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7화 (97/103)
  • 허풍개 - [6]

    많은 작품에서 불로영생의 허망함을 설파하곤 한다. 영원이란 공허하며 필멸의 삶이야말로 찬란하고 가치 있노라고.

    허풍개는 그런 부류의 주장을 좋아한 적이 없다. 영원히 살아보긴커녕 백 년도 못 살아본 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겪어보지 못한 것을 깎아내리나?

    그것은 이솝우화의 여우가 보는 포도와 같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라. 그것이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이카루스의 신화를 지어 하늘을 향한 도전을 허망하다며 비웃었지만, 모두의 비행이 가능해진 이제 그 누가 그것을 비웃는가?

    불로영생 또한 일단 달성된 후에는 그것을 질투하거나 폄하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리 생각해왔지만, 결국에는 포도를 먹지 못하게 된 지금 아닌가. 자신도 그놈의 포도가 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포도가 신 이유를 자신에게 이해시키려 애썼다.

    너무 오래 살면 삶의 모든 것이 지겨워져서 고통이 되니까······ 그 마교 기지배는 나보다 훨씬 오래 산 것 같지만 아직도 인생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던데.

    신음하던 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래, 여기 계속 있으면 그녀들을 못 보겠군. 그건 확실히 좋지 못한 일이다.

    그녀들을 만나러 내가 간다.

    *******

    계속 걸으니 또다시 가로막는 이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무림인들이었고 모두 고수였다. 한 명 한 명의 몸값이 천억이 넘는 거물들, 절세고수도 그들 앞에서 긴장해야 할 고수 셋이었다.

    박 회장의 무공 사부들이 저 앞을 막고 있었다.

    남궁세가 출신의 사부가 포권하여 예를 취해왔다.

    “무적비비탄 대협.”

    허풍개는 그리 예를 표할 기력도 없었다. 물끄러미 저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몇 달 전에도 만났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달리 모두 칼이며 봉 따위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장 노사도 길쭉한 태극검 한 자루를 들었다. 기어이 제자를 편들려고?

    그게 아니란 사실을 곧 깨달았다. 이쪽을 도와주려는 모양이지.

    다른 두 노인네를 여기 데리고 온 것은 아마 장 노사일 것이다. 저번에 만났을 때 그랬듯, 저 노인네들이 박 회장과 함께 덤벼들면 결코 당해낼 수 없을 테니까. 따로따로 각개격파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허풍개는 생각했다. 잠시 저들과 눈싸움이라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할까?

    아니다. 너무 오래 걸었던 탓에 서 있기조차 힘겹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허풍개가 저벅저벅 저 앞으로 걸어갔다. 남궁 출신의 사부를 향해서였다. 다른 두 무공 사부는 그 양옆을 지키고 섰다.

    허풍개가 남궁 출신 사부의 앞에 도달했다. 팔을 뻗어 공격하는 척하다가 보법을 밟아 옆으로 움직였다.

    남궁 출신 사부의 옆구리를 노린 채 손바닥을 뻗었다.

    이때 남궁 출신 사부는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옆에 서있는 장 노사가 지켜주리라 생각한 걸까? 본인은 역으로 칼을 휘둘러왔다. 신속하고도 단호한 반격.

    “어, 잠깐······”

    그러나 장 노사는 뭔가 당황한 척 허우적대며 뒷걸음질 쳤다. 결국 뻗어나간 주먹은 그대로 남궁 출신 사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억······.”

    그 입에서 거센 침이 튀겼다. 옆구리를 강타한 충격이 칼질하던 몸을 굳게 만들었다.

    허풍개의 이후 동작 또한 신속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궁 출신 사부의 턱과 가슴을 연달아 두들겼다. 그 몸이 비틀거리더니 쓰러져는 대자로 뻗었다.

    순식간에 한 명 쓰러뜨린 다음, 옆에 선 소림 출신 사부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나한승 출신이랬나? 그는 동료 한 명이 쓰러진 와중에도 기습하려 들지 않았다. 하기야 명문 정파 소림의 일원으로서 여럿이서 덤벼드는 식으로 비겁하게 굴기는 싫었으리라.

    나한승이 기품 있게 뒷걸음질 쳤다.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는 합장했다.

    환갑밖에 안 된 놈, 이쪽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답게도 예를 차리는 와중에마저 그 눈에 투쟁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나한승이 말했다.

    “제자 분의 위명이 요새 아주 자자하더군요. 가르친 이의 실력도 기대해볼 만하겠습디다.”

    “그래서.”

    “스승 쪽은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보지요.”

    나한승의 손에 들린 봉이 회전했다. 봉술을 연마한 자들이 허세를 부릴 때 선보이기 좋아하는 동작이지만 소림승이 구사하면 그마저도 가공할 무공인 법이다.

    좁아터진 공간에 바람이 불어닥쳤다. 회전하는 봉이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폭풍이 부는 듯 거센소리가 귀를 울렸다. 한 자루 봉이 저 앞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허풍개는 그 소용돌이를 멀거니 바라보더니, 천천히 그 앞에 다가갔다.

    “내가 더 세.”

    몸이 피곤한 와중에도 머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지금 자신의 눈에 저 소용돌이는 연속된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불연속적인 동작 여러 번에 불과했다.

    휙 하고 뻗어나간 손이 회전하는 봉의 틈새에 파고들었다.

    나한승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인 순간, 허풍개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을 붙잡은 그대로, 쾅. 바닥에 내리꽂았다.

    낙법을 취하고 어쩌고 할 수도 없었다. 바닥에 두들겨진 나한승의 몸이 반탄력에 한 차례 떠올렸다가 도로 추락했다.

    소림 철포삼을 익힌 나한승이다. 이 정도로 크게 다치리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둘이 쓰러진 가운데 장 노사는 칼을 뽑아 들고서 태극검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허풍개는 저 중에서 저 노인이 제일 고수란 걸 알고 있었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둘이 확실히 정신을 잃은 걸 확인한 다음, 자신의 입 모양이 읽히지 않도록 신경 쓰며 말했다.

    “싸워서 쓰러뜨린 척해줄까.”

    장 노사는 작게 대답했다.

    “그래 주시면 고맙지요, 어르신. 수고를 끼쳐 죄송할 뿐입니다.”

    약간의 공방을 주고받는 연출 끝에 장 노사는 오래 버티지 않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허풍개가 그 옆을 지나가려니, 장 노사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모서리 돌아가면 화물 승강기가 가동 중입니다. 우리도 그걸로 내려왔어요.”

    참으로 고마운 정보였다. 방금 조금 몸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지쳐버려서 저 셋 옆에 누워버리고 싶은 참이었는데.

    알려준 쪽으로 걸어가는 중에 장 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고맙······ 원래는 내가 해야 할······”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속 나아갔다.

    저 위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

    승강기에서 내린 그곳에 박 회장이 있었다.

    이 꼭대기 층 전체가 그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무림인들을 습격하기 위해 특별주문한 장비도 모두 이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혼잔가?”

    허풍개의 물음에 박 회장이 대답했다.

    “남들 앞에서 노인네 베어 죽이는 건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천잠사로 만들어진 전신복에 상반신과 사지를 뒤덮는 군용 보호구, 심지어 칼까지 움켜쥔 완전무장한 차림으로 박 회장은 허풍개를 노려보았다.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도 열불이 뻗쳤던 모양이다. 그 입에서 초저주파 섞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다들 도움도 못 되지. 하여간 좆같은 새끼들. 씨발 새끼······.”

    허풍개는 그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나쁜 말 쓰지 마라, 자식아.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점잖은 말 써야 할 것 아니냐.”

    박 회장은 그 말을 조롱으로 받아들였다. 버럭 소리 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충혈된 그 눈에 허풍개의 얼굴이 담겼다. 직접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지 그 눈이 몇 차례 감겼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박 회장이 중얼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늙었군. 아니······ 아까 봤을 때보다 더 늙은 것 같은데.”

    허풍개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는 중 진기가 죄다 소실되었나 보지. 보톡스 역할을 하던 기들이 빠져나간 얼굴은 처참할 것이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내가 백이십 살인 게 실감되나 보지. 그럼 공손히 좀 굴어봐라, 쌍놈아. 네 아비만 해도 나한테 예를 차렸다.”

    박 회장은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안다. 박 회장의 아비와 허풍개는 그 친분이 위인전에도 새겨진 사이였다.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리는 박 회장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참 오래된 인연 아닌가.

    저 남자가 태어난 뒤, 양생을 위해 무공을 갈고닦을 수 있도록 그 몸의 혈도를 뚫어준 것도 자신이었다. 단순히 오래되기로만 따지면 이풍과의 관계보다도 오래된 셈이다. 칠십 년 넘게 지속해온 인연이니.

    허풍개는 육십 년 전, 웬 무림인이 개 한 마리를 죽인 다음 날, 그 개를 묻고 장례를 치러주며 본 소년을 기억했다. 무림인을 다 죽여버릴 거니 뭐니 맹세했었지 아마.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에는 개 한 마리 죽었다고 질질 짜는 걸 보니 참으로 어린애답다고 생각했다. 몇 달쯤 지나면 금세 그 슬픔을 잊고는 지겨운 무공 수련 따윈 설렁설렁하면서 제 즐거움을 찾아 나서리라고도.

    그 소년이 자라서까지 그날의 맹세를 이어나가려 할 줄은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그래요, 울 아부지가 봇짐 장사할 때부터 참 많이도 도와주셨다지. 그래서 난 왜 이렇게까지 방해하는 거요?”

    박 회장의 물음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니 하는 꼴을 보면서 말해라.”

    “내가 뭐 어떻다고.”

    “네가 원래 반쯤 미쳐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육 년 전에, 나 보고 방송국 습격하라 사주할 때만 해도 무고한 사람까지 해칠 생각은 없었지 않으냐. 당시에도 그런 맘이 있었다면 내가 아니라 강남제일검 같은 놈을 고용해서 죄다 베어버리라고 했을 테지.”

    박 회장은 변명하려다 말고 신음했다. 그러고 보면 의도치 않게 사람을 때려죽여 기소된 탓에 활동을 그만둬야 했던 것도 최근 오 년 사이에 있던 일이다.

    또다시 귓가에 들려오는 구자성의 목소리를 입술을 깨물어 쫓아냈다. 박 회장이 말했다.

    “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요. 손 좀 더럽히는 한이 있더라도 완성 시키려는 거지.”

    “완성시켜? 뭐를.”

    “내 인생의 의미와 그 목적을 말이야.”

    허풍개가 혀를 찼다.

    “병신 같은 소리를.”

    “뭐?”

    “삶에 완성이며 미완성이 어딨나? 남 보여주려고 사는 게 아니다. 멍청한 놈.”

    박 회장이 물었다.

    “그럼 왜 사나?”

    “그냥 사는 거지.”

    “밥 먹고 똥 싸려고?”

    허풍개가 히죽거렸다.

    “살아보면 안다, 꼬맹아.”

    평소 저 노인네는 웃거나 찡그리는 법이 거의 없다. 워낙에 보기 드문 그 표정 변화를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박 회장이 그 얼굴을 뻔히 바라보는 가운데, 그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게 뭔가?

    빌어먹을, 금속 BB탄이다. 이 고약한 노인네가 기어이 손가락을 튕겼다.

    불의의 기습에 대비되어 있지 않았던 박 회장은 황급히 손을 휘둘러야 했다. 겨우겨우 그것을 잡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다시 그 얼굴을 바라보니 허풍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박 회장이 이를 악물었다. 연속으로 공격해오지 않고 뻔히 바라만 보는 저 태도마저도 자신을 화나게 만든다.

    “개좆같은 노인네가 끝―까―지―!”

    박 회장이 달려들었다.

    이 미터가 넘는 몸뚱이가 시야를 가득 채운 가운데, 앞세운 칼이 흉흉한 자색으로 번뜩였다.

    그에 맞서 허풍개는 멀거니 서 있었다. BB탄이라도 하나 날려 그 돌격을 저지하자니 손가락에 힘이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관절을 지나치게 혹사한 탓이다.

    그래도 저 무뢰배를 매질할 기력은 남았다.

    박 회장이 코앞까지 다가와 칼을 휘두른 그 순간에야 허풍개는 자세를 취했다. 백 년 넘게 펼쳐왔기에 마치 똑바로 선 자세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모산 태극권의 자세였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