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2화 (92/103)
  • 허풍개 - [1]

    오나라 황제가 갈현을 불러 벼슬을 주려 했으나 갈현이 거절하였다.

    갈현은 떠나려 하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 신선전(神仙傳)

    허풍개는 수련 중이다.

    그날 본 그녀의 경지를 재현하기 위한 수련이다. 불로영생하여, 이 지상에 영원토록 남기 위한 수련.

    그 목적을 위해 수련하며 의외로 그리 들뜨지는 않았다.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삶을 위한 단서를 잡았는데 어째서?

    허풍개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언젠가 박애진이 이런 질문을 던져온 적이 있더랬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요.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둘씩 줄여가면 삶의 즐거움이 충분히 남나요?’

    예리한 질문이었다. 실제로 지난 삶이 즐겁지는 않았다. 그놈의 김치 한 조각 입에 넣을 수 없는 삶에 뭔 놈의 쾌락이 있단 말인가?

    ‘별로요.’

    ‘그럼?’

    ‘죽지 않기 위해서죠.’

    실제로 그가 영원히 살려는 것은 삶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그게 끝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가 아니다.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오는 걸 끔찍하게 생각함에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죽음 그 자체가 너무나도 두려운 까닭이다.

    그러니까 지금 얻은 것은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무언가는 아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방법을 손에 넣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불쾌한 감정이 너무 강하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쾌락을 느끼는 법, 허풍개가 지금 느끼는 심정도 그렇다. 희망이 생겼음을 자각한 머리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상당히 줄었다.

    머리가 맑고, 깨끗하다.

    언제나 우울감과 공포심으로 가득 찼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다.

    평온. 이것이 이대로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이도혁은 연단 위에 선 자신의 경호 대상을 보았다.

    이록 검사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었다.

    “무림인은 맹수입니다. 사람 잡아먹는 퓨마 한 마리예요. 산이나 들에서 맞닥뜨리면 잡아먹히고 말죠. 하지만 맹수가 산에 있단 걸 알고 총을 준비해서 가면? 마을 사람들끼리 창이라도 들고 가면? 전혀 무섭지 않아요!”

    이록의 연설은 그 어느 때보다 웅변조였다.

    힘이 있다 못해 처절했다.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힘을 짜내는 사람 특유의 목소리다.

    “작정하면 모조리 쓸어낼 수 있단 말입니다. 작정, 그래요. 우리가 안 하는 건 그뿐입니다. 놈들이 약자고 우리가 강자입니다! 그런데 놈들을 가장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만나니까 두렵게 느끼죠.”

    위기, 그렇다. 정의가 실현되지 못할 위기였다.

    그날 그 장소에 모인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들이 무색하게도, 또다시 모든 수사와 처벌이 흐지부지 끝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식인 퓨마들을 양지로 끌어냅시다. 음지에서 나와 동물원 우리에 갇혀있게 합시다! 그놈의 잘난 무공으로 스포츠 비무나 하면서 돈 벌어먹게 합시다! 놈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때아닌 마교도들의 등장은 사건을 축소하려는 자들에게 명분을 주었다.

    녹림과 거기 연결된 무림맹, 그 관련자들을 완전히 축출하길 그만둘 명분이었다.

    이 땅에서 더러운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간 정말 저 악명 높은 마교도들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아무리 더러운 놈들이라도 적당히 남겨두어야 견제가 될 것이라고.

    뒤 구린 자들이 뻔뻔하게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도록, 백련교는 일부러 이런 타이밍에 진출했을 것이었다. 덕분에 이득을 본 자들이 많다. 호텔 한 채 샀을 뿐인데도 모두의 관심이 거기 쏠려버렸지 않는가?

    심지어 얼마 전에 있었던 두 절세고수의 비무는 이 땅에 들어온 백련교의 존재감을 널리 퍼뜨리기 충분했다. 정말이지 그날의 비무는 아홉 시 뉴스보다도 훨씬 훌륭한 광고였다. 불과 며칠 만에 유튜브 조회수가 수십억이 되어버린 비무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덕분에 이제 일반인들마저 이 땅에 백련교가 진출하려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막으려면 어째야 하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마당이다.

    이 시점에 백련교가 들어오는 조건으로, 일종의 거래가 있었으리란 추측마저 영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그리 세간의 이목을 끌어주는 대가로 백련교는 벌써 뒤를 봐줄 각계의 후원자들을 얻었을 테니까.

    놈들을 당장 쫓아내지 못하거든, 결국엔 이 땅에 마교가 자리 잡을 것이다. 뽑아내기엔 너무 단단하고 깊숙하게, 각 곳에 뿌리를 뻗어버릴 것이다. 이 땅을 계속해서 오염시킬 것이다. 이제는 든든한 현지 협력자가 된 무림맹과 함께.

    이록 검사는 자신의 후원자가 그런 꼴을 절대 두고보지 못하리란 걸 잘 알았다.

    “식인 퓨마들에게 먹이를 주는 국회의원들에게, 놈들에게 접대받는 검사와 판사들에게! 응징을······!”

    이록 검사가 뭔가 말하던 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저거!”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도혁을 포함한 이록의 경호원들은 일제히 한 남자를 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구질구질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손에 권총 한 자루가 쥐어 있는 게 아닌가.

    공개 석상에서의 암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암살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암살이 저보다는 조용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는데. 하도 경호원들을 끌고 다니는 터라 이런 식으로밖에 일을 벌일 수 없었던 것일까?

    덩치 큰 경호원들이 허둥지둥 움직였지만 늦었다. 이미 총잡이는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도혁의 손은 반사적으로 이미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안에 넣어두고 다니는 장난감들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탁, 하고. 금속질로 빛나는 BB탄이 그 손가락을 떠났다.

    창안자에게서 직접 배운 탄지공이다. 이 무공을 가르친 절세고수가 그러듯 마법적인 도탄을 보이거나 혈도 어딘가를 찔러 몸을 굳게 만들 능력은 없다. 사실, 앞으로라도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이도혁은 그저 탄 하나를 세게 날릴 수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문구점에서 싸구려 BB탄총을 쏘는 것과 비슷한 위력이다.

    다만 제법 정확히 날릴 수는 있다. 지난 일 년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 수련해온 성과다.

    날아간 BB탄은 목표한 곳에 정확히 명중했다.

    “악······”

    눈을 얻어맞은 총잡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와 함께 완전히 조준되지 못하고 발사된 총알은 총성만 요란했을 뿐, 허공을 가르고 끝났다.

    “어, 으, 씹······”

    겨우 살아난 이록 검사는 눈을 부릅떴다. 이 상황마저 이용하고 싶은지 계속 외쳤다.

    “······보십시오! 퓨마가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이미 이럴 줄 알고 있었으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총잡이가 끌려가고, 연설마저 끝난 뒤, 연단에서 내려온 이록 검사의 셔츠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이록이 자신을 구해준 이도혁에게 다가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 고마워······ 총구 반짝이는 거 본 순간 몸이 굳더라구. 이대로 죽는 줄······”

    이도혁은 그러는 이록을 보고 놀랐다. 하도 의연해 보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애써 참아내던 것일까? 무림을 몰아내야겠다는 사명감이 그리 강한가?

    그마저 아닌 것 같았다. 주변의 누구도 듣지 않는 걸 확인하더니, 이록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하여간 이런 짓거리 빨리 좀 그만뒀음 좋겠네······. 직장에선 왕따당하고, 사람들한텐 관종 새끼가 국회 진출하려 용쓴다고 욕먹고. 이번엔 뒤질 뻔하고······. 사법고시 통과해선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너무 하기 싫다, 진짜······”

    이도혁은 아연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세요?”

    “좋긴 개뿔? 회장님이 시키니까 이러는 거지.”

    “그런 것치고는 연설하는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나오던데요.”

    “웅변 선생이 잘 가르쳐서 그래. 내 이러다가 성대 결절 올까 봐 목 관리 빡세게 하는데 그래도 목 아파 죽겠다.”

    이록은 이 와중에 노래방 사건 당시 저지른 월권행위들이 들통나 곧 검사 노릇도 그만둬야 할지 모른다느니. 너무 피곤해 죽겠다느니 어쩌느니 하소연했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률 선생님 제자였던가?”

    이도혁이 말을 흐렷다.

    “그냥 무공만 비공식적으로 전수받은······”

    “그럼 제자지 뭐! 다시 말하지만 정말 고마워. 내가 그 선생님한테 몹쓸 짓을 했는데, 덕분에 살아날 줄은 몰랐어. 사례를 하고 싶은데 말이야.”

    “괜찮습······”

    “사양 안 해도 괜찮아. 내가 직접 대단한 걸 해주려는 건 아니니까 부담스러울 것도 없고. 자네, 파티 좋아하나?”

    “예? 무슨 파티요?”

    “회장님이 주말에 파티 열어주신다더라. 반(反) 무림 검사 이록을 응원하는 지지자들의 모임? 미국에서 그러는 것처럼 후원 파티라도 열어주려는 건 아니겠고. 그냥 나 보고 여러 높으신 분들 만나면서 안면 익혀다 인맥 과시하라는 거지 뭐. 그 파티에 자네도 같이 가지 않을래? 이률 선생님 제자라는 거 내세우면 자네도 인맥 꽤 생길걸.”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자네가 젊어서 모르나 본데 인맥이 중요해. 나도 이러면서 용케 목숨줄 붙어있는 게 다 회장님과의 인맥 덕분 아니야?”

    이도혁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애초에 그분 공식 제자도 아닙니다. 함부로 어디 가서 제자라고 밝히긴 그래요.”

    이록은 한참이나 그놈의 파티 참여를 권유했지만 이도혁은 끝까지 거절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듯, 이록은 끈질기게 이도혁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 이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그의 후원자였다.

    「자네, 총 맞을 뻔했다고. 괜찮나?」

    박 회장의 물음에 이록이 대답했다.

    “예,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래, 정말 잘 됐어. 자넨 그런 데서 죽으면 안 돼」

    수화기 너머 박 회장이 중얼거렸다.

    「그런 데서는······.」

    이록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목숨 건진 게 말입니다. 저번에 회장님이 제 경호에 넣어준 그 친구 덕분인데요.”

    「누구? 아, 그 친구」

    “예, 이률 그 양반 제자요. 그 친구를 회장님이 열어주시는 파티에 참여시키고 싶은데 자꾸 거절하지 뭡니까. 부담스러운 모양인데, 회장님이 정식으로 초대장 주실 수 없습니까? 그럼 거절하기도 부담스러워도 결국 파티에 올 것 같은데요.”

    그러자 예상치 못하게도 거절의 대답이 돌아왔다.

    「싫다는 친구를 왜 부르려 그러나?」

    “예? 그게, 그 친구 덕에 목숨 건졌노라 소개해 주고 다니고 싶어서······.”

    「자네 검사 생활 오래 하다 보니 아주 못된 버릇이 들었어. 어디 참여하기 싫다는 젊은 애 강제로 끼게 만드는 거 꼰대 짓이야. 그러지 마」

    이 노인네, 내 말을 듣기는 한 건가? 하여간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노인네 같으니.

    이록은 문득 떠오른 불만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감히 중학생 시절부터 후원해주고 대학 등록비까지 내준 인생의 은인을 상대로 감히 욕할 수는 없다. 그 은혜를 갚겠답시고 이렇게 똥줄 빠지도록 움직이는 것 아닌가.

    통화의 상대방은 여기 없음에도, 이록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예, 회장님.”

    *******

    허풍개가 수련을 마치고 나오자 이풍이 중얼거렸다.

    “박 회장이 화났나 봐요.”

    허풍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 소리냐.”

    “박 회장이 형님한테 화났나 봐. 왜, 형님한테 초대장 안 오지 않았소? 이번 주말에 그 양반이 파티 연다던데.”

    “못 갈 걸 알았나 보지. 나 이번 주에 모산파 가는 거 모르냐.”

    “그래도 그렇지, 예의상으로라도 한 장쯤 보내줄 만하지 않소? 형님이 요새 도와준 게 얼만데 정없게 입을 씻어?”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그 말에 이풍이 히죽 웃었다.

    “하기야, 뭐 어때요? 이젠 박 회장 그 양반이 형님 어떻게 생각하는 상관 없긴 해. 그 양반이랑 안 얽혀도 이렇게 잘 나가는걸······”

    정말이지 그 말이 사실이다.

    이풍은 제 형님이 이렇게까지 대우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비무를 벌인지 불과 며칠밖에 안 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곳에서 연락이 왔는지 셀 수도 없는 일이다.

    어제는 모산파에서 연락이 왔다. 이미 천문학적인 거액이었던 계약금을 올려주겠다고 했다.

    세상에, 이쪽이 먼저 요청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그러는 경우가 있나? 어지간히도 딴 곳에 가로채일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지.

    그럴 만도 하다. 자그마치 천하제일인이 본파에 합류할 상황 아닌가. 기존의 천하제일인이었던 월녀가 등선한 가운데, 저번의 비무에서 그 형님이 보인 모습은 그와 같은 평가를 받게 하는 데 충분했다······.

    이풍이 연신 실실거렸다. 이 상황이 꿈만 같다. 지난 기나긴 모든 세월이 이 순간만을 위해 있었던 듯한 느낌이다.

    한편 허풍개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요새 수련 삼매경에 빠져있느라 걸려오는 전화며 문자를 거의 확인하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보냈는지 문자 내용은 짧았다.

    「살려주세요김지용」

    허풍개는 잠시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속 평온이 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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