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3화 (93/103)
  • 허풍개 - [2]

    이번 암살미수 사건은 기사로도 나왔다.

    박 회장은 그 기사를 확인했다. 제목부터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록 검사 암살 미수, 자작극 의심 (···)」

    의외로 박 회장의 반응은 덤덤했다.

    음, 그래.

    이 정도로는 별로 자극되지 않는단 말이지.

    하기야 반(反) 범죄 검사가 살해당하여 전 국민적 분노가 야기되는 것은 너무 유명한 일 아닌가.

    그런 사건에서 비롯된 영화도 여럿 나온 마당이다. 그런 일이 한국에서 또 일어나리라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일이리라.

    뭐, 그런 식으로 의심해도 상관없다. 의심하기엔 너무 충격적인 일을 던져주면 그만이니.

    네가 꾸민 일이 아니냐고 묻는 것조차 너무나 큰 무례로 여겨질 만한 일을······.

    *******

    허풍개는 박 회장의 회사 건물을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은 저 마천루, 올려다보자니 고개가 다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김지용은 저 꼭대기 층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 사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저번에 이 건물에 찾아왔을 때 슬쩍 봐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하나?

    야근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 와중이다. 들키지 않고 저기까지 도달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허풍개는 대충 우의로 몸을 가리고는 창턱을 밟고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고생스레 도달한 그곳에 김지용이 갇혀있었다. 벽 너머의 기를 보니 분명했다.

    하지만 제기랄, 창문에는 창살까지 달려있었다. 군용 폭약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이 벽을 뚫고 내부의 김지용을 꺼내기는 불가능했다.

    “거기, 김지용이 있나.”

    허풍개가 창문을 살짝 열고는 말을 걸었다.

    김지용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적무적자 선생님?”

    “살려달라고 연락했지.”

    “예, 예!”

    “뭔 소린지 말해봐.”

    김지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 회장이 절 죽이려 합니다.”

    “뭐?”

    “제 손으로, 여럿 죽이게 시키려고 해요.”

    *******

    허풍개는 집에 돌아온 뒤로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 탓에 수련할 정신조차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늘 김지용을 찾아가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박 회장이 저한테, 총기 하나 들려주고, 파티에 난입해서 웬 남자를 죽이라고······’

    김지용은 박 회장이 자신에게 시키려는 일을 털어놓았다. 그 일에 자신의 추측을 섞어 말했다.

    박 회장이 자신을 통해 무슨 일을 꾸미려 한다고. 그리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죽게 되리라고.

    대충 어떤 음모인지는 대충 들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허풍개는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았다. 그래서 음모라는 것이 대충 어떤 틀로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몇몇 음모는 아주 창의적인 듯 보이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만 그렇다. 그 큰 틀은 기존에 있던 방식의 반복이기 마련이다.

    무림맹 제일의 자객 김지용과 박 회장······. 둘을 연관 짓고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몇 달 전, 박 회장은 무림맹이 투자한 영화 촬영 중에 난입했다. 대낮에 공개적으로 습격하고는 무림맹 위원 고진철을 납치하려 했다.

    무림을 증오하는 박 회장다운 행동이었지만, 나름대로 득실을 따지는 그답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박 회장은 고작 무협 영화 하나를 망치거나 끈 떨어진 위원 하나를 해친들 무림맹에 아무런 악영향이 없으리란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 회장은 굳이 그런 일을 벌였다. 몸소 출동하여 얼굴을 공개하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그것은 분명 그 일로 말미암아 꾸미는 일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 뜬금없이 무림맹에 시비를 걸 이유가 뭔가. 무림맹이 보복해오게 만들어서는 역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무림맹이 보복해오리란 개연성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쪽에 누군가가 공격해왔을 때, 그걸 무림맹의 복수라고 주장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무림맹을 배후로 설정한 자작극을 벌였을 때, 그게 더욱 그럴듯해 보이기 위한······.

    ‘박 회장이 당신 보고 누굴 죽이라고 했지?’

    허풍개의 물음에 김지용이 대답했더랬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방에 가둬놓고선 목표물 사진만 보여줬어요. 기관단총 한 자루 줄 테니 확 갈겨버리라고······ 그러고 나면 명국에 풀어주겠다는데요. 아무리 봐도 그런 짓을 벌이고도 멀쩡히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아마 그 추측이 옳을 것이다. 그 일을 벌인 결과 김지용은 죽을 것이다. 일을 꾸민 박 회장으로서는 그가 확실히 입 다물게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래서 최소한 사람 둘이 죽게 될 지금, 자신은 뭘 어째야 하는가?

    *******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허풍개가 전화를 걸었다.

    바로 박 회장에게 따지고 묻지는 않았다. 우선은 박 회장의 주변 사람에게 이 일을 알리기로 했다.

    「어, 그래. 무적무적자 자네가 어쩐 일로?」

    수화기 너머 장 노사가 전화를 받았다.

    무당파 출신 고수인 그는 박 회장의 무공 사부로, 가장 오랜 세월 박 회장의 곁에 있던 진정한 그의 스승이다. 만약 박 회장을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저뿐이리라.

    약간의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허풍개는 기어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받은 장 노사는 당황했다.

    「박 회장이 요새 수상하지 않느냐고?」

    “뭔가 꾸미는 기색이 없습니까.”

    「꾸민다니」

    “왜, 어디 강대국에서 약소국을 침공할 때는 명분을 마련하려 하지 않습니까. 약소국은 강대국을 감히 건드리려 하지 않으니까, 명분을 마련하는 방식은 대개 자작극이고요. 제 손으로 같은 편을 해쳐서, 자국의 모두를 격분케 하는······.”

    「난 잘······」

    “지금 박 회장은 김지용이란 자객 하나를 억류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림맹 최고의 자객이고, 경찰은 이미 그가 무림맹 소속이란 증거를 확보해둔 마당이지요. 그리고 요새 이록이라는 검사 양반이 유명하더군요.”

    「아, 그 친구? 나도 그 친구 아는데 이번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을걸? 그것도 우리 회장이 붙여준 친구가 구해냈어. 그 친구가 바로······」

    “이번엔 살아난 걸 기어이 죽이려 들 모양입니다.”

    장 노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김지용한테 시켜서?」

    “예. 말도 안 되는 일 같습니까?”

    장 노사는 조금 머뭇거린 끝에 대답했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싶군」

    허풍개가 기다리는 가운데 장노사가 말을 이었다.

    「리우이 알지? 화산파 그 친구 있잖나」

    “압니다. 회장님한테 화산 무공 가르친 분 아닙니까.”

    「그 친구가 화산파 가서 안 돌아오잖나. 그러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처음엔 대답을 안 해. 이상하다 싶더라구. 요새 기운도 차렸겠다, 아직 은퇴할 나이가 아닌데 왜 이렇게 훌륭한 직장으로 안 돌아오느냐? 막 캐물으니까 겨우 대답하던데, 그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글쎄요.”

    「기차에서 웬 암살자를 만났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 자네도 그 장소에 있었다지······ 그 암살자가 혹시 우리 회장이 보낸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거야」

    “박 회장의 측근을 노린 무림맹의 범행인 척해서, 경찰이든 화산파든 자극하기 위한?”

    「정확힌 모르지. 혹시 정말 그렇단 게 드러날까 봐 굳이 흉수를 확인할 맘도 들지 않았다더군. 확실히 그리 의심할 만했어. 당시에 우리 회장 양반, 하는 일이 제대로 안 풀리니까 반쯤 미쳐있었거든? 누가 죽어야 일이 제대로 풀리려나 어쩌나 하면서······

    그래도 얼마 전까진 기분이 좋아 보이고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는데, 요새는 또······.」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의심은 아니라 이거지요.”

    「그래, 내가 한번 확인해보지」

    장 노사가 전화를 끊은 뒤, 허풍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지금?

    이제 곧 모산파로 떠날 상황이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접을 기회였는데.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쪽에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 후였다. 장 노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박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또 알지?」

    수화기를 통해서도 전해져오는 초저주파, 성난 맹수의 울음소리.

    “글쎄.”

    「누가 또 아냐구? 누가 전해준 거야? 벌써 다 까발리고 다녔나?」

    “아직은. 장웨이 그 친구한테 확인 전화 걸어본 것 말곤 없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도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다고, 그러니 당신도 누구도 손해 보지 않은 지금 그만두라고.

    그러나 박 회장은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다면 좋군. 이대로 계속할 수 있단 의미니까」

    “이봐, 회장님 당신. 경고하는데······”

    「나야말로 경고하지. 허풍개 의사님? 입 다물어」

    박 회장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중후한 내공을 쌓은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위치에서도 비롯된 것이다.

    허풍개는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싫다면?”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인 비웃음.

    「요즘 상당히 잘 나가시는데, 그렇다고 재벌 총수랑 맞먹을 수 있으리라 믿는 건 아니시겠지? 게다가······」

    허풍개도 감히 그러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쪽이 꿇린다는 걸 아니까 저놈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는 애매하기 그지없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존대했다가 하대했다가 하면서, 그 비위에 거슬릴 만한 발언은 삼가곤 했다.

    박 회장이 계속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말이요, 당신 약점을 갖고 있어. 당신 반로환동하는 영상을 내가 갖고 있다구. 방송국 습격한 씨발 놈의 무림인과 당신이 동일 인물이란 증거를 갖고 있단 말이야」

    이미 여러 번 들어본 협박이었다. 그때마다 위협을 느끼게 되는 협박이기도 했다.

    「요샌 댁이 젊음을 되찾은 허풍개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돈다지? 혹시라도 이번 일을 누군가에게 까발렸다간, 이 일을 망치려 들었다간······ 내 기꺼이 실은 무적비비탄이었노라고 정정해주겠소. 범죄 전적을 세탁하고 새 신분을 얻으려 한 사파 새끼였다고! 그게 밝혀지면 아주 추해 보일걸. 아주 추해 보일 거야. 그걸 원하나?」

    허풍개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 명예만 좀 실추되고서 끝일 리 없단 건 알지? 당신, 서류상으론 지금 감옥에 있어. 내가 교도관한테 뇌물 줘가면서 당신을 빼냈잖나.

    내가 그 영상을 공개하면 다시 감방에 들어가셔야 할 거야. 한 몇 년쯤 더 빵에 있어야 할지 모르지. 감히 사람들을 속이고 신분 세탁해서 일찍 나오려 한 괘씸죄가 적용될 테니. 당신 나이 생각하면 아주 좆되는 셈 아닌가. 그걸 원해?」

    물론 원하지 않는다.

    차가운 감옥에서의 느릿느릿한 죽음, 느리지만 확실하게, 저항할 방법 없이 다가오는 죽음을 감히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무서워서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다.

    「명국 가서 까발린들 소용없어. 모산파 최대 스폰서 중 하나가 나야. 전 범죄자를 종사로 모실 수 없다는 아주 정당한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면······. 젠장, 내 정말 이런 식으로 지저분하게 굴고 싶지 않소」

    협박에 이어 회유에 나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박 회장이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을 알아요. 그동안 누구 죽는 마당에 외면한 적이 없다는 걸 알지. 하지만 말이야, 당신도 저기 팔레스타인 전장까지 가서 사람 구하고 그러진 않잖나? 누가 도와달라고 해야 도와주고 그러는 거잖나. 시야 바깥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당신도 어쩔 수 없으니 눈 감는 셈이고」

    “그래서?”

    「이번에도 그러시오. 딱 한 번이요. 딱 한 번. 이것도 당신 손에 닿지 않는 일이잖아. 그러니 제발 넘어가요. 그래주면 내 크게 사례하리다.

    애초에 이게 다 한국을 위한 일이란 말이야. 봐, 마교 새끼들이 들어왔는데 무림맹 새끼들이랑 손 잡았다구. 이번에 한 대여섯 명 정도만 죽으면 그놈들을 싹······」

    “대여섯 명?”

    허풍개가 중얼거렸다.

    “이록 그자만 죽이려던 게 아닌가?”

    「어, 잠깐만······」

    박 회장은 실수했음을 깨달은 눈치였지만 이미 늦었다.

    허풍개는 도저히, 그걸 못 들은 척하기도 넘길 수는 없었다.

    “김지용한테 총기 난사라도 시킬 셈인가? 이록이랑 한꺼번에, 모여있던 사람들 여럿 죽여서 일을 키우려고?”

    「내가······」

    “이번 파티에서 그럴 건가?”

    이록, 그 검사를 지지하는 파티라고 들었다.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여럿 살해될 경우, 그것은 반 범죄 인사들을 향한 테러였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한국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로 간주될 것이다. 심지어 파티의 주최자는 재계 서열 2위의 기업인이다. 파티에 참여한 그마저 총에 맞아 다친다면 그 사건은 그 누구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수 명의 시체 위에서, 이번에야말로 박 회장은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박 회장이 소리 질렀다.

    「다 억측이고, 내가 말실수한 거요. 알겠어? 다 억측이라고!」

    앞서 한 발언과는 모순되게도 박 회장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다시 말하는데 누구한테 주절거리지 마시오. 뭔가 하려고 하지도 말고. 이 일이 바깥에 흘러가는 순간, 난 그걸 당신 짓이라 단정하고 바로 응징할 거야. 알겠나? 알겠냐고!」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