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6화 (86/103)
  • 의뢰인 김다솔 - [2]

    결국 중장은 설득하길 포기했다. 그가 떠나가며 중얼거렸다.

    “남들은 못 맡아서 안달인 일 거절하고······ 허풍개란 게 정말인가? 그 양반도 도사는 병(兵)을 부려선 안 된다느니 뭐니 하면서 국가사업 제안 죄 뿌리쳤다드만······”

    허풍개는 물론 이풍도 그 말을 들었다.

    이풍은 혀를 차더니 허풍개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어우 씨, 아주 그냥 소문 쫙 퍼졌네. 그래서 우리 의사님?”

    “나 허씨 아니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해요? 애초에 그 사실 숨길 이유가 있나?”

    허풍개는 눈을 부라리다가 조금 뜸 들인 끝에 말했다.

    “없긴 해.”

    “그렇죠? 무적비비탄이야 동네 건달들한테 상납받고 그랬으니까 숨겨야 할지 모르지만, 허풍개 의사님은 순수한 협객이었으니까 오히려 밝히는 게······”

    “뭐 이제 와서 굳이 밝힐 것은 없다. 이대로 모산파로 떠나면 그만이야. 너도 명국 갈 준비 끝냈냐?”

    이풍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거야 끝났죠.”

    “사업 정리 끝났고?”

    “예. 입 다물고 지내란 조건으로 상납하던 새끼들 다 자유롭게 해줬어요. 형님도 챙길 거 다 챙겼죠? 하기야 방에 들어가 보니까 이게 세 주려고 청소해둔 방인지 사람 하나 사는 방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휑하던데. 침술원 물건은 다 챙겼나?”

    “가서 침구나 좀 챙겨야겠다. 지금은 거기 사람 없지?”

    “예. 요새야 뭐······.”

    허풍개가 사무실을 내려가 침술원 앞에 섰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환자들을 돌본 지도 꽤 되었다. 만월산에서 번개를 내리치는 영상이 뉴스에 퍼진 이후로는 사람이 하도 몰린 탓에 영업을 중단했던 것이다.

    모산파에서까지 침을 들 일은 없을 테니, 백 년 넘게 해왔던 의원 노릇은 이제 끝일 것이다.

    또한 백 년 넘게 해왔던 협객 노릇도 이제 영영 끝이리라. 모산파의 장로를 해결사로 부려 먹으려는 사람은 명국에 없을 테니까.

    결국 지난 백 년의 활동을 모조리 그만두게 되는 셈이지만, 새삼 그 사실이 아쉽지는 않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모산에서 허허로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모산의 도관에서는 조용히 보낼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곳에서 혼란에 가득찬 머릿속을 정리할 것이다. 제자와 아내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천천히 생각해볼 것이다.

    허풍개가 사무소에 돌아왔다. 손님이 하나 더 찾아와 있었다.

    “저기, 이률 선생님? 제가 제대로 찾아온 거 맞지요?”

    이풍의 곁에 서 있는 것은 화장이 진한 젊은 여자였다.

    양복을 입은 걸 보니 퇴근하고서 온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해 보였다.

    이런 사람은 으레 골치 아픈 일을 가져오기 마련인데.

    “맞는데, 왜요.”

    “도와주세요.”

    역시 추측이 맞았다.

    “뭘 도와줍니까.”

    “남친이 실종된 지 몇 달 됐어요.”

    여자의 옆에서는 이미 이풍이 한숨 쉬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게 그 역시 탐탁잖은 모양이다.

    “아가씨, 이 친구 몸값 말도 안 되게 비싸요. 이 친구 하루 고용할 돈이면 흥신소 아재들 소대 단위로 모아다가 오래오래 부려 먹을 수 있어. 누구 찾을 일 있으면 경찰이나 그런 곳 찾아가요.”

    이풍의 말에 여자가 소리쳤다.

    “경찰엔 이미 신고했고, 흥신소에도 가봤어요! 하지만 거긴 못 도와준대요······.”

    “왜?”

    “무림에 얽힌 일이라서요. 잘못 건드리면 좆될 수가 있대요. 아무도 안 도와주니 혼자서라도 몇 달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찾아봤는데, 남친이 실종된 날에 여기 이률 씨가 함께였다던데요. 게다가 무림에서도 여기 이률 씨는 못 건드릴 거라 하고······”

    허풍개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친구 분 성함이?”

    “김지용이요. 기억하세요?”

    이풍이 신음했다.

    “김지용이면, 그······.”

    그 이름을 허풍개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히트맨, 스물아홉 명을 처리했기로 악명 높은 자객 놈 아닌가.

    *******

    여자, 그러니까 김지용의 여자친구는 자신을 김다솔이라고 소개했다. 여기 무적무적자와 관련됐음을 알아낸 뒤로는 매일같이 침술원에 찾아왔지만 하도 자리를 비우는 통에 오늘 겨우 만날 수 있었다고.

    “남자친구분이 무림인이었단 건 압니까?”

    “예. 몇 달 전에 김지용이 그 새끼 어디 있느냐며 사람들이 들이닥쳤으니까요. 그때 웬 조폭 같은 사람들이 저 묶어서는 오빠 불러내라면서 이런저런 협박도 했었는데요. 그때 뒤늦게 알았죠.”

    허풍개는 속으로 신음했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남자친구를 찾아내려 애써왔단 말이지? 그 정도 의지라면 대충 말을 좋게 해서 돌려보내기는 글렀다.

    “그래서, 오빠랑 같이 있으셨던 게······”

    “맞습니다. 명국으로 탈출시켜 달라는 걸 도와주려 했죠.”

    “지금 그 사람 명국에 있나요?”

    허풍개는 거짓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니요.”

    “그렇죠? 하기야 명국에 있다고 문자 한번 못 보낼 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살아는 있을 겁니다. 그건 확실해요.”

    “선생님은 그 사람 어딨는지 아시나요?”

    “짐작은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허풍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해온단 약속은 못 합니다.”

    “그럼······”

    “다만 알아는 봐줄 수 있죠. 정말 살아있다면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딱 그 정도만. 그걸로 괜찮습니까?”

    김다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도라도 도와주시면 감사하죠. 그런데 그러려면 사례비는 얼마나 드려야······”

    ”됐어요.”

    “예? 정말요?”

    김다솔과 함께 이풍 또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허풍개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 인간한테 꽤 큰돈 받아놓고 결국 명국에 못 데려다줬거든. 거스름돈 치 일이라 생각하지 뭐.”

    김다솔의 안색이 밝아졌다. 희망에 찬 얼굴,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줄 자신이 없었던 허풍개는 괜히 약속했나 후회했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다시 말하는데 데려오겠단 말은 못 합니다. 그냥 살아있는지 확인만 해보는 거예요.”

    김다솔은 그래도 괜찮다고, 그래주기만 하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그녀가 밝아진 표정으로 떠나간 가운데, 이풍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괜찮겠어요?”

    “왜, 공짜로 일하는 게 맘에 안 드니? 어차피 뜯어낼 돈도 없어보였어.”

    “그게 아니라. 이거 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지.”

    “어려울 게 뭐 있나. 그냥 알아만 볼 거라니까.”

    “형님 말대로면 김지용 그 새끼, 지금쯤 박 회장이 데리고 있는 거 아닌가? 그 양반 성질머리 생각하면······.”

    이풍의 말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괜찮아. 그 양반 지금 기분 좋아.”

    *******

    과연 허풍개가 찾아갔을 때 박 회장은 놀라울 만치 유쾌해 보였다. 늘 뚱해있던 그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게 아닌가.

    “이게 누구야? 어서 와요, 어서 와!”

    박 회장의 옆에는 그 무공 사부들이 늘어서 있었다.

    장 노사가 반갑게 웃는 가운데, 강남제일검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왔다. 허풍개도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박 회장에게 물었다.

    “리우이 그 분은 안 돌아왔습니까?”

    박 회장이 대답했다.

    “아, 그 양반. 폐관수련 실컷 하더니 화산파 돌아가선 다시 안 오겠대.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몸은 좀 괜찮고? 몸에 총알 잔뜩 박혀있었대서 내가 엄청 걱정했는데.”

    “덕분에 괜찮아요. 회장님은 평안하시고?”

    “나야 뭐, 황은이 망극할 뿐이지 뭐······”

    그리 말하며 박 회장은 껄껄 웃었다.

    그날 그곳에서 경찰과 충돌 끝에 돌입한 황군 병사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황제가 명목상 국가원수로서 그들을 사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덩달아 박 회장도 사면된 바였다. 이 역시, 황제가 월녀를 위해 힘써주었다는 이유로 사면한 결과였다.

    황제가 사면권을 쓴 것은 황태자가 음주운전으로 사람 둘을 치어죽였을 때 이후로 처음이라는데, 제 아들을 사면할 때야 황제를 끌어내리니 뭐니 말이 많았지만 이번 사면에는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론이 이토록 황제를 칭송한 것은 해방 이후 처음이었다고.

    결국 그날 그곳에서 구자성을 살해했으며 그 증거가 여럿 남은 마당이었지만 박 회장은 기소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 자신도 바란 적 없는 행운이라던가?

    “잘됐군요.”

    “정말이지 일이 다 술술 풀리지 뭡니까? 이게 다 여기 선생님이 그날 나 불러준 덕분이지요 뭐. 그래서 여긴 어쩐 일로?”

    허풍개는 최대한 무례하게 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물었다.

    “김지용이, 그쪽에서 데리고 있지 않습니까?”

    박 회장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웃음기가 돌아왔다.

    “맞아. 내가 데리고 있어. 그게 뭐?”

    “살아는 있는 거지요.”

    “살아있지, 물론.”

    “앞으로도 담글 생각 없고?”

    “내가 누구 담가서 뭐 득 될 게 있나?”

    “그래서, 그 친구 풀어줄 생각은?”

    이 물음에는 박 회장도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 앞으로 어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김지용 그 친구 풀어주면 곤란한 건 오히려 그 친구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김지용이, 저번에 보니까 전국에 수배됐더구만. 경찰들은 이미 그놈이 무림맹 히트맨인 거 다 파악한 모양이고. 내가 데리고 있는 게 오히려 그 친구한텐 안전할걸······.”

    “뭐 하려고 데리고 있는지는 말 안 해줄 겁니까.”

    허풍개의 물음에 박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아야 하나?”

    허풍개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무사하며 앞으로도 죽을 일이 없단 것만 알면 끝 아닌가. 이 정도면 일단 의뢰는 달성한 셈이다. 완벽한 달성은 아니지만 어쨌건.

    “그건 아닌데.”

    “뭐, 다 계획이 있어서 데리고 있는 거긴 해. 지금 일 잘 풀리는 거 보면 그 친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박 회장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돌아왔다.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얼굴.

    그날, 박 회장이 몸소 뛰어들어 칼을 휘두른 보람이 있었다. 모든 것이 박 회장이 바라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각 곳의 산채에는 빠짐없이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녹림의 불법적인 사업에 임하던 구성원 대부분이 기소된 가운데, 그들의 도박장에 드나들던 손님들의 명단이며 전화번호까지 경찰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마약을 하던 연예인들의 얼굴은 뉴스에 며칠 내내 나왔다.

    그날 구자성의 요청에 따라 호텔에 경관들을 보내준 경찰청장은 옷을 벗어야 했다. 그날 밤 구자성의 연락을 받은 의원들 또한 현재 그 이름이 공개되어 기자들의 질문 세례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들뿐만 아니라 녹림의 후원을 받던 의원과 군 장성들의 명단도 이미 검찰에 넘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녹림총채주의 죽음과 함께 녹림은 멸망했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이루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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