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9화 (99/103)
  • 후일담 이풍 - [1]

    이풍은 명상을 마치고 눈을 떴다. 한숨을 쉬려다 말고 입을 크게 벌렸다.

    어······.

    놀란 나머지 그 눈이 여러 차례 껌벅였다. 웬 남자가 그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나 눈뜰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소?”

    이풍의 물음에 남자는 공손히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아니, 말을 거시지 않고 왜? 어째 발소리도 없이 여기 와선······.”

    “저 따위가 감히 수행을 방해할 순 없지요. 다시 뵈어 정말 반갑습니다, 이풍 대협.”

    이풍은 머릿속을 더듬다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누구시더라? 확실히 어디서 뵌 분 같은데.”

    “아, 저, 김지용입니다.”

    “김지용? 그건 또 누구······”

    “무림맹에서 히트맨하던 놈입니다. 저번에 무적무적자 대협께서······ 아니, 허풍개 의사님께서······”

    “무적무적자든 허풍개 의사든, 그냥 편할 대로 불러요.”

    “예, 무적무적자로 활동하시던 허풍개 의사님께 도움받은 자객 놈입니다.”

    그제야 이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났어. 박 회장이 데리고 있다더니 어떻게 명국에 오셨네?”

    “그분 덕분에요.”

    “그래서, 무림맹에서 나 담그라고 보낸 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무림맹 눈에 안 띄게 숨어지내는 판인데요.”

    이풍이 손짓했다.

    “그렇다면 됐네. 왜 왔는진 천천히 듣고, 일단 들어와요.”

    김지용은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이풍의 방에 들어섰다.

    도관의 방다운 풍경이 눈에 담겼다. 향로며 고서적 따위가 비치된 공간, 이 방의 주인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풍 이 남자는 원래 도사가 아니지 않는가?

    저번에 만난 이풍의 사무실을 떠올린 김지용은 생각했다. 그 산도적 같던 남자가 정말 도사가 됐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모산파 생활은 어떠십니까?”

    김지용의 물음에 이풍은 혀를 찼다.

    “음, 지루해 죽겠소. 몸에 안 맞아! 글쎄, 도관 영업시간엔 고기도 구워 먹으면 안 된다니까? 도사라면 채식을 하는 대외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더라구. 어차피 무림 도사들 수련하면서 닭가슴살 먹는 거 사람들 다 아는구만, 그게 뭔 쓸데없는 짓이래.”

    “그래서 불만이 많으시다는······”

    “아니, 그건 아니고.”

    이풍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 주제에 불만이 있으면 안 되지. 생각해봐요. 동네 건달들 삥뜯던 나 같은 깡패 새끼가 언제 또 도사님 소릴 들어보겠어?”

    이풍이 말하길, 이 방은 모산파가 원래 허풍개 의사가 쓰기로 한 방이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인 셈인데 이풍에게 내주었다고도.

    김지용이 물었다.

    “저도 듣긴 들었습니다. 모산파와 확실히 좋은 계약을 맺으셨다지요?”

    이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꿩 대신 닭이라고, 우리 형님이랑 계약 못 맺으니까 그 후계자라도 데려오겠단 거였지. 아무리 그래도 나 같은 똥쟁이를 데려가겠다니? 처음엔 모산파가 미쳤나 했지 뭐요.”

    김지용이 고개를 저었다.

    “모산파든 무당파든 충분히 모셔갈 만했지요. 그분 덕을 본 걸 생각하면 말입니다.”

    이풍이 씩 하고 웃었다.

    “뭐, 확실히······ 우리 형님 덕에 모산파는 대박이 났지. 모산파 무공 익힌 고수 둘이 백이십 살 넘어서까지 쭉 살아있었단 게 증명되지 않나. 심지어 그 둘이 연달아 등선하질 않나. 이번엔 반로환동하는 영상까지 공개됐으니 뭐······.

    음, 말해놓고 보니 우리 형님 공만 있다고 하긴 뭐하구만? 월녀님 공을 쳐야 하는 건 당연하고······ 인정하긴 싫은데, 박 회장 그 새끼 공도 있다 쳐야겠어.”

    이풍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김지용도 알아들었다. 박 회장과 국내의 일이 어찌 흘러갔는지는 명국에 숨어지내던 김지용도 잘 아는 바였다.

    그 모든 것이 자신에 관련된 일 아니었는가?

    *******

    소위 ‘무림인 대기업 습격 사건’이 벌어진 뒤, 그날 사건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만은 장례식 못지않았다. 언론도, 정치권과 법조계도 숨죽인 채 박 회장의 입을 지켜보았다.

    모름지기 심각한 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사건에 얽힌 자들에게 갑질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제 재계 서열 2위의 기업인이 갑질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불똥이 튀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입에서 불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범인을 혹독하게 응징하여 피해자를 만족시켜주어야 했다.

    그러나 사고를 일으킨 범인은 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그럴 대상이 없다는 게 이 경우에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검찰이든 정치인이든, 범인을 속 시원하게 처벌해버리고는 일을 잘 처리했노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후라도 처벌해야 할 텐데, 그 배후란 누구인가?

    습격의 배후를 지목하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이록 검사를 후원하던 박 회장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글쎄,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부자를 응징하겠다느니 뭐라느니 하더라구요. 듣자마자 소름이 쫙 끼쳐선······’

    ‘무림인’ ‘습격’ 두 단어가 국민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된 가운데, 졸지에 몇 달 전 녹림 사건과 거기 얽힌 관계자들이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능히 습격쯤은 지시할 법한 자들.

    심증 말고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이 경우에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죄를 씌우려는 게 아니라 기존의 죄를 들춰낼 일이었으니까.

    이 와중에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덮을 용기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여론이야 무시하더라도 재계 서열 2위의 기업인이 당한 일까지 아무 일 아니었다는 양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인이든 검찰이든 뭔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 결과 여러 의원이 불명예스럽게 당적에서 제명되었으며, 무림맹과 연이 있거나 그들에게 접대를 받은 바 있는 각계의 인사들이 대거 옷을 벗었다.

    박 회장은 월녀를 구하겠답시고 몸소 호텔에 뛰어들어 칼질한 성과를 비로소 거둔 셈이다.

    어쩌면 박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병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여기서 끝낼 셈이냐고, 자길 습격한 무림 깡패 놈은 무림맹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하지 않으냐고 고래고래 악을 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전국의 경찰들이 일제히 움직여 전국의 문파를 들쑤시는 장관을 연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분노에 미쳐 날뛰어야 했던 박 회장은 예상치 못하게도 담담했다. 그는 어떻게든 습격의 배후를 찾아내라고 요구하지도, 더 많은 무림인들을 감방에 잡아넣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체 왜?

    일부는 저 악명 높은 무림 혐오자가 호되게 얻어맞더니 드디어 겁에 질린 모양이라며 비웃었으며 다른 일부는 폭풍 속의 고요라 생각하고는 지레 겁에 질렸다.

    여전히 모두의 눈길이 쏠린 가운데, 기자들이 박 회장의 병실에 찾아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정말 이걸로 분이 다 풀렸는가? 그 극악무도한 무림 깡패에 대해 더 할 말은······.

    그리고 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깡패가 아니었어.’

    그럼 누구였나?

    ‘협객이었소.’

    그게 무슨 소린가?

    ‘허풍개 의사님이셨어.’

    기자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박 회장은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짧게, 알고 있는 사실 몇 가지를 말했을 뿐이다.

    ‘허풍개 의사님이었다고. 어릴 때 봬서 알아요.’

    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질문했다. 그 위인이 왜 당신을 패나?

    박 회장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답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고. 그러실 만한 이유가······.’

    기자들 앞에서 한 발언이었으므로 그 발언이 널리 퍼지기까지는 불과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젊은 고수 무적무적자가 허풍개란 소문이 파다하던 마당 아닌가. 스승이 저지른 사고에 충격을 받아 잠적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와 동일 인물이라 이젠 죽고 없는 것인지 몰라도 예의 젊은 고수는 사라져서 모두의 의문을 증폭시키던 마당이었다.

    몇몇 행동력 좋은 사람들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허풍개 의사의 유물 내 DNA와 젊은 고수 무적무적자의 DNA를 비교해보았다.

    그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충격 속에서 사람들은 생각했다. 당분간 기삿거리며 사극 소재가 부족할 일은 없겠구나, 하고.

    *******

    “아주 난리가 났지. 그 와중에 그날 영상도 공개됐고.”

    “그분이 등선하시는 영상 말씀이군요.”

    “그래, 번개 떨어져서 건물이 암전되더니 그 양반 사라지는 영상 말이요. 승천이네 등선이네 말이 많던데······ 모산파는 진짜 가만히 있다가 득 본 셈이지.”

    이풍의 말에 김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광고를 해도 그보다 더할 순 없었겠지요.”

    “맞아. 그날 이후 속가제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몰라. 지명도가 얼마나 늘었는지 글쎄, 올해 출간된 무협 소설들에선 모산파가 구파일방에서 빠지지 않았다더라구? 그런 식으로 여기 명국 애들이 하도 난리를 떨어준 덕분에 모산파에서도 날 여기 모셔온 거고.”

    자랑스러운 눈치로 한참 설명하던 이풍이 문득 말했다.

    “그래서 박 회장이 뜬금없이 그걸 왜 밝혔는지는 모르겠어. 내가 전화 걸어다가 대체 뭔 일 있었느냐고 하도 캐묻고 지랄해서? 그건 아닐 텐데. 아니면 박 회장 양반이 모산파 스폰서니까 본전을 찾으려고? 설마, 그건 진짜 아닐 텐데.

    애초에 허풍개 그 양반은 대체 왜 거기 쳐들어가서 지랄했을까······ 그쪽은 혹시 아나?”

    김지용이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면서 뜸 들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압니다.”

    “그럼, 말해봐요. 대체 왜 그랬대?”

    김지용이 굳은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이 얽힌 일, 그날의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모든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이풍은 잠시 침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풍이 기어이 감상을 토해냈다.

    “난 또······ 치매라도 걸려서 거길 방송국인 줄 알고 쳐들어갔나 의심했지 뭐야. 아니었다니 다행이네.”

    “저는 정말······”

    김지용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풍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 양반다우셨구만? 그래, 그 정도는 돼야 승천할 만하지. 그 정도는 되어야······.”

    이풍은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계속해서 혼잣말했다. 그가 중얼중얼하던 것을 멈춘 것은 한참 후였다.

    “정말이지 그 양반다운······ 뭐하나?”

    이풍이 말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김지용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죄송합니다.”

    김지용이 사과를 하든 말든, 이풍이 서둘러 말했다.

    “왜 그러는진 알겠는데 빨리 일어나요. 나 가뜩이나 전직 깡패라서 도관 생활하기 눈치 보이거든? 누구 무릎 꿇린 상황이 걸리면 아주 이미지 좆되는 거야.”

    “그렇다면 사람 없는 곳에 가서······”

    김지용의 말에 이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왜, 욕이라도 처먹으려고 찾아오셨나?”

    김지용이 물었다.

    “그러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내가 그래야 하나?”

    김지용은 양아들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뻔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엔 그래야 했다. 허풍개 의사가 모산파와의 계약마저 포기하고 떠나버린 게 누구 탓인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그 떠남을 죽음이라고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승천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세상을 떠난 것은 분명한 일이다.

    양아비의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기 버금가는 대우를 받으리라 예상했는데······.

    김지용은 이 모든 생각을 간추려 중얼거렸다.

    “화라도 내실 줄 알았습니다마는.”

    이풍은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음, 딸내미한텐 화낼 뻔했지.”

    김지용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물었다.

    “따님한테요?”

    “난 뉴스 보면서 얼빠져 있는데, 그 기지배는 왠지 몸이 엄청 가뿐하고 머리가 맑아졌다면서 좋아하더라구? 니년은 할애비 기 빨아먹어서 좋으냐며 소리 지를 뻔한 거 겨우 참았어.”

    애꿎은 화풀이를 할 뻔했단 소리다. 그 역시 자신 탓이었으므로 김지용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풍이 계속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꾹 참고 생각을 정리해보니 막 울고불고할 필요는 없겠더라구.”

    “어째섭니까?”

    “그래봤자 아무도 이득 볼 게 없으니까.”

    그건 또 뭔 소리인가.

    “이득이라 하심은······”

    “왜, 자기가 떠나고서 남은 사람들이 후회하고 슬퍼하길 바라는 건 너무 사춘기적인 발상이잖소? 우리 형님이 나이에 맞지 않게 유치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 정도로 애새끼는 아니었어. 내가 여기서 질질 짠다고 저 하늘에서 딱히 흡족해하진 않을걸. 게다가······”

    이풍은 고개를 들어 저 위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양반이 등선한 게 아니라 죽은 거라 치면, 나한텐 슬픈 일이고 그 양반한텐 안된 일이니까······. 등선한 거로 쳐야 나한텐 기쁘고 그 양반한테도 기쁜 일이 되잖나?”

    이풍이 히죽 웃었다.

    “그럼 뭐, 그냥 기뻐하기로 했소.”

    김지용은 잠시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건달들에게서 수금 받으며 살던 이 남자가 모산파에 입적하더니 그새 수양을 쌓았나? 설마.

    김지용이 알기로 이풍이 모산파에 들어온 것은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저 남자는 그 누구보다도 도사 같아 보인다.

    이풍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욕 뒤지게 처먹는 거 말곤 찾아온 이유가 또 없나?”

    “없습니다.”

    “왜, 나처럼 도사 될 생각은 없으신가?”

    “그건······ 안 되겠군요.”

    “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언젠간 다시 만나야······”

    “누구? 혹시 여친인가? 그렇다면야 도사 노릇일랑 하면 안 되지, 암.”

    김지용은 킬킬거리는 이풍에게 깊이 고개 숙인 뒤, 뒤돌아서서 떠나갔다.

    이풍은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인 손님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불현듯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 병을 꺼냈다. 입속에 쏟아붓듯 내용물을 삼켜대다가, 가슴을 붙잡고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

    역시, 안주도 없이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끔찍한 속쓰림 속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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