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9화 (89/103)
  • 천마(天魔) - [2]

    “여기, 싸인해요!”

    라나는 대결에 앞서 웬 계약서 한 부를 내밀었다.

    무슨 내용일까. 대결의 결과가 어찌 되든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인가? 그도 아니면 패배한 대가를 어찌 치러야 하는지 적어둔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졌다가는 손가락 팔 한 짝쯤 내놓아야 할지도.

    한자와 영어로 된 계약서였고 허풍개는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지만 굳이 읽지 않았다. 도전하는 주제에 이것저것 조건을 따질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싸움을 받아준 것 자체가 저쪽의 양보인 만큼 무슨 조건이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허풍개가 종이를 흘긋 보고는 서명하자 라나가 웃었다.

    “좋아요, 아주 좋아! 그럼 대결은 일주일 하고도 이틀 뒤, 알겠죠?”

    한 판 붙자는데 왜 그리 나중인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려두려고?

    허풍개는 이 역시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뒤돌아서서 호텔을 나서려 했다.

    그 와중에 그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가 있었다. 덩치 큰 중동인과 그 옆에 늘어선 백련교도들.

    “잠시.”

    허풍개가 반쯤 눈을 감고 남자의 체내 기를 보니 고수였다. 마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혔는지 기가 정순하다.

    백련교의 간부쯤 되는 모양이다. 감히 자기네 향주에게 싸움을 걸었단 사실에 분노를 표하려는 걸까? 한편 그 옆에 따라온 다른 백련교도들도 그 무공이 상당해 보인다.

    무시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으므로 자연스레 허세가 나왔다. 허풍개는 주머니에 손 넣은 채 물었다.

    “뭐요.”

    눈앞의 중동인 백련교도는 대답 대신 품에 손을 넣었다. 권총을 꺼내려는 줄 알았던 허풍개는 무표정하게 긴장했다.

    주머니 속 BB탄을 만지작거리는 가운데, 백련교도의 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백련교도는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은지 부자연스러운 억양으로 말했다.

    “팬입니다. 싸인 좀······.”

    너무 황당했기에 허풍개는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표정의 변화 없이 얼어붙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종이에 대충 이름을 휘갈겨준 다음 계속 걸었다.

    떨떠름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니 이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풍은 이렇게 물어오는 게 아닌가.

    “형님, 그 금발 천마랑 또 싸우신다고?”

    허풍개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냐. 마교 놈들이 와서 협박이라도 하든?”

    이풍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림맹에서 사실이냐고 막 전화하고 그러던데요. 이미 무림인들은 다 아는 모양이고, 일반인들도 꽤 아는 것 같더만.”

    이번 대결을 무림인들이 아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일반인들까지 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허풍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풍은 이렇게 대답했다.

    “명국 웹사이트마다 메인화면에 이번 대결 소식이 떴다던데요?”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잠시 후에는 전화가 걸려왔는데, 모산파 박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뜬 목소리였다.

    「진인, 백련교 향주랑 비무하신다고요? 어째 본파에는 언질도 없이······ 아뇨,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요! 저희야 그저 감사할 뿐이죠!」

    *******

    일주일 하고도 이틀 뒤, 허풍개는 라나 레반도프스카와 마주 섰다.

    허풍개는 속에서 울분이 치솟고 있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라나를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저 미친년.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나는 주변을 둘러싼 모두에게 그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느라 여념 없었다. 춤추듯이 빙글빙글 회전해가며, 주변의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대는 게 아닌가.

    “모두 안녕, 안녕!”

    한편 허풍개는 그녀와 여기 모인 모두를 노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허풍개가 승부를 청할 때 생각했던 것은 저번 컨테이너 창고에서 벌인 대결의 연장이었다. 어둡고 음습한 장소에서의 대결. 주변에 지켜보는 눈 몇쯤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 또한 음침한 분위기의 무림인이리라.

    그러나 지금 이 장소는 컨테이너 창고 따위가 아니라 웬 영화 세트장에 가까운 장소였다.

    웬 허름한 주택들이 늘어섰는데, 실제 사람은 살지 않았다. 그 주택들의 한 가운데는 텅 비어있어서 사방이 훤히 트였다.

    그곳이 이번 비무장이었고 그곳을 향한 눈길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허풍개는 주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품에 권총 한 자루 숨긴 무림인이 아니라 카메라맨들이었다.

    사방에, 저 건물 옥상에, 저 건물 안에 카메라 렌즈가 번뜩이고 있었다. 명국의 공중파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맨들은 물론 유튜버인가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열두 명은 한국인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명국인인 듯하다.

    카메라의 주인 중 몇몇은 모산파에서 나온 사람들이기도 했다.

    박애진이 말하길, 이번 대결에 쏠린 눈이 상상을 초월할 만치 많다고 했다. 명국의 스폰서도 엄청나게 붙었다던데, 이번 대결로 인한 광고 효과만으로도 허풍개는 계약금 값어치를 다 하는 셈이라던가?

    그 말은 물론 과장이겠지만, 그 들뜬 반응만으로도 여기 몰려온 명국인들이 이번 대결을 어찌 생각하는지는 알 만했다. 수백 대 카메라를 동원하여 여러 구도에서 촬영해 마땅할 세기의 대결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지.

    빌어먹을. 무공에 미친 저 명국인들이 절세고수들의 대결을 볼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란 걸 미리 짐작했어야 하는데. 가뜩이나 저번 영상이 퍼진 이후로 더욱 유명해진 두 고수의 대결이라 더욱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모양이다.

    이 와중에 라나가 이 대결을 왜 받아들였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을 정복하기 앞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수를 꺾어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오락으로서 백련교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느 쪽이건, 허풍개가 상상하던 그런 대결은 아니었다.

    허풍개와 시선이 마주친 라나가 웃었다.

    “왜요, 맘에 안 들어요?”

    계약서를 대충 읽고 넘겨버린 허풍개로서는 차마 불평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익숙하지는 않군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게.”

    “하기야 최종결전다운 분위기는 아니죠?”

    라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전 최종보스 같은 게 아니라니까.”

    허풍개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박 회장이 보면 뒷목을 잡겠군. 그 양반은 내가 뒷골목에서 몰래 습격이라도 할 줄 알았을 텐데.

    물론 아직 그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 것은 아니다. 친선비무에서도 사람은 다치기 마련 아닌가. 심지어 이건 보호장구를 잔뜩 두른 스포츠 경기도 아니라 진검을 동원하는 고수들의 비무이므로 더욱 위험하기 짝이 없다. 대결 도중에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셈이다.

    그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을 텐데, 막상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심각함이 없다.

    저 여자를 따르는 백련교도들만 해도 태평하거나 기대감에 찬 얼굴들이다. 심지어 이쪽과 시선을 마주친 웬 백련교도는 친근한 얼굴로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기야 이쪽은 제대로 된 흉기가 이날 주먹과 BB탄이나 쓰는 얼빠진 놈이요, 허풍개로부터 그 사손까지 누굴 죽인 적이 없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비무의 결과가 어떻든 자기네 향주는 별 탈이 없으리라 믿는 모양이지.

    그 기대를 배반해줘야 할까? 지켜보는 눈이 이토록 많으니 단전 어딘가를 폐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 같고, 사지 어딘가라도 못 쓰게 만들어줘야 하나? 팔을 기괴한 방향으로 꺾어버리면 그럴 수 있다.

    그리하여 복수를 달성해야 할까?

    모르겠다.

    대결을 신청할 당시, 허풍개의 가슴 속에 분노의 감정 같은 것은 타오르지 않았다.

    허풍개의 복수심은 들끓는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의무감에서 나왔다. 제자가 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치 제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니, 머리로라도 그에 맞게 행동해야겠다는 의무감이다.

    비무의 심판이 단상 위에 섰다.

    “자, 자. 모두 물러나세요······”

    허풍개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마음을 진정시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가 아닌, 혈류의 속도를 빠르게 하여 흥분을 일으키기 위한 호흡이었다.

    투지를 끌어내야 했다. 월녀의 죽음 혹은 승천을 떠올렸다. 그러고도 심장이 충분한 속도로 박동하지 않자 자신의 죽음마저 떠올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지만 이것은 꽤 효과가 있었다.

    눈을 뜬 허풍개의 눈이 적절하게 뿜어져 나온 아드레날린으로 번쩍였다. 딱 몸을 움직이기 좋은 긴장감 속에서 손에 쥔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마주 보신 두 분께서는 서로에게 예를 표하시고······”

    비무가 시작되었다.

    *******

    여기 동원된 카메라만 해도 백 대가 넘었다. 그중 하나를 쥔 명국의 카메라맨은 잔뜩 긴장하여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이번 대결을 지켜보는 눈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생방송 중이다. 방송에 앞서, 스치고 지나간 짧은 광고만 해도 그 가격이 백오십억 원을 훌쩍 넘겼다던가? 카메라맨은 한 호흡이라도 놓칠세라 카메라를 앞으로 겨누었다.

    두 절세고수가 서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카메라는 먼저 무적무적자를 향했다. 요새 가장 유명한 새외고수다. 그 도가적 경지가 너무나도 드높아 말도 안 되는 도술들을 부린다는······.

    무적무적자는 태극검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권법과 탄지공의 고수로 유명한 저 남자가 왜 검을 쓰려는지 알 수가 없지만 카메라맨은 굳이 짐작해보려 애쓰지 않았다. 절세고수의 생각을 어찌 필부가 알겠다고.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무적무적자의 태극검에 맞서, 라나는 짤막한 소드스틱 한 자루를 들었다.

    두 절세고수가 동시에 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

    두 자루 검이 교차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콰르릉······’

    태극검의 끝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충돌한 검 사이에 번쩍인 번개가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도저히 검을 휘두른다고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는 현상이다. 무슨 특수효과를 의심할 법하지만, 저 하늘까지 이어진 번개 줄기를 보면 잠자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아직 인간의 문명은 저 하늘에서 번개를 부를 수준에 이르지 않았으니.

    그리고 두 자루 칼이 연달아 부딪침으로써 번개 또한 연달아 내리쳤다.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태극검은 그 섬광을 머금고 순백색으로 번뜩였다.

    섬광과 함께 천둥 또한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

    한편 대결에 임하는 둘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없다. 번개를 동반하는 검을 휘두르는 쪽도, 그 검을 받아내는 쪽도 태연하다.

    고통스러운 것은 그저 구경꾼들뿐일까. 또 한 번 번개의 번뜩임을 참아내지 못한 카메라맨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어검술!”

    카메라맨이 욕설을 지껄였다. 젠장, 놀라느라 방금 상황을 놓친 듯하다.

    어느새 무적무적자의 태극검이 그 손을 떠나있었다.

    칼을 놓친 게 아니라 던진 모양이다. 라나의 뒤로 던져진 태극검은 공중에서 스스로 방향을 바꾸더니, 쏜살같이 날아오는 게 아닌가. 등 뒤를 노리는 공격을 라나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피해냈다.

    그녀는 구두를 신고 있는데, 굽이 있어 마찰이 상당할 텐데도 빙판길을 미끄러지듯이 저 옆으로 움직였다. 잘은 몰라도 경지에 이른 보법일 것이다.

    덕분에 완벽하게도 회피에 성공했다. 그녀의 옆을 태극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 공격을 마친 폭격기가 그러듯, 태극검은 저 위로 치솟았다.

    그와 함께 라나의 소드스틱 또한 위로 향했다.

    소드스틱의 칼끝에서 비눗방울 같은 것들이 뿜어져나왔다.

    강기 다발, 즉 강환(罡丸)들이다.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그 구슬들은 조금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치 몽환적이지만, 그 구슬에 부딪친 결과만은 살벌하다. 비눗방울에 닿은 나뭇가지가 녹아내리면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탄막을 생성하는 강환을 피하기 위해 태극검은 대공포탄 세례를 피하려는 전투기처럼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공격과 비현실적인 대응의 연속이다.

    이 역시 번개 못지 않게 놀라운 일이라서, 그쪽에 카메라를 향하다 말고 카메라맨은 또 한 번 움찔했다.

    하는 짓이야 아무리 신기하더라도 아무튼 저 소녀는 날아다니는 검을 막아내느라 바빠 보인다. 그 와중에 무적무적자는 지금 공격하지 않고 뭘 하고 있나?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메라를 슬쩍 돌려보니 무적무적자는 원래 있던 위치에 없었다. 당황하여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카메라를 저 위로 올려서야 무적무적자가 보였다.

    그는 웬 전봇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대체 방금 짧은 순간 언제 올라갔는지 모를 일이다.

    무적무적자는 지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그 방만한 자세로 무표정하게, 자신의 상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라나가 또 한 무리 강기 다발을 쏟아내다 말고 히죽 웃었다.

    그 순간 탁.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여기 있는 모두 알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