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 김다솔 - [3]
정말이지 이 정도의 결과를 거둘 수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간 해온 노력보다 그날 하룻밤의 싸움이 훨씬 큰 성과를 거둔 셈 아닌가.
숙원을 이룬 자 특유의 만족감이 박 회장의 얼굴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박 회장이 말했다.
“내가 하도 기분 좋아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나?”
“부탁할 것?”
“영약 좀 달라든가. 돈 좀 빌려달라든가. 뭐든 좋아요. 말해봐.”
허풍개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날 그쪽이 나서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그래도 그렇지, 선생은 그날 얻은 게 하나도 없잖소? 오히려 잃은 것만 있잖아. 그것참 슬프고도 애석한 일이요. 내 맘이 다 아프니까 뭐든 해주고 싶어서 그래······.”
박 회장은 지금 월녀의 등선을 말하고 있었다.
평소의 허풍개라면 그것만으로도 확 불쾌해졌을 만하다.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도 않는 자신에게 백 년 넘게 함께 해온 제자의 죽음을 언급하다니?
그러나 허풍개는 여전히 자기가 담담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자신에게 적응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라도 슬픈 마음을 끌어내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다.
다시 느껴지는 혼란 속에서 허풍개가 말했다.
“영약 같은 걸 주실 필요는 없고. 혹시 몸 쓸 사람 안 필요합니까.”
“몸 쓸 사람? 누구요?”
“무공 익힌 유망주요. 지금 실력은 별론데, 앞으로 키워주면 상당히 괜찮아질 겁니다.”
“무공 익힌 친구라······. 이름이?”
“이도혁.”
박 회장은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금세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지. 설령 실력 없어도 받아주는 게 도리겠고 말이요. 내 기꺼이 받아주리다.”
“감사합······”
“고맙긴? 내가 고맙지. 마침 사람이 많이 필요하거든. 선생 부담 느끼지 말라고 빈말하는 게 아니야. 저기 저 친구······ 알지요?”
박 회장의 시선은 벽걸이 TV를 향해있었다.
허풍개에게도 이제 꽤 익숙해진 얼굴이 TV 화면의 정중앙에 있었다.
이록 검사가 연단에서 외치고 있었다.
「그 늙어빠진 산적 두목 새끼! 그놈이 해먹은 게 얼마고 그놈한테 빌붙어서 해먹은 놈들이 몇인데, 그 어느 검사 새끼도 그 인간들을 기소하려 않아요! 여야 할 것 없이 그놈한테 받아먹은 분들이 너무 많거든! 그래서 대충 조폭 새끼들만 빵에 처넣곤 사건 쫑내려고 그럽디다!
내가 그 꼴 못 보겠다고 이리저리 좆뺑이 치고 다니니까 내가 아주 검사들 사이에서 볼드모트가 됐습니다. 선배고 동기고 나랑 이젠 밥 같이 안 먹으려고 하더라. 뭐, 괜찮아! 그 더러운 새끼들 낯짝 보면 나도 구역질 나서 밥 도저히 못 처먹거든!」
요새 TV에서 저 검사의 얼굴을 지겹게도 자주 보았다.
이록 검사는 노래방 사건을 툭하면 들먹일 때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꽤 인지도가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날의 사건 이후로는 아예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록이 계속 외쳤다.
「세상에, 그동안 얼마나 사람을 쉽게 조져왔으면 황실 어른까지 납치해버릴 생각을 다 했겠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놈이 뒷산에 묻어버린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저기 여의도에 계신 분들이 받아온 돈이 바로 사람들 파묻어서 번 돈이지요!」
보면서 흐뭇한지 박 회장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새끼, 말 잘한다!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저 친구 후원해온 거지, 그래!”
「싹 다 명단을 공개해야 합니다! 절대, 절대 한두 놈 옷 벗기고 끝내선 안 될 일이에요! 국민 모두를 개돼지로 아는 게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내 시위라도 해달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발,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뉴스에서 이 사건이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여러분이 계속 이 사건을 기억하실 수 있도록 저 이록도 끝까지 이렇게 소리쳐댈 생각입니다!
이러는 게 검사의 본분이 맞냐구요? 이러다 정치라도 하려고 이러는 거냐구? 기자님, 우리 부장 검사님이랑 똑같은 말씀 하시네. 어제는 부장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나 그리 나대다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는 수가 있대.
살해 협박당한 거니까 그것도 기사 좀 써줘요. 혹시 나 죽으면 자살이나 자연사 같은 게 아니라 담가진 거라고 국민 여러분이 알 수 있게 말입니다」
“저 친구 지킬 경호원이 필요한 겁니까?”
허풍개의 물음에 박 회장이 대답했다.
“그렇지요. 저 친구 지금 일 열심히 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문고리에 목매단 채 발견되기라도 하면 곤란해.”
허풍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걸로 멍청한 사손 새끼 먹고살 길은 마련해준 셈이군. 무림 깡패가 될 수도 있었던 청년을 제대로 된 일에 꽂아준 것인 만큼 더욱 만족스러웠다.
이후로도 한동안 잡담을 나눈 뒤, 허풍개는 박 회장과 헤어졌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다솔에게 대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김다솔의 밝은 목소리가 휴대전화에서 들려왔다.
「오빠 분명히 살아있고, 오히려 보호받고 있다 이거죠?」
“그래요. 아무튼 아가씨와 다시 만나진 못할 것 같지만······”
「괜찮아요. 그걸 알게 된 것만 해도 어디예요? 돈도 못 드렸는데, 득 될 것 없는 일에 힘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대협!」
김다솔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일반인 사이에서 쓰이지 않는 호칭까지 써가며 감사를 표했다.
통화를 마친 뒤, 제 형님의 얼굴을 본 이풍이 눈을 크게 뜨며 물어왔다.
“어, 형님 지금 웃어요?”
“그런데 뭐.”
“아니, 형님이 누구 부탁 들어주고서 웃는 건 처음 보니까 그러지······.”
*******
이풍의 사무소는 완전히 문을 닫았다.
직원 박성철은 구십 도로 허리 숙인 채 사무소를 떠나갔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풍은 그가 혹시라도 불만을 품고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도록 퇴직금을 넉넉하게 주었다.
그리고 이도혁은 퇴직금은 받지 않기로 했지만 더 큰 것을 받았다.
대기업 소속의 경호팀에 들어가게 되다니? 기대한 적도 없는 일인지 그 사실에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이도혁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저는 도저히······”
“제자나 사손 챙겨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니까.”
허풍개는 담담히 말했지만 이도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래도, 제가 해드린 게 전혀 없는데······”
그리고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동안 해준 게 좆도 없긴 하지.”
옆에서 지켜보던 이풍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허풍개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뭔가 주긴 줬어.”
이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뭐를······”
“그것까진 알 것 없고. 아무튼 어서 가요. 오늘 면접이라매.”
그 말에도 불구하고 이도혁은 바로 떠나가지 않았다.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거듭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할 것 없다니까.”
이도혁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지금 일자리 꽂아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주신 모든 것에요. 제 할아버지를 구해주신 것에, 어린 저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이 세상 마지막 협객의 협행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협객이 철 지난 무협 소설에만 나오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셔서 감사드려요.”
허풍개가 눈썹을 꿈틀거리는 가운데 이도혁이 허리를 푹 하고 숙였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동안 절 데리고 다니면서 참 많은 것을 보여주셨지요. 그 덕에 제가 더는 협객이 되겠답시고 설치지 않게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실컷 보고 만족했으니까요. 그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도 잘 알게 됐고······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지금까지 해오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제 아버지한테 하는 말이 마음에 든 걸까? 납치 사건 이후로는 이도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던 이풍이 오랜만에 이도혁을 보며 웃었다.
“새끼, 거······.”
떠나가는 이도혁을 향해 이바람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나중에 명국 놀러와!”
직원 둘이 사라진 사무소는 텅 비어있었다. 책상이며 의자도 죄다 빼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날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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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혁이 그 친구는 만나봤나?”
“예, 회장님. 아주 싹싹하던데요.”
“챙겨줘. 말 좀 섞어보니 은사님 지인이더라. 내 은사님한테 무공도 직접 배웠다던데.”
“은사님이요?”
“무적비비탄. 나 어릴 때 잠시 나 돌봐주면서 무공도 살짝 가르쳐줬거든? 그 양반이 익힌 무공들이 어째 다 누구 족치지 않는 구성이길래 그냥 딴 사람한테 배우기로 했지만······.”
경호실장이 떠나간 뒤, 박 회장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지난 수십 년, 박 회장은 직접 무림 깡패들을 습격해보기도 했고 정치인들을 후원해보기도 했지만 숙원의 달성에 진전은 없었다.
언젠가는 무공 수련자의 폭력행위를 특수폭행으로 취급하여 형을 더하는 법안을 위해 후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기껏 큰돈을 쓴 보람도 없이, 그 법안은 거의 만장일치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부결되는 게 아닌가.
하기야 재벌가는 물론 정치인 자녀들도 양생을 위해 무공을 익히기는 마찬가지다. 자신들에게 해로울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는 없었으리라.
비슷한 이유에서 영약 거래를 국가기관의 감독하에 두자든가, 영약 거래에 더 많은 세금을 물리자는 법안 또한 통과된 적이 없다. 그때마다 박 회장은 그저 굴욕감에 몸을 떨었을 뿐이다.
그렇듯 실패만을 거듭해왔기에 이번 성공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달성감······.
박 회장은 문득 구자성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훌륭한 무림인이 한국에 또 있을까?’
그 말이 실로 불쾌했다. 그래서 더욱 맘에 남았는데, 이대로라면 그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혐오할 일은 없을 듯하다.
보라. 지금 자신은 완벽하게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무림을 몰아세우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녹림의 잔당을 말소하고, 그 후원자들을 끌어낼 것이다. 설령 높으신 분들을 옷 벗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무림 깡패들에게서 후원받았다간 욕볼 수가 있다는 교훈을 정계에 남길 수는 있으리라.
그 결과 높으신 분들과의 연계가 끊어진 한국의 무림은 그 영향력이 더욱 줄어들 것이요, 그 세력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한참 동안 즐거운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벨소리가 울렸다. 누가 전화했나? 밝은 목소리로 인사해줘야지.
웃으며 휴대전화에 손을 가져간 박 회장이 정색했다. 휴대전화에 떠오른 이름은 지금 한국을 떠나고 없을 예전 동맹의 것이었다.
라나 레반도프스카, 그 소녀의 해맑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귀를 파고들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해내신 일 들었어요! 정말 대단해!」
박 회장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없이 떠나시더라니, 갑자기 연락을 왜?”
「고맙다고 인사드리려구요!」
박 회장이 눈을 껌벅였다.
“무슨 소리야?”
「고맙다구요! 토떼모! 토떼모 고마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한테 왜 고마워?”
지금 느껴지는 불안감의 이유는 뭔가?
간단한 이유다. 마교의 수괴가 좋아할 만한 일이라면 자신에게 즐거울 일이 아닐 테니까.
과연 그러했다. 라나가 말했다.
「꽉 차 있던 한국 무림의 절반을 치워주셨잖아요? 드디어 우리가 들어갈 자리가 생겼어요!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손 떼려고 했는데, 이 얼마나 고마워?」
통화를 마친 뒤, 박 회장은 멍하니 있다가 TV를 켰다.
웬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부동산 뉴스였지만 그 뉴스를 보며 박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구자성의 초고층 호텔, 명국 종교단체에 인수 (······)」
구자성의 옛 소굴을 사들인 저 명국 종교단체가 불교나 도교 쪽이 아니란 것은 보자마자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히 백련교일 것이다. 확실했다. 뉴스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꺼리는 종교단체는 저밖에 없으니.
박 회장은 TV를 끌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생각했다.
무협 소설에서, 정파와 사파 양 무림 세력이 충돌하여 한쪽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되는가?
마교가 이긴다. 무림을 뒤에서 조종하는 암중 세력이란 늘 그리 이득을 보는 법 아닌가.
박 회장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허 선생? 나요. 급히 의논할 일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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