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天魔) - [1]
뉴스에서는 한국에 갑자기 나타나 버린 명국의 종교를 논하느라 바쁘기 그지없다.
백련교는 한국에도 이미 악명이 자자한 종교 아닌가. 제 땅에 암처럼 퍼져버린 백련교를 소탕하기 위해 영국이 19세기에서부터 벌여온 투쟁은 21세기에 이르는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대부분의 방송에서는 그 무시무시한 종교의 위험성을 대놓고 경고하지는 못한다. 자칫하면 그들 종교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히 그들을 모욕하자니, 백련교도들의 악명은 이슬람 과격파들을 능가하는 마당이다.
오직 기독교 계열 인사들만이 당장 저 마귀들을 당장 한국 땅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흰소리를 늘어놓는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이 옳다.
마교도들을 이 땅에 뿌리 뻗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다들 그 문제에 관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마교도들이 흔히 그러듯 몰래 땅에 숨어들어와 마약이라도 팔다가 적발되었다면 정당하게 쫓아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들은 너무 당당히 왔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박해를 대놓고 할 수야 없는 일이다.
한 전문가란 작자는 TV에 나와서는 소심하게도 이렇게 떠들었다.
「녹림이 불법 폭력조직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너무 급하게 제거한 여파가 닥친 것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토착종을 몰아내면 외래종이 설치는 법인데······」
그 말을 들으며 박 회장은 살인 충동을 애써 참았다.
자국의 폭력조직은 더 위험한 해외조직을 들어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필요악이란 설, 한국 무림 단체야말로 음지의 수호자쯤 된다는 미친 소리 아닌가.
일본에서도 야쿠자들이 마피아를 막네 어쩌네 하면서 저런 식으로 미화되곤 하던데, 박 회장은 그딴 소리에 동의한 적이 없다.
한편 평소의 지론과 모순되게도 박 회장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다.
‘무림맹 깡패 새끼들은 뭐 하는 거지?’
누군가가 홍등가에 유흥업소 하나를 열려고 해도 기존 불법 조직들의 견제를 받는 법 아닌가.
그 견제란 단순히 폭력 따위에 의한 게 아니어서, 이미 자리 잡은 이들끼리 똘똘 뭉친 채 새로 들어온 자들의 불법영업을 경찰에 신고하거나 미성년자 손님을 몰래 보내 적발되게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그러니 마교도가 이 땅에 자리 잡으려거든 이미 이 땅에 있는 무림조직들을 굴복시켜 자신들을 배척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백련교가 대뜸 들어왔다가는 이 땅에서 영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림맹의 고수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유착이 있는 온갖 지역 국가기관들을 상대로도 싸워야 했을 테니까. 그건 결코 수지맞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림맹은 여전히 건재하며 거기 속한 토착 조직들과 지역 관료들과의 유착 또한 단단하다.
그런데도 그냥 들어왔다고? 대체 왜?
마침 무림맹에 큰 영향력을 지닌 절세고수를 알고 있었다.
박 회장은 허풍개에게 바로 연락하여 무림맹이 대체 뭔 생각인지, 어찌 대응할 것인지 알아봐달라고 요구했다.
허풍개는 바란 대로 해주었다. 박 회장에게 다시 찾아와서는 알아낸 바를 전했다.
“무림맹에서는 백련교와 싸울 맘이 없다 합디다.”
허풍개의 말에 박 회장이 소리 질렀다.
“대체 왜! 녹림이 차지하던 파이를 싸워보지도 않고 고스란히 빼앗기려고?”
“어차피 경찰들이 눈 시뻘겋게 뜨고 노려보고 있는데, 먹느라 체하느니 그냥 내버려 두겠다 이거지.”
“그래도······ 무림맹에서는 이미 저 폴란드 출신 마교 수괴와 한바탕 싸운 적도 있지 않나? 원한이 있을 텐데 보아 넘기겠다고?”
“그게, 이미 동맹을 맺은 모양이던데. 그것도 꽤 오래 전에.”
“동맹?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허풍개는 자신이 추측한 바를 말해주었다.
“내가 모산파와 계약맺은 사실 말이요, 내가 만월산에 번개 떨구면서 본의 아니게 방송을 타버려선 세간에 공개돼버렸잖소?”
“그랬지.”
“그때 명국으로 떠나지 말고 제발 한국에 남아계시라고 말리는 놈이 없더라고. 이상한 일 아니요. 마교 수괴 년을 상대론 총도 통하지 않는단 전훈을 얻었으니 단순히 머릿수만 많아서는 못 이긴단 것도 알았을 텐데. 그 와중에 구자성까지 전쟁을 선포한 마당인데 제 편에서 싸워줄 절세고수가 떠나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그런데도 그러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단 말이지. 그래서?”
“아마 내가 모산파와 계약 맺은 사실이 널리 알려졌을 시기엔 이미 무림맹과 그 금발 천마가 동맹을 맺은 뒤였을 거요. 무슨 동맹인지는 몰라도 대충 서로 견제하지 말자는 동맹쯤 되겠지. 당시 무림맹 입장에선 마교보단 녹림이 더 미웠을 테니까······”
“한편 그 폴란드 천마 년한테는 녹림이 영 좋은 동맹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테고······.”
박 회장이 말하면서 신음했다. 그 마교 수괴의 전 동맹으로서, 그는 라나 레반도프스카가 구자성을 믿을 만한 동맹으로 여기지 않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자성은 너무 많은 돌발행동을 벌임으로써 그녀를 난감하게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그녀는 편을 갈아치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 안 듣는 녹림에서 무림맹으로.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녹림이 사라지든 무림맹이 사라지든, 한국 무림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들어갈 마교의 입장에는 아무런 손해가 없는 셈이다.
“그리고 말인데, 그 후로는······.”
허풍개는 이어서 마침 무림맹 고수들이 다 같이 모여있을 때 마교가 조종하던 중고딩들이 쳐들어왔다는 사실, 그 습격은 경찰들이 뻔히 보는 가운데 이루어져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고 맥아리가 없었단 사실도 말해주었다.
지금 보니 그것은 진짜 무림인들을 습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중고딩들을 한데 모아 치워버리려는 수작이었을 것이다.
그 골칫덩이들이 소년원에 가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가는 이제 동맹이 된 무림맹에 민폐였을 테니까. 그 역시 무림맹과 폴란드 천마가 동맹을 맺었다는 증거 중 하나였다.
박 회장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인지 한동안 저 홀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제 녹림이 사라진 자리에 마교 놈들이 들어올 거란 말이지. 무림맹은 그놈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단단히 결착할 테고······”
한참 뒤, 박 회장이 씹어내뱉듯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돼.”
허풍개가 물었다.
“금색 늑대든 회색 늑대든 아무 차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소?”
“금색 늑대랑 회색 늑대가 붙어먹어선 늑대굴이 커지려니까 문제지!”
박 회장이 버럭 소리 질렀는데, 허풍개는 결국 당신이 초래한 일 아니냐고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것은 너무 잔인한 일일 테니까.
허풍개가 조용히 입 다문 가운데 박 회장이 호흡을 골랐다.
박 회장은 겨우 진정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그년이랑 다시 싸워볼 맘 없나?”
“그년이면 폴란드 천마?”
“그래. 싸워서 쫓아낼 맘 없어?”
“왜 직접 싸우시지 않고?”
“이 사람아, 난 근신 중이야. 이 와중에 설치면 큰일나.”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박 회장이 헛기침했다.
박 회장은 차마 그 여자가 자신이 협력하는 과정에서 생긴 약점을 단단히 잡고 있다는 사실, 자칫 까발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구차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정말 그 여자랑 싸울 생각 없나? 이 땅에 마교도들이 스며드는 걸 막을 생각이 없어?”
“딱히, 없소.”
“대협객 허풍개가 그 꼴을 두 눈 뜨고 보겠다고?”
“난 이 땅의 정의라든가 공익 같은 건 신경 써본 적이 없어.”
“마교도들이 총이랑 마약 팔아서 사람들 죽어 나가는 꼴을 보겠다고!”
“그건 경찰들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거고. 일단 자리를 잡고선 안 그럴 거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
“저번에 말 나눠보니까 그년은 한반도를 일종의 물류 허브쯤으로 여기더군. 동아시아에 총이며 마약을 운반하기 위한 통로 말이요. 그런 용도가 있어서 해외 마약상들이 한국에 마약을 직접 막 풀지 않는 건데, 아마 마교도들도 그럴걸.”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박 회장은 분노하고, 협박하더니, 애원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준 것보다 훨씬 값진 영약을 주겠다든가. 원한다면 현금으로 줄 수도 있다든가.
허풍개는 그 모든 횡설수설하는 말을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지.”
박 회장의 눈이 번뜩였다.
“정말인가?”
허풍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 회장이 그 손을 붙잡고 마구 칭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고맙소. 역시 당신이야말로 이 땅의 협객이지! 내 이번 일 끝나면 톡톡히 사례를······”
그 모든 말을 허풍개는 한 귀로 흘려넘겼다.
박 회장을 도울 생각도,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울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그게 가능한 일 같지도 않았다.
박 회장은 자신이 그녀와 싸워서 뭘 하길 바라는 걸까. 설마 정말 죽여버리길 바라는 건 아닐 텐데. 싸워 이겨서는 그녀의 단전이라도 폐하길 바라는 걸까? 그리하여 수괴를 잃은 백련교의 침공은 좌초되고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백련교에 속한 절세고수가 몇 명인데 그녀 한 명을 폐인으로 만든다고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박 회장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당장 급한 마당이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모양이다. 도울 가치가 없다.
그 와중에 모산파는 백련교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다. 잘못하다가는 모산파와의 계약도 망가지는 수가 있다.
그녀와 싸우면 안 될 이유는 많이도 생각나는데, 싸워야 할 이유는 딱 하나 생각날 뿐이다. 월녀.
허풍개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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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성이 가지고 있던 호텔에서 라나 레반도프스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어서 와!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다시 만난 그녀의 복장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저번에는 정장을 입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웬 황색 도포를 입고 있다. 그 와중에 저번에 만났을 때는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서 금발이 등까지 닿고 있다.
그녀의 양옆으로는 백련교도들이 늘어서 있다.
전투원으로 보이는 고수들도 있고, 사무를 담당하기 위한 사람들도 여럿이다. 그 모두를 거느린 채 라나 레반도프스카는 머리칼부터 복장까지 모두 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다. 명국의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체구에 앙증맞은 얼굴을 한 그녀임에도, 그 황제와도 같은 기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이것만 봐도 그녀와 싸워선 안 된단 걸 알 수 있었다. 구자성과 그 부하 산적 수십 명을 상대로도 죽을 뻔했는데, 마교 수괴와 그 수하 고수들을 상대로 싸우라고? 미친 소리지.
그래도 주눅 든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난 별로 안 반갑습니다.”
“어, 왜요? 이번에 보니까 체ー엔 라이토닝구를 넘어 싼다 코ー링구를 습득하신 모양이던데. 같이 마법사 파티 맺어아죠!”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그녀에게 허풍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물었다.
“구자성이한테 수명 연장하는 법 알려준 거, 그쪽이지요.”
그제야 라나는 당황하는 티를 냈다.
“어? 그렇긴 한데 월녀 언니를 납치해서 그러라고 한 적은 없어요! 오빠를 조져서 그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럼?”
“우리 교의 수명 얼마 안 남은 절세고수가 내력전수 해주기로 한 거예요. 구자성 그 오빠는 그걸 안 믿고 지 멋대로 행동하다가 골로 갔고요!”
한참 변명하다 말고, 라나는 허풍개의 표정을 살피더니 난감해 했다.
“안 믿는 눈치네? 하기야 저라도 못 믿을 거 같긴 해요. 그래서, 어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허풍개가 대답했다.
“아가씨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그거 따져 물으려고 온 거 아닙니다.”
“그럼요?”
“전에 둘이서 덤벼놓고 내가 발렸는데, 그것참 수치스러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때보다 내 실력이 조금 늘었거든. 그러니까······”
허풍개가 뭘 제안하려는지 눈치챈 라나가 감탄사를 토해냈다.
“오.”
허풍개가 말했다.
“한 판 붙읍시다.”
라나가 히죽 웃었다.
“그래요.”
도전에 응하는 라나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뭘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무림인은 무공으로 말해야 한다고.
허풍개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번에 보았듯 눈앞의 금발 소녀는 싸움을 거리끼기는커녕 즐기는 기질이 있다.
자신은 그렇진 않다. 싸울 때마다 몸 어딘가에 총알구멍이 생기는 마당 아닌가.
그렇다고 싸움을 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평생 적극적으로 싸우며 살아온 인생이다.
제자의 죽음에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자신이 지금 제자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 알 수 없는 마당이지만 어쨌건.
자신은 싸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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