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5화 (85/103)
  • 의뢰인 김다솔 - [1]

    “그래서, 황군을 떠나신다고.”

    허풍개의 물음에 홍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책임을 통감하는 차원에서······.”

    확실히 이번 일에는 그녀의 책임이 컸다.

    구자성이 노릴지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서 홍나연이 제대로 조치했다면 월녀가 납치될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그러지 않고 고작 사람 한 명만 병실 앞에 세워둔 바람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허풍개는 홍나연과 얼굴을 마주하는 자신이 지금 담담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을 그만두면 그걸로 책임은 끝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날 병실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저 여자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왜?

    어쩌면 이번 일에 자신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리 시체 꼴로 드러눕지 않았다면 제자가 스승을 살리겠답시고 가진 바 모든 걸 줘버리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그날 본 광경을 자신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홍나연이 말했다.

    “부령직을 내려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몸은 어떠세요?”

    “그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그분 덕분에요.”

    사실, 그저 ‘좋은’ 수준이 아니다. 요새 허풍개는 자기 몸에 흐르는 기(氣)를 볼 때마다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만한 기가 정말 내 몸에 흐른다고?

    기를 건네준 월녀 본인, 혹은 마교의 그 못된 여자에게서나 볼 수 있던 양의 막대한 기가 지금 자신의 체내에 깃들어 있었다.

    1kg의 칼로리를 섭취했다고 해서 살이 1kg 늘어날 수는 없듯, 내력전수 또한 기를 온전히 전해줄 수는 없다. 흡수되지 못하고 도중에 소실되는 기가 막대한 법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고작 내력전수를 한 번 받았답시고 이렇게 된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기를 전해준 그녀를 생각하면 이 결과를 순수하게 기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역시, 슬픈 맘 또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허풍개를 당황스럽게 하고 있었다.

    허풍개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격하게 반응하는 것 같은데.’

    이곳 경희궁에서는 지금 월녀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명성과 국민적 인기가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므로, 여기 모인 인파 또한 궁을 가득 채웠다.

    아이고, 아이고. 귀를 울리는 곡소리. 제단의 도사가 도가의 주문을 읊는 가운데, 궁에 모인 사람들은 그 주문이 들리지 않을 만치 큰 소리로 통곡했다.

    현장 분위기라는 게 있는 법이요 슬픔은 전염되는 법이다. 가뜩이나 자신은 생판 남의 장례식장에 가서도 정말 숙연해지곤 하지 않았던가.

    과연 저 통곡을 듣기만 해도 허풍개는 저도 모르게 슬퍼졌지만, 그녀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도 조금 울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뿐이었다.

    슬픔 후에 찾아오리라 각오했던 지독한 우울증도, 제자의 생명을 전해 받았다는 수치심이며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풍개는 그날 본 월녀의 최후를 떠올렸다. 직접 보고서도 긴가민가했다.

    그걸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정말 만력제가 한 것과 같은 승천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그녀의 몸은 사라졌다. 시체의 소멸은 확실히 도가에서 말하는 시해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신선이 된 것일까?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가 육체를 잃은 것은 확실한 일이요, 육 잃은 혼백이 어디로 갈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고작 혼백만 가지고 어디에서 뭘 하고 지낼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혹시 그 혼백은 평생 차가운 우주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우주 저 어딘가에 선계(仙界)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서야.

    하지만 정말 도 닦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그런 편리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을까? 영혼의 존재는 물론 사후세계의 존재 또한 의심하는 허풍개로서는 선뜻 믿기 어려웠다.

    괜히 자신이 육체를 지닌 채 신선이 되길 소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

    이어서 자신의 아내를 떠올렸다.

    기현상을 보이며 나름대로 화려하게 떠나간 월녀와 달리 아내는 그리 근사하게 떠나지 않았다.

    아내는 죽기 전에 고생하며 대변을 줄줄 흘리다가, 허풍개가 반나절 내내 더러워진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히고서야 그 시체가 불타 사라졌다.

    그 역시 도가 서적에서 말하는 시해의 방식 중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얼마 전에 본 그것과 비교하면 수수해도 너무 수수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 역시 시해가 맞을까? 그렇다면 그날 본 그녀의 모습은 시해선이 된 아내의 영혼이었을까, 아니면 역시 약해진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각에 불과한 것일까?

    이 역시 알 수가 없다. 모든 현상이 너무 난해하고 처음 보는 것이어서 도저히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모산파에 상담을 요청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저,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어찌 답변을 드릴 도리가 없군요.’

    ‘왜?’

    ‘그 누가 감히 진인보다 도(道)에 대해 가르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본산의 그 누구도 진인보다 더 높은 도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고 더 깊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분수를 안다면 잠자코 입 다물어야 할 듯합니다.’

    하기야 요새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무적무적자를 상대로 조언을 하기는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무적무적자 본인이 어찌 느끼고 있건 남들이 보기에는 그 경지가 높아도 너무나 높아 보일 테니까.

    누가 감히 번개를 내리고 칼을 의지만으로 부리는 도사보다 도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월녀마저 떠나버린 지금, 이 세상에서 최고의 도사는 정말로 허풍개 자신이 맞았다. 제기랄.

    결국에는 스스로 모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 결론이 옳은지 틀린지도 알지 못한 채.

    이 순간, 허풍개는 혼란과 함께 불안감을 느꼈다. 상의할 사람도,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혼자라는 고독함이 뒤늦게 찾아왔다.

    허풍개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홍나연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예?”

    “허풍개 의사님?”

    허풍개는 짜증스레 대꾸했다.

    “나 허 씨 아닙니다.”

    “아, 예.”

    “그래서 뭔 용건이 남았습니까?”

    “그게,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홍나연이 천에 감싸인 길쭉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포장된 물건이었지만 허풍개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그분이 남기신 칼이에요. 시해 뒤에 남기신 유품이요.”

    홍나연이 칼을 내밀었다.

    “상의 끝에 선생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허풍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걸 저한테 왜? 황실의 보물로 간직해야 할 물건 아닙니까.”

    “황실이 소유권을 주장하긴 좀 그렇죠? 사인검과 거의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그분이 지니고 계시던 그 칼과는 별개의 칼이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순수하게 그분의 유품인 셈인데······

    그분의 물건을 받을 자격이 누군가에게 있다면, 그건 그분께 가르침을 내려주시고 백 년 넘게 함께 해온 도해선인뿐이겠지요.”

    어느새 월녀의 스승이 허풍개란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하기야 그날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허풍개가 말을 흐리는 가운데, 홍나연은 억지에 맞춰주겠다는 듯 살짝 웃었다.

    “아니면 도해선인 그분의 후계자거나요.”

    허풍개는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야, 감사히.”

    *******

    건네받은 칼을 소중히, 아내가 남긴 칼 곁에 두었다.

    떠날 때 가지고 갈 물건이 하나 늘었다.

    *******

    “형님?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시는데.”

    사무실에 들어오니 이풍과 함께 웬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범상치 않은 남자였다. 남자가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명성 높은 선생님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허풍개는 남자의 명함을 보았다.

    육군 특수전사령관이라고 적혀있었다. 계급은 중장.

    “군 장성분이 여긴 왜?”

    중장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제안을 드릴 게 있어서요. 국가 프로젝트를 이끄실 기회입니다.”

    “국가 프로젝트?”

    중장이 자랑스레 말했다.

    “국가에서 전담하는 고수 육성 프로젝트입니다. 무공 익힌 특수부대원을 키우는 거지요. 선생님을 거기 모시고 싶어요.”

    허풍개가 눈을 껌벅였다.

    “나라에서 고수를 따로 육성하지 않게 된 지 꽤 됐다고 아는데.”

    “한 백억쯤 들여야 한 명 겨우 키울 수 있는 것부터가 너무 비싸니까요. 세상에, 병사 하나 몸값이 전차만큼 비싼 게 말이 됩니까? 그것부터가 가성비 최악인 일인데, 겨우겨우 천문학적인 돈 들여서 키워봤자 의무복무 마치고는 죄다 튀어버리기 일쑤예요.

    공군 파일럿도 한 십억쯤 들여 키워놓으면 죄다 민간 항공사로 떠나버려서 골치인데, 백억 넘게 들여 키운 놈들이 충성하긴커녕 돈값 하기도 싫어하니까 허탈해서 원······”

    중장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요새는 특수부대 전역한 후에 황군 복무를 보장해주니까 그나마 민간에서 모집이 되긴 한다느니. 덕분에 무공 익힌 특수부대원은 어찌어찌 충당되는 판이지만 그마저 비싸서 직접 키우겠단 것은 꿈도 꾸지 않는 마당이라느니.

    거기까지 말하고서 중장이 씩 하고 웃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 다시 고수를 키워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지요.”

    “왜?”

    “다름 아닌 눈앞에 계신 분의 활약 덕 아니겠습니까?”

    중장은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양 껄껄 웃더니 말했다.

    “이번 사건만 해도 총 쏜 놈 수십 명을 상대로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보고 놀라서 다른 영상도 찾아봤더니 글쎄, 총알을 튕겨내시는 건 태연하게 하시는 모양이고요.

    우리가 여러 영상 돌려보면서 어찌나 감탄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세상에, 무공 익힌 초인이니 뭐니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요. 물론 선생님 만한 고수가 또 생겨나리란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런 고수가 직접 육성한다면······”

    절세고수의 영상은 워낙 명국에 인기가 좋아서 이번 사건에서도 몰래 돈을 받고 팔아넘긴 놈들이 꽤 있다던가? 만월산에서의 CCTV 영상 또한 명국에 유출되어서는 역으로 다시 한국 군인들이 감상한 모양이다.

    이후로도 중장은 한참이나 칭송을 늘어놓았지만, 허풍개는 듣다 말고 말했다.

    “좋은 제안 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죄송하게도 거절해야겠습니다.”

    “예? 왜요?”

    “한 달 뒤에 모산파에 갈 거라서.”

    거절당하리라곤 상상도 못한 걸까. 중장이 눈을 껌벅였다.

    “아직 정식계약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일이 년 더 미룰 수 있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군요.”

    “모산파인가 거기 친구들이 좀 미뤄졌다고 계약을 엎을 것 같지도 않은데요. 요새 선생님 이름이 군바리인 제 귀에도 들려올 정돈데, 무공에 미친 놈들이 선생님이 언제 오신다 한들 절하고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쪽에서 용납해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되겠습니다.”

    “아직 프로젝트를 맡아주시는 대가로 드릴 돈을 말씀 안 드린 것 같은데. 천억 넘는 계약을 앞두신 건 압니다. 하지만 군에서 드릴 금액도 상당히······”

    “액수야 어떻든.”

    허풍개의 단호한 대답에 중장은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모산파로 떠나신다 치고······ 반년도 안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이바지하실 기회인데요!”

    그러나 애국심에 대한 호소조차 소용이 없었다.

    “딱히 한국에 이바지하고 싶진 않군요.”

    “아니, 뭐 한국에 미련이나 그런 것도 없으십니까? 아무리 애국심이 없으시기로 하니······.”

    그리고 허풍개가 말했다.

    “내가 보기보단 나이가 많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중장이 요새 들려오는 눈앞의 도사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는 가운데, 허풍개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어릴 때는 말입니다. 김치가 너무 비쌌어. 요샌 왠지 김치만 덩그러니 있는 밥상이 가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던데, 옛날에는 배추며 고춧가루도 엄청나게 비쌌지. 부자들이나 먹는 거였어.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요즘엔······”

    “더 나이가 드니 김치가 좀 싸지긴 했지만, 그즈음엔 수행을 시작한 지 꽤 돼서. 오신채나 자극적인 음식을 못 먹으니 김치도 먹을 수 없었죠. 그래서 내 몸에는 마늘 냄새가 안 납니다. 삼계탕도, 삼겹살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어요.”

    말하면서 허풍개는 왠지 모를 그리움을 느꼈다. 이런 화제의 대화를 누구랑 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월녀와 했었다.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그녀.

    허풍개가 웃었다.

    “이 땅의 아무것도 그립지 않을 겁니다.”

    허풍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모산파로 떠나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땅에는 더 미련이 없었다.

    아내는 죽은 지 오래요, 자식의 유골함은 산적들과 한 판 붙기 전에 따로 챙겨두었으니 모산파로 떠날 때 챙겨가면 되었다.

    이 와중에 모산파와의 계약을 앞당기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던 것은 딱 하나, 월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없는 지금, 이제야말로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었다.

    작가의 말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재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글이었는데...

    언제나 봐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정-----

    허풍개냐 물으면서 저런 제안을 하는 건 부자연스럽단 분이 계셨고, 그 말씀이 옳다고 느껴져서...

    대뜸 허풍개냐 묻는 장면을 지우고, 금액을 말하려는 장면을 추가했습니다.

    그러나 무적무적자가 허풍개 본인이란 소문이 흐른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시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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