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0화 (90/103)
  • 천마(天魔) - [3]

    무적무적자의 양손이 동시에 움직였다.

    BB탄 또한 두 발이 함께 쏘아졌다. 얼핏 보면 맞힐 생각이 있기나 한가, 표적에 가까이 다가갈 수나 있는가 의심스러운 궤적이었지만 그가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탁, 탁. 각기 다른 사물을 맞힌 BB탄은 이내 같은 목표물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벌써 눈이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카메라맨은 또다시 긴장했다. 저 탄지공이 그리는 도탄의 난해함은 이미 알고 있다. 카메라로 제대로 잡아낼 자신이 없는데······.

    그래서 라나의 소드스틱이 BB탄 하나를 정확히 갈라버린 순간, 카메라맨은 그녀를 응원해서가 아니라 마탄 중 한 발이 사라졌음에 기뻐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순간, 제기랄. 그 와중에 태극검까지 날아와서는 공격에 가세하는 게 아닌가.

    카메라가 담아야 할 날아다니는 것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카메라맨이 속으로 비명 지르던 그때, 웬 나무에 맞아 도탄을 그린 BB탄은 정확히 라나의 머리를 향해 나아갔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스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라나는 쉽게도 목을 젖혀 피해냈다. BB탄이 그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허풍개는 생각했다. 일단 피했으니 도탄을 통해 다시 날아오는 건 조금 후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았다.

    라나의 등 뒤에서 칼 한 자루가 비행하고 있었다.

    탁. BB탄이 태극검의 칼몸에 부딪혀 튕겼다. 다시 날아간 그 방향에 라나가 있었다.

    라나는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그 소리에 반응할 정도로 기민했다.

    라나가 회피를 위한 보법을 밟았다.

    한편 허풍개는 이미 두 발의 BB탄을 더 날린 뒤였다.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던 라나가 멈춘 그때, 양옆과 등 뒤에서 BB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라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눈에 자신을 포위한 BB탄들이 담겼다.

    예의 탄환들을 피하기 위해, 라나가 하늘을 날았다.

    정말 날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폴짝 뛰어올랐을 뿐이지만 자기 키의 몇 배는 높이 뛰었으니까. 체조선수들이 탄력성 있는 장대를 쓰더라도 저리 높이 뛰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이건 확실히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허풍개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벼운 몸무게에 경공술이 합쳐지면 대충 얼마나 높이 뛸 수 있을지 추측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예상이 맞은 지금, 의외로 손쉽게 이겼다고 생각했다.

    탁, 탁. 두 발의 BB탄이 또다시 발사된 가운데 방금 빗나갔던 세 발의 탄환도 합세하여 일제히 그녀를 노렸다.

    그녀 한 명을 노리는 다섯 발의 탄환. 낙하 중인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위기 상황에 신묘한 보법을 밟아 피하느니 뭐니 지금 그럴 수는 없다. 보법을 밟아야 할 두 발이 허공에 뜬 것이다.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피할 수 있는 새가 아니고서야······.

    그때 라나의 발이 허공을 박찼다.

    공기를 걷어찼을 뿐인 그녀의 발은 마치 단단한 바닥을 밀어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라나의 몸이 공중에 떠오른 그 순간, 허풍개는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허공답보(虛空踏步)? 저게 말이 되나?

    그래, 저건 확실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 탄지공은 마치 적을 추적하는 보이는 듯하지만 어쨌건 유도탄은 아니다. 예상한 적의 움직임에 따라 도탄이 생기도록 조정할 뿐 아닌가.

    이미 예상이 빗나갔으므로 이후의 도탄은 모두 무의미했다. 기어이 다섯 발의 탄환은 모조리 허공을 스쳤다.

    그녀가 또다시 허공을 박찼다. 기어이 라나는 허풍개의 앞에 다다랐다.

    전봇대 위에 있던 허풍개의 앞에 라나가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라나가 소드스틱을 찔러왔다.

    허풍개는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맨손으로 절세고수의 칼을 상대할 자신은 없다. 무슨 수로 그러겠는가?

    애초에 자신은 일 대 일 대결에 익숙하지 않다. 정정당당한 비무보다는 훨씬 지저분한 싸움에 익숙한 사파 새끼 아닌가.

    어지간해서는 계속 거리를 벌리면서 탄지공만 죽어라 쏘아야······.

    허풍개가 뒤로 껑충 뛰어 전봇대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가 서 있었던 전봇대 위에 라나가 섰다.

    방금과 반대로, 서로의 시야가 역전되었다.

    저 위에서 라나가 허풍개에 내려다보며 웃었다. 호텔에서도 본 그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때 그랬듯, 허풍개는 욱했다. 호텔에서 싸움을 미루자고 할 때는 잔뜩 칭찬하더니, 정작 저 미소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쪽 실력이 얼마나 늘었든 간에 자기 승리는 당연하다 이거지?

    저 미소를 보는 순간 왜 이리 화가 나는지, 허풍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신다운 일은 아니었다.

    자기보다 쪼끄만 여자를 상대로 어깨에 힘줬다간 그게 오히려 꼴불견일 것 아닌가.

    그 사실을 떠올려도 진정되지 않는 이유는 뭔가?

    호승심이다. 언제나 냉정한 척하는 사파인으로서 자신의 내면에도 있다는 것을 부정해온 그것이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게 느껴지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허풍개의 팔이 스스로 놀랄 만치 빠르고 거세게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낚싯줄이 꿰인 BB탄을 재빨리 꺼내 저 위로 던졌다.

    BB탄이 전선에 칭칭 감긴 그 순간, 허풍개가 줄을 세게 잡아당기자 그 반동으로 몸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착지까지 가뿐히 마쳤다.

    허풍개가 전선 위에 섰다. 서로의 시야가 다시 동등해졌다.

    전선 위에서 허풍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전신주를 밟고 선 라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안 위험해요?”

    그녀의 물음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이 동네 전기 끊겨서 전기 안 흘러.”

    라나가 못마땅한 듯 허풍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그와 함께 견제 삼아 휘둘러진 소드스틱을 허풍개는 피하지 않았다.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린 손을 소드스틱을 향해 뻗었다.

    그 손가락과 소드스틱이 닿으려던 순간 허풍개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뇌위진동변경인.

    허풍개가 부르는 번개는 그 손가락 끝 아니면 태극검에 떨어지곤 한다. 이번은 손가락 끝이었다.

    손가락과 칼날이 살짝 부딪힌 순간, 거기에 가느다란 번개가 떨어졌다. 손가락에 닿아있던 칼날로 전기가 흐르자 라나가 움찔했다.

    아까 칼 사이에 번개가 떨어질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지면으로 전기를 흘려보낸 덕이었다. 지금도 그럴 수는 없었다. 발아래에 있는 것은 고무로 된 전선이고, 뭔가 흘려보내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라나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덕분에 완전히 감전되는 건 어찌어찌 피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손이 저릿한 걸까. 라나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분노만을 보내기 위한 시선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불가해한 힘이 깃들어 있다.

    다음에 일어난 현상을 보고 사람들이 비명 질렀다.

    “어!”

    허풍개는 바닥이 푹 하고 꺼지는 감각을 느꼈다. 밟고 있던 전선이 불타서 끊어진 것이다. 삼매진화.

    추락하는 허풍개를 향해, 라나가 전봇대를 박차고 쏘아지듯 날아왔다.

    추락하는 둘은 허공에서 얽히고 얽혔다. 떨어지며 서로에게 손을 뻗고 칼을 찔렀다.

    계획에 없던 공중전, 날개 없는 무림인으로서 평생 할 일이 없으므로 연습할 이유도 없어서 둘 다 이 분야에서는 초보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몰라도 라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공중에서 손바닥을 뻗다 말고, 허풍개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가슴을 걷어차였다. 허풍개는 허공에서 대각선으로 튕겨 나갔다. 짧은 승부에서 패배한 셈이었지만 이것만으로 쓰러지지는 않았다.

    허풍개의 손이 먼저 지면에 닿더니, 손목의 힘으로 그 몸을 공중에 띄웠다.

    허풍개는 공중제비를 돌 듯 빙그르르, 몸을 회전해서는 똑바로 섰다. 그리고 넘어질 뻔했다.

    착지를 마친 라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과 같은 박자로 세상이 흔들렸다. 허풍개는 혀를 깨물 뻔했다. 또다시 그놈의 지진인가?

    세 번이나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상 우연이라고 볼 수가 없다. 저것도 뭔가의 무공인 모양이다.

    그래, 번개를 떨어뜨릴 수 있다면 지진도 일으킬 수 있나 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해하기로 했다.

    허풍개는 흔들리는 세상을 보았다. 난데없는 지진에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천지가 혼란스럽다. 곳곳에서 울리는 비명.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카메라들. 불붙은 전선은 이리저리 휘날리며 불티를 튀기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가운데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은 한 소녀뿐이었다.

    그녀의 전진을 멈추기 위해 태극검을 날려 보냈지만, 그 칼날이 라나의 손에 잡혀버렸다.

    복제된 태극검들은 현대식 공법으로 만들어서 경도며 강도며 강철보다 훨씬 강력한 텅스텐 합금강인데, 라나의 맨손은 그 쇠붙이를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콰르릉······.’ 번개가 붙잡힌 태극검에 떨어지면서 그녀의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이번에 라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류는 그녀의 발을 타고 지면으로 퍼져나가 흩어질 뿐이었다.

    확실히, 아무것도 저 걸음을 막을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다가갈 수밖에.

    기어이 칼이 뚝 하고 부러지던 그때, 허풍개의 내면에서 번개가 달렸다.

    사고가 가속된 가운데 흔들리는 세상은 더욱 자세히 보였다. 허풍개는 모든 사물을 관찰했다.

    월녀에게서 내력전수를 받은 후로 체내의 기가 대폭 불어났다. 그리하여 번개도 연달아 떨어뜨릴 수 있게 되었는데, 기의 증가는 단순히 연료로 쓸 에너지의 증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체내 기의 증가는 단전에 축적된 기 또한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단전에도 기가 참 많이도 쌓였다. 뇌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활성화되었다.

    전례 없는 날카로움으로, 허풍개는 이 흔들림의 규칙성을 찾아냈다. 바닥을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그리고 흔들리는 사물은 또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파악했다.

    어렵지만 쉬운 일이었다. 백 년 넘게 해온 일 아닌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허풍개는 탁, 하고. 한 발의 BB탄을 쏘아냈다.

    그와 동시에, 땅을 달렸다. 출렁거리는 지면에서 허풍개는 라나를 향해 돌격했다.

    이 와중에 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걸까? 라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나는 BB탄을 쳐내려다 말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허풍개에 맞서야 했다.

    라나가 소드스틱을 들었다.

    그녀의 반응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허풍개는 이 순간 알게 되었다. 지금 자신은 가속된 속도로 달리는데, 그녀의 검은 똑바로 이쪽에 겨눠지는 것 아닌가.

    그러나 지진으로 인해 자갈 하나가 공중에 튄 마당이었고, 방금 날려보낸 BB탄이 거기에 맞았다.

    되돌아온 BB탄이 라나가 칼을 쥔 손목에 명중했다.

    라나의 칼이 움직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녀의 대응은 신속했다.

    허풍개의 점혈은 신묘한 데가 있어서 손목을 맞혀도 온몸을 마비시킬 수 있다. 그러지 못하도록 라나는 손과 팔의 기 흐름을 차단해버렸다.

    라나의 손에서 한순간 모든 힘이 사라졌다. 그녀의 손에서 소드스틱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도달한 허풍개가 손바닥을 뻗었다. 태극권의 장법이다.

    라나는 칼을 잃었으므로 맨손으로 맞서야 했다. 그 사실에 낭패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어느 도술이나 재주를 부릴 수 있든, 두 무인이 마지막 순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손에 직접 잡은 병장기요, 그마저 잃은 뒤로는 육체와 육체의 싸움이다. 둘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나가 권법의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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