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4화 (94/103)

허풍개 - [3]

통화를 마친 박 회장이 거친 숨을 쉬었다.

그 눈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그 꼴을 보며 장 노사는 속으로 자책했다. 이 멍청한 늙은이. 일을 똑바로 처리하기는커녕 기껏 일을 말리려던 그자까지 욕볼 수 있게 하다니?

통화 중에 여러 충격적인 사실, 그러니까 그 젊어 보이던 고수가 사실 명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백이십 살 위인이라느니, 심지어 무적비비탄과도 동일 인물이라느니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박 회장이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자칫하면 또 일이 망가질 뻔했군요. 그런데 허풍개 그놈 여기 남아선 뭔 헛짓을 할지 몰라······ 그냥 오늘 바로 모산파에 보내버릴까? 내일 모산파에 도착 안 했단 말이 들려오면 바로 협박을 실행에 옮기겠노라 윽박지르고······”

장 노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모든 일을 꾸몄나?”

“그만.”

“정말로 여러 명 죽일 계획이야? 그놈의 자네 숙원을 위해서?”

박 회장이 눈을 흘겼다. 그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요. 왜, 경찰 가서 꼰지를 겁니까?”

“내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건가?”

박 회장이 말을 흐렸다.

“글쎄요, 어쩔 것 같습니까? 이 불학무식한 제자가, 밀고하는 배신자를 어찌 대할까요······”

장 노사가 애원했다.

“제발, 그런 몹쓸 말 좀 하지 말게. 대체 왜 그러는 건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절 십 대부터 가르쳐왔으면서 뭘 모르는 척하십니까. 제 지난 모든 삶이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는데요.”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러나!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미친 짓을 해? 그런다고 누가 칭찬이라도 해줄 것 같나······”

박 회장이 한숨 쉬더니 물었다.

“거미에 대해 좀 아십니까.”

“거미?”

“암컷이 크고 강하지요. 교미 끝에 수컷은 배고픈 암컷에게 잡아먹혀요. 수컷들도 그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도 왜 교미를 하려고 하나?”

“뒷생각 안 하고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나 보지. 꼬추 달린 새끼들이 흔히 그렇듯.”

장 노사의 말에 박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수컷 거미의 짝짓기엔 아무런 즐거움이 없어요. 더듬이로 정자 주머니를 암컷 생식기에 운반하곤 끝이거든. 그렇듯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 대체 왜 죽음의 위협까지 무릅쓸까요? 왜 쫄래쫄래 암컷에게 다가가겠습니까?

유전자가 그러라고 명령하기 때문이요. 제 유전자를 복제하는 임무를 다하기 전엔 제 삶이 완성되지 않았단 걸 아는 거야.”

“이보게.”

“내 삶을 완성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압니다. 나도 늙었어요. 이 이상 더 미룰 수도 없어. 내 삶을 미완성으로 끝나게 두진 않을 거요.”

장 노사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박 회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는 데 익숙한 남자였다.

“내 일을 망치는 건, 내 인생을 망치는 셈이요. 이 천서인의 인생을 망치려 들면······ 두고 보십시오. 당신이 그랬는지 허풍개 그 새끼가 그랬는지 모르니까 둘 모두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

박 회장은 당신 헛짓거리로 그 새끼마저 좆되는 걸 보고 싶으면 어디 그래보라고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그러더니 주먹을 움켜쥐고는 방을 나섰다.

*******

허풍개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머리가 어지럽다.

죽음의 공포가 머리를 뒤덮는다.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스트레스가 오히려 심신을 망쳐버리듯, 이 죽음의 공포는 올바로 생존만을 위해 작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죽음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나머지 남의 죽음에도 몰입하게 만드는 정신병으로 작용한다.

이번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자들의 죽음이다.

한 명만이 아닌, 여럿의 죽음. 그래서 제 죽음만큼이나 처절하게 느껴지는 죽음······.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들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꽤 있다는 것이 이 경우에는 오히려 더욱 질이 나쁘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인 것처럼 느껴지니까.

막아야한다면, 어떻게?

무림맹에 상의하는 게 어떨까. 몇몇 고수들을 파티에 몰래 참가시키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고수들이 우연히 총격을 막아낸 것처럼 꾸미면 박 회장은 의심스러워도 어찌 항의하지 못할지 모른다.

제기랄, 말도 안 되는 방법이다. 파티 참여를 위해선 초대장이 필요하거니와 무림맹에는 박 회장의 스파이들이 널렸다. 그 까닭에 처음부터 무림맹에 연락하겠단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황군에 가보는 건 어떨까. 부령이던 홍나연은 퇴직해버렸지만 나름 안면을 익혀둔 몇몇 황군 병사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 파티에 참여시키면 어떨까.

하지만 주말 파티까지는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고작 안면만 있는 자들에게 총기 난사를 막아달라고 요구하긴 어려울까?

될지 안 될지 모를 방법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누구부터 만나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놈의 공포를 가라앉힐 수 있을까, 그놈의 협박이 실행에 옮겨지는 일 없이······.

“안에 계십니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허풍개가 나가보니 웬 양복쟁이 하나가 서 있었다.

“이률 선생님이시지요?”

양복쟁이의 물음에 허풍개가 눈매를 좁혔다.

“그런데. 누구요?”

양복쟁이는 공손히도 대답했다.

“천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장쑤성 모산파에 가신다던데요. 거기까지 모셔드리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우선은 공항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타시지요.”

허풍개는 반쯤 감긴 눈으로 양복쟁이를 노려보았다. 그는 체내에 내공 하나 없는 전형적인 회사원이었다.

당연히도 절세고수를 위협할 능력은 전혀 없다. 심지어 품에 총 한 자루 넣고 왔더라도 그렇다.

그런데도 허풍개는 그 양복쟁이에게서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박 회장이 보냈다고? 그렇다면 무시했다간 좋은 일이 생길 일이 없다. 당장 가지 않으면 좆될 거란 협박 같은데.

헛짓할 시간은 주지 않겠다 이거지.

허풍개는 저놈을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야 하나, 그러지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을 미치게 하는, 이 죽음의 공포를 가라앉힐 방법이었다.

그래, 결국 자신의 모든 행동 원리는 그놈의 공포뿐인 셈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이상, 이 머리를 잠식해버린 갈등을 그만두려면 차라리······.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갑시다.”

*******

박 회장은 김지용을 노려보았다.

“더러운 자객 새끼가 발버둥을 쳐? 전혀 관계없는 사람한테 도움이나 청하고, 비겁하게······”

김지용은 살려면 뭔 짓을 못 하겠느냐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박 회장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살기가 그 몸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박 회장이 물었다.

“일 끝나면 풀어줄 거란 말을 안 믿는구나. 그렇지?”

김지용이 입 다문 가운데, 박 회장은 계속해서 혼자 말했다.

“약속을 못 믿겠다면, 우리 게임을 하지.”

김지용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게임, 말씀하십니까? 어, 떤······?”

박 회장이 말했다.

“그날 네게 기관단총을 줄 거다. 일 분에 구백 발은 발사하는 물건이야. 절세고수는 총알에도 반응하니 뭐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앞에서 무사하긴 어렵지. 그걸 나한테 쏴.

그 자리에서 난 이록 뒤에 서 있을 거다. 그대로 갈겨버려. 날 죽이면, 넌 살 수 있다. 그러고서 감옥에 끌려가겠지만 뭐······ 넌 이미 사람 수십 명 담근 도살자 새끼 아니냐. 목숨 건지는 대가로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미친 소리, 미친 제안이었다. 김지용은 절망감 속에서 생각했다.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만약 제가 못 그러면······”

“날 못 죽이면? 그럼 널 내가 죽인다. 아주 공평한 결투인 셈이지. 안 그러냐? 이렇게 말해줘도 의욕이 없을까 봐 참고로 말해주자면, 네 애인이 아직도 널 찾아다닌다던데······ 아주 지극정성이야.”

김지용은 극심한 공포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

“제 여친 얘기는, 지금 왜?”

“글쎄, 그 얘기를 지금 왜 할까?”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말하면서 박 회장은 웃었다. 힘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거기 내포된 의미만으로도 상대를 겁먹게 할 수 있는 미소였다.

그 의도대로 상대방의 감정이 요동치는 가운데, 박 회장 자신의 속도 편하지는 않았다.

구자성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이렇게 훌륭한 무림인이 한국에 또 있을까? 무림의 자랑스러운 후배야, 이 선배에게 인사를······’

*******

「먼저 모산파 가셨다고? 다 같이 비행기로 가시지 왜?」

“용무가 있어.”

「그럼 계약은요. 그 자리에서 바로 할 거요?」

“아니. 너 오면 그때 하지.”

「그래요? 그런데 왜 그리 힘이 없어요? 어디 아파?」

“아니.”

이풍과의 통료를 마친 뒤, 허풍개는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미리 온다는 말을 들었는지 모산파에서는 자신을 위한 방을 비워주었다.

모산파의 도관에서도 가장 조용한 방이 자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기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덕분에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다. 언제나 시끄러운 이풍도, 염치없는 김지용도, 미쳐버린 박 회장도 모두.

허풍개는 혼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백이십 살 허풍개는 침묵하고 있다. 그 늙은 도사는 지금 중립이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리고 협객 무적비비탄은 당장 한국에 돌아가서 협행을 완수하라고 말하고 있다. 무적비비탄은 단 한 번도 도움을 청한 누군가를 무시해본 적이 없다. 그래온 관성을 이어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무적무적자는······.

이곳 모산파에서의 미래를 떠올렸다.

자신을 위한 미래가 이곳에 펼쳐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평온한 곳에서 수련을 거듭하면 기어이 불로영생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즐거움마저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동경하던 정파 무림인으로서의 목가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수련의 목적을 달성한다면 더는 벽곡이니 동자공이니 하는 것에 목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난 백 년간 포기한 모든 것을 다시 누려볼 수 있으리라.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김지용과 검사 새끼, 그리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몇몇 사람들과, 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하는 이 지긋지긋한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제기랄,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잡생각이 너무 많은 나머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명상 중 들려온 외부의 소리에 반응하고 말았다.

눈을 뜬 허풍개는 자기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콱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받았다.

「아, 이제야 전화 받으시네요? 그동안 아무리 전화 걸어도 안 받으시더니」

이도혁의 목소리, 반가움이 넘쳐흘렀다. 허풍개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수련하느라 바빠서 못 받았지.”

「여전하시네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허풍개는 자신의 목소리가 태연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물었다.

“그래서, 박 회장이 파티 연다던데. 그쪽은 그날 경비 서나?”

「아뇨! 저 그날 휴가입니다! 공 세워서 포상받았거든요!」

그건 좀 잘 됐군. 사건이 벌어져도 휘말리거나 책임질 일이 없다는 셈이니까. 박 회장이 이 부분에선 배려해준 모양이지.

허풍개가 안심하는 가운데 이도혁이 계속 말했다.

「마침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왜 포상을 받았느냐면······ 사람 하나를 구해냈거든요!」

“사람 구했다니, 이록?”

「예, 가르쳐주신 탄지공으로 살려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역시 선생님께서 살리신 거나 다름없어요!」

허풍개는 생각했다. 기껏 그 남자를 살려낸 의미가 무엇일까.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더 쓸모 있게 죽게 하는 것?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혁이 말을 이었다.

「제가 해낸 일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기분이 끝내줍니다. 이 기분을 영원토록 만끽하고 싶어요. 무공 익혀서 협객 말고도 보람찬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시더니, 그 말씀이 정말 맞았어요」

이후로도 이도혁은 계속해서 감사를 표했다.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하다고, 이 일에 넣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그 맘에서 우러난 게 분명한 기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의협심 넘치는 청년은 확실히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허풍개가 중얼거렸다.

“그래. 잘됐네.”

통화를 마친 뒤, 한동안 허풍개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와서는 박애진을 불러 말했다.

“그 칼 있잖습니까.”

무슨 칼을 말하는지 박애진도 알았다.

“아, 맡겨두신 칼이요?”

“그것 좀 가져와 주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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