 사람들한테 숭배 좀 받으면 좋겠단 말이야.”

    “그래서요?”

    “그런데 딱 보기에도 놀라운 그 칼을 내 방에 처박아두면 누가 보고 감탄할 수 있겠소? 그건 등선의 증거잖아. 모두가 보고 감탄할 수 있게 두는 게 나았지.”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음, 사람들이 우러르든 말든 천상에 계신 그분이야 신경 안 쓰시겠지만 난 신경 쓴단 말이야. 그래서 그랬어.”

    라나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기증 안 했어도 어차피 안 팔았겠네요. 그렇죠?”

    “암, 안 팔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라나가 다시 한번 한숨 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풍의 결정이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뭔가를 더 강요할 맘은 없어 보였다.

    라나는 그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안 괜찮지. 하지만 그 칼은 괜찮아. 내가 물려받고 싶은 건 따로 있소.”

    “그게 뭔데요?”

    “울 형님, 무적비비탄의 무공.”

    이풍이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그 안에서 굴러나온 BB탄이 번뜩였다.

    라나가 눈을 크게 떴다.

    “탄지신공을요?”

    “그래요. 내 듣기로 울 형님이 탄지공 가르친 사람은 많은데, 정작 그거 따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 무공은 이대로 사라질 텐데, 그건 너무 아깝단 말이요. 그 양반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거 아주 대단했죠. 그래서 후계자로서 그걸 재현해 보이시겠다?”

    “응. 나도 그 양반한테 배우긴 배웠으니까.”

    그 순간, 실망감에 젖어있던 라나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가 말했다.

    “훌륭한 일이에요.”

    “그렇지?”

    “그래요. 무공은 많이 전해질수록 좋은 일이죠. 훌륭한 무공일수록 더욱 그렇고요.”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칭찬받을 줄은 몰랐던 것일까. 이풍은 쑥스러운 나머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나가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아주 어려울걸요?”

    “그건 나도 아는데.”

    “정확히 얼마나 어렵냐면, 승천한 만력제가 돌아와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에요! 내 보기엔 만력제도 그거 재현 못 해요.”

    “그 정도로 어렵나?”

    “당연하죠. 무적비비탄은 절세고수였어요. 그 말도 안 되는 탄지신공은 절세고수의 증거가 분명했구요. 그 사실을 명국 무림맹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건 새외고수를 무림의 대종사로 인정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지요. 절세고수치고 전적이 안 좋았던 건 칼 든 상대한테 주먹이랑 BB탄 갖고 덤벼드는 변태라서 그랬던 거고.”

    그러니까 그 무공을 재현하는 것은 절세고수가 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어렵다는 셈이다.

    이풍이 신음하며 말했다.

    “그래도 뭐, 해봐야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요?”

    “물론.”

    라나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힘내봐요!”

    *******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

    천서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신음했다. 흰 머리가 돋아난 가운데 키마저 줄어든 자신의 모습, 그 나이는 백 살에 가까워졌다.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도 이 정도로 나이를 먹고서 젊은 몸 그대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근육이 빠져나갔고 골격마저 바뀌었다.

    여전히 노인치고는 강건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확연하게 초라해진 모습이다. 박 회장이라 불리며 한국 무림의 공포로 통하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좋은 일 하나가 있었다.

    늙은 산적의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

    이풍은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가부좌를 틀었다.

    딸의 결혼식을 마치고 온 날이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 망할 새끼, 분에 겨운 복을 받았군. 제 마누라가 수십 년, 어쩌면 백 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일 테니까.

    아니, 그런 고수를 아내로 뒀으니 결코 반항할 수가 없어서 욕을 보려나······.

    그 모든 것은 딸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아비의 망상이 아니었다. 이바람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분명 절세고수가 되리라고 여겨지는 여자 아닌가.

    하기야 그 애의 몸에는 한국에서 가장 위대했던 절세고수 둘의 기가 반씩 들어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기연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그것은 사실 이쪽도 마찬가지기는 하다. 하지만 기연을 받은 보람도 없이, 정작 이쪽의 성과는 별로······.

    그래도 할 일을 해야지.

    이풍은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몹시 피곤했지만, 그동안 제 의부를 보며 배운 바가 있었다.

    이풍은 오늘치 수련을 시작했다. 명상하여 복잡한 마음을 정리한 뒤, 눈 뜬 다음에는 손으로 수련했다.

    툭, 툭 하고. 손가락으로 BB탄을 벽에다가 튕기고 또 튕겼다. 그 손가락은 이제 굳은살로 가득했고 그리 노력한 보람이 있어 이제는 나름대로 원하는 곳에 정확히 맞히는 일이 가능했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제 아비의 그것에 견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심경을 복잡하게 했지만.

    지난 세월 비는 시간 내내 수련해왔는데, 그걸로도 부족한 걸까?

    그래도 그만둘 맘은 없다. 이풍은 무적비비탄을 기억했다. 그 손가락에서 탁, 하는 소리가 난 다음에 벌어진 기적들 또한 기억했다.

    자신 또한 그럴 수 있기를 아주 간절히 바랐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더랬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풍의 꿈은 양아비처럼 되는 것이었다. 이풍의 이름이 이풍이 아니었던, 조그맣고 방치된 소년이던 시절에서부터 그랬다.

    그러나 젠장, 재능이 부족한 탓일까. 이풍이 손가락 사이의 BB탄을 튕기자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무적비비탄의 그 소리와는 명백히 다른 소리다. 이것만으로도 그걸 따라 하려면 아직 멀었단 건 알겠다.

    그래도 약간의 가능성이나마 생긴 이제, 언젠가는 반드시······.

    수련을 마친 뒤, 또다시 손님이 찾아왔다.

    “이풍 아저씨?”

    이풍이 멈칫했다.

    “어, 아가씨. 또 왜?”

    라나였다. 그녀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해줄 소식이 하나 있어요. 잔인한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일찍 전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뭔데요?”

    “이거 봐요.”

    라나가 스마트폰을 켰다. 거기 실린 영상을 보고서 이풍은 눈을 부릅떴다.

    영상 속의 주인공은 이제 꽤 유명해진 한국의 고수였다.

    탁, 하고. 이도혁이 엄지와 검지, 중지를 써서 BB탄을 튕기고 있었다.

    그 손을 벗어난 BB탄은 양쪽의 벽에 연달아 부딪히더니 저 멀리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게 아닌가.

    이풍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중얼거렸다.

    “이도혁 그 새끼, 사무소에서 일할 때도 좆나게 연습하더라니 결국······.”

    “뭐, 정말 무적비비탄의 그 수준은 아니에요. 도망친 표적을 추격하듯 도탄이 튀거나 점혈하거나 그러진 못하더라고요. 하지만 이 정도 수준에 이른 사람조차 지금까지 없었죠.”

    그러니까 지금 무적비비탄에 가장 가까워진 남자는 저 이도혁이란 셈이었다. 그 후계자인 이풍이 아니라.

    그 사실을 곱씹더니, 이풍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라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이유가 뭐 있나?”

    “이대로라면 무적비비탄의 무공은 저 애송이의 손에 재현될 가능성이 큰데요. 무적비비탄의 무공을 물려받고 싶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이대로면 그 진정한 후계자가 되는 것은······”

    이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도혁 저 새끼가 선수 친다고 내가 그걸 못 물려받나? 우리가 일인전승 문파도 아니고, 무공이란 게 혼자만의 것은 아닐 텐데.”

    이풍이 한 번 더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됐소. 사실 슬슬 그거 그 양반만 가능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는데. 무적비비탄이 아닌 다른 사람도 흉내가 가능한 일이란 게 증명된 셈이니까.”

    “그래서요?”

    “더욱 정진하면 될 일이요. 딴 놈이 앞서가든 어쩌든 간에.”

    이풍의 말에 라나가 동의를 표하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무(武)죠.”

    라나 또한 빙그레 웃더니, 너무나도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적비비탄이 아주 잘 가르쳤군요.”

    “그 양반이야 늘 그랬지.”

    이풍이 여전히 웃는 가운데 라나가 물었다.

    “술 있어요?”

    “있는데 왜?”

    이풍이 냉장고에서 술병과 잔을 꺼내주자 라나가 술을 따랐다. 두 잔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자.”

    “응?”

    “위대한 스승에게 건배.”

    둘이서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한동안 술을 홀짝였다.

    취하다 보니 없던 용기가 생긴 모양이다. 이풍은 붉어진 얼굴로 문득 물었다.

    “그래서, 아가씬 대체 정체가 뭐요?”

    “정체라뇨?”

    “저번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나이가 하나도 안 들었네. 월녀님이 딱 이랬는데, 그렇다면 절대 외모 그대로의 나이는 아닐 테고. 그런데도 알려진 사실이 하나도 없다는 게 어째······ 우리 형님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라나가 중얼거렸다.

    “제 신분 같은 게 중요할까요?”

    “뭐, 대답 안 해주셔도······”

    “사실, 명국의 전 황제였을 수도 있죠.”

    “진짜?”

    라나가 웃었다.

    “그 황제에게 무공을 가르친 백련교 도사였을 수도 있구요. 동굴에 수백 년쯤 처박혀있다 나온 천마일 수도 있고 판타지 세계에서 거대로봇 조종하다가 다시 태어난 것일 수도 있어요.”

    “음.”

    “어느 쪽일 것 같아요?”

    라나가 생글생글 웃는 가운데, 이풍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겠군.”

    “뭘 알겠는데요?”

    “아가씨 정신연령이 딱 바람이 중학생일 때 수준인 건 알겠어. 그리 의미심장한 대사는 만화책에서나 보던 건데. 소싯적에 조커 팬이었나봐? 바람이가 영화관에서 다크나이트 보고 오더니 하던 말들이 딱······.”

    라나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죽을래요?

    이풍이 낄낄거렸다.

    *******

    술을 마셔도 너무 많이 마셨다. 이풍은 잔뜩 취한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있는 여기가 현실이 아님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각몽이었다.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앞에 떠나고 없어야 할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허풍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열다섯 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 저기 있었지만,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흐릿한 꿈속이라서일까?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기 있는 것은 제 양아비가 분명했다.

    “아버지!”

    그리고 소년 모습의 허풍개는 검지를 제 입에 가져댔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다.

    “뭘 말씀하시려고······”

    이풍이 멈춰서서 제 양아비를 바라보았다. 그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그 입은 열리지 않았다.

    허풍개는 지금 말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허풍개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손가락 사이에 영롱한 구슬 하나가 끼어있었다.

    딱 BB탄 크기의 구슬이었다.

    탁, 하고. 그것을 튕겼다. 이풍은 구슬이 날아가는 궤적과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 듯, 허풍개는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어두운 공간에 탁,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풍개가 손을 내밀었다. 이풍은 무심결에 손을 내밀었다. 구슬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나도 해보라고?”

    이풍의 말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풍은 시키는 대로 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이풍은 꿈에서 깼다.

    이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통에서 BB탄 한 알을 쥐었다.

    그것을 튕긴 순간, ‘탁’······.

    “그래, 이렇게······.”

    이풍이 웃었다. 더없이 만족스레 웃더니 저 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저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잘 지내고 계신가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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