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4화 (84/103)
  • 하아린 - [2]

    유난히 다사다난한 한 해였지만 이번 사건만큼 한국을 들썩이게 한 것은 없었다. 노래방에서의 총격전도, 총기로 무장한 중학생들의 습격도 충격적이기로는 지금에 비할 수 없었다.

    그 행적만으로도 영화며 드라마를 몇 편이고 찍을 수 있는 국민적 영웅이, 그보다는 못해도 명성이 드높았던 또다른 영웅에게 납치당한 사건 아닌가. 그 둘 모두가 국민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던 만큼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더욱 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이 사건을 역사서엔 뭐라고 적어야 할 것이냐. 온갖 말이 떠들썩하게 오가는 가운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관심은 한 병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사 하나가 누워있는 병실이었다.

    *******

    그날 구자성이 데려온 산적 놈들은 총알을 참 많이도 쏘았다. 병실에 드러누운 채 허풍개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몸에서 나온 총알들로만 탄창 두 개는 채우겠는데요. 복부총상만 셋······”

    의사의 말에 이풍이 억울한 듯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 억울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혼미한 와중에 횡설수설하니 정확히 뭐라 떠드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흐느낌 속에 섞인 단어 하나는 알아들었다.

    “······아버지······”

    아주 다 까발리네. 저 멍청한 새끼.

    귀가 울리니까 그만 입 좀 다물면 안 되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황군 병사들의 능숙한 지혈에도 불구하고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갔으며 총알은 중요한 부위에도 박혔다가 빠져나간 마당이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열어 뭐라 말하기는커녕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이풍은 한참 동안을 그 앞에 앉아서 울고 있다가 병실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가운데 어둠이 깔렸다. 그러자 사무치는 외로움이 닥쳐올 줄은 미처 몰랐다. 외로움 따윈 잊은 줄 알았는데.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이풍 저놈과 통화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지 않은가······.

    허풍개는 갈수록 흐려지는 의식을 어떻게든 붙잡고자 애썼다. 이대로 눈 감고서 다시 눈을 뜰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사지의 감각은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었다.

    애써 잡고 있던 정신 또한 수마가 찾아온 듯 흐려졌다. 모든 것이 흐리멍덩한 가운데, 그녀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어둠 속에 아내가 보였다.

    정겨워야 할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허풍개는 겁을 먹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슬픈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허풍개는 그녀가 손짓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리 오라고? 안 돼.

    ‘난 당신한테 못 가. 나는······’

    허풍개가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어······ 당신이 한 게 등선이 맞는지······ 정말 등선한 거라면 그게 죽음과 뭐가 다른지도······ 그래서 거기 가기 무서워, 미안해.’

    아내는 여전히 말이 없는 가운데 허풍개는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다. 죄인과 같은 흐느낌.

    ‘내가 너무 미안해······’

    그리고 그때, 아내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그 손가락이 저 앞을 가리키는 것을 허풍개는 보았다.

    그 손가락이 대체 뭘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을 보기 위해 허풍개는 애써 정신을 집중했다.

    허풍개는 눈 감은 채로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의식이 돌아온 허풍개에게 보인 것은 병실에 나타난 절세고수의 기였다.

    월녀, 하아린이 저기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어느새 들어온 걸까?

    “사부는 왜 맨날 다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육조거리에서 재회했을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기억나? 지금은 그때보다 심각하네. 그때처럼 잘난 제자의 지원이 필요하겠어.”

    얼어붙은 사지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 순간, 허풍개는 혼자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속으로 비명 질렀다. 그녀가 여기 왜 왔는지 짐작이 되고 있었다!

    “일제시대가 지금보다 낫다고 말한 적 있잖아? 사부가 그래서 방송국 쳐들어갔고. 너무 미안해서 저번에 만났을 땐 못한 말인데······”

    대체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거기 신경 쓸 수도 없었다.

    꺼져, 기지배야. 꺼지라고······.

    “내가 망언한 게 맞아.”

    하아린이 웃었다.

    “이 나이 먹고서야 알겠네.”

    그때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다.

    기를 보아하니 이도혁이군. 저번에 영약을 받아먹더니 그 기가 꽤나 늘었다.

    “상태가, 어떤가요?”

    이도혁의 물음에 하아린이 대답했다.

    “내가 의원이 아니니까 의학적으로 답해줄 순 없고, 기공(氣功)적으로 말하자면······ 진기가 너무 많이 빠져나갔네.”

    “그 말씀은?”

    “이대로는 죽어.”

    “혹시 그 빠져나간 기를 남이 전해줄 수 있는 거라면, 제가······”

    닥쳐, 병신 새끼야.

    허풍개가 속으로 욕하는 가운데 하아린이 말했다.

    “뜻은 장하지만 턱도 없을 것 같구나. 이 양반, 못 본 사이에 약 꽤 먹었나 봐. 네가 가진 기를 전부 퍼부어봤자 티도 안 날걸. 그러니까······”

    하아린과 눈이 마주친 허풍개가 죽을힘을 다해 입을 뻐끔거렸다.

    안 된다. 뭘 하려 하든 안 돼.

    그러나 여전히 입은 움직이지 않았고 하아린이 계속 말했다.

    “사부? 저번에 제안했던 걸 해줄게.”

    하아린은 지금 내력전수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백이십 살을 넘겼다. 평범한 인간의 수명을 아득히 넘긴 셈이었다. 이 와중에 치료를 하겠답시고 대량의 진기를 줘버리면 죽을 것이었다. 확실했다.

    “눈 뜨면 지랄할 거지? 제자 잡아먹은 스승으로 만들었다고······ 그럴까 봐 말해주는 건데, 난 지금 사부를 위해 희생하려는 게 아냐. 사부 맘 아플 텐데 어떻게 그러겠어?”

    그럼 뭔데, 미친년아.

    “가르쳐주려는 거지.”

    건방진 웃음소리.

    “때로는 스승도 제자한테 배워야 하는 법이야.”

    하아린이 말했다.

    “눈 감은 채로도 볼 수 있지, 사부? 보고 있으면 좋겠네.”

    그 말을 끝으로 병실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를 배려했는지 조용한 발소리들이었지만 그 수가 꽤 많았다. 그날 함께 했던 황군 사람들일까?

    그들이 월녀를 구한 의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월녀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후자라면 말려라, 제발······.

    “백이십 년을 살았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하아린이 말했다.

    “조국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강산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탄생을 보았고 때로는 거기에 관여하기도 했지요.”

    하아린의 손이 허풍개의 가슴에 닿았다. 허풍개는 그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값진 지식을 쌓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혜로워지지는 못했습니다. 백 년의 수행 끝에 늙은 도사의 머리에 남은 것이라곤 과거와 미련뿐이었으니······”

    그녀의 손끝으로 따뜻한 기운이 집중되었다. 그녀의 모든 체내 기가 그 손바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한 가지 사실은 알았어요.”

    내력전수가 시작되었다.

    “나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허풍개는 자신의 모든 혈관과 림프액에 정갈한 기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삼단전이 소용돌이치고 내면의 번개가 다시 번뜩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주린 목에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도저히 환희할 수 없었다.

    “사실은 진작에 끝났으니 오래전에 떠났어야 하는 건데, 그러질 못해서······ 이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늙은이의 머릿속 과거는 미화되었지요. 미화된 과거에 비추어 현실의 삶은 고통이 되었고 나는 추해졌는데······ 당신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

    허풍개는 지금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기를 거의 다 주어버린 그녀의 체내에 남은 기는 초라했다.

    월녀의 말도 안 되는 젊음은 그 체내 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의 피부 또한 쪼그라들었을까? 아름다웠던 그녀의 늙은 모습을 차마 볼 수는 없었다.

    “도가에서 말하길, 저 밤하늘의 별들에 천상의 신들이 진좌(鎭坐)하지. 할 일을 마친 도사는 죽어 신이 되니······ 우리의 삶을 저 별들이 증거해.”

    눈 감은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성대 또한 말라붙었을 텐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청량했다.

    “사부, 보여? 여기 새겨진 별의 바다를 봐.”

    뭘 보라는지 허풍개는 알 수 있었다.

    눈이 뜨이지 않아서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가 취한 자세를 보니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듯했다.

    그 손에 들린 검은 당연히 사인검일 것이었다. 28수 별자리가 새겨진, 밤하늘을 담은 검이다.

    “도해선인이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바다야.”

    다음 순간, 허풍개는 하아린의 몸에서 자신의 몸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남들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도해선인이, 이번만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건너야 할 바다······.”

    진기가 빠져나간 그녀의 몸에 원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한 인간을 가득 채울 만한 양의 원기였다.

    도가에서 말하길, 원기는 천지가 생겨나기 전에 있던 태초의 기다. 혼원의 기, 대우주의 기.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도사는 우주와 일체가 될 수 있다.

    이윽고 모든 진기가 빠져나간 그녀의 몸에서 생명은 떠나버렸다.

    그녀의 몸이 쓰러지는 그 장면을 허풍개는 차마 볼 수 없었다. 허풍개는 눈 감은 채로도 그 장면을 외면하려 했다.

    그 순간, 그러지 말라는 듯 아내의 손가락이 흔들렸다.

    분명 환영이기에 지금쯤 사라지고 없어야 할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여기 남아있다는 사실에 허풍개는 지금 놀랄 정신이 없었다. 그저 아내의 손가락이 아직도 가리키고 있는 곳을 보았다.

    하아린의 몸을 잠시나마 가득 채웠던 원기가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아내의 손가락이 위로 올라갔다.

    하나로 뭉친 기가 소용돌이치며 저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단어가 허풍개의 뇌리에 떠올랐다. 용오름.

    이윽고 기가 저 우주를 향해 치솟는 것을, 기의 형상이 떠나기 전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한 여인의 모습을 취하는 것을 허풍개는 보았다.

    그 손이 살짝 흔들리는 듯하더니 결국에는 그마저 사라졌다.

    그렇게 하아린이 완전히 떠나가 버린 가운데,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내의 형상 또한 그와 함께 사라졌다. 허풍개는 그 옷깃이라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이 움직였다.

    “선생님?”

    허풍개는 자신의 몸에 기운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청각 또한 비로소 온전해졌는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 황실 인사들이 꽤 몰려온 모양인데 어째서? 다들 숨죽이고 울고 있기라도 한가?

    불편한 자리였지만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척할 수야 없었다.

    허풍개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떴다.

    하아린이 그곳에 없었다. 시체조차 없었다.

    “그녀는······.”

    하아린의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다만 칼 한 자루, 별처럼 반짝이는 검 한 자루뿐이었다. 시해하는 도사들이 으레 검을 남기고 떠난다는 도가 서적의 구절이 문득 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홍나연이 중얼거렸다.

    “눈 한 번 깜박이고 나니, 그분이 사라졌어요. 그분의 시체가······.”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심지어 도가에 해박하지 않은 사람들도 방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보았다. 도사들이 바라마지 않는 그것, 하지만 허풍개가 바라지 않는 형태로서의 그것이었다.

    아무런 표현의 과장 없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월녀가 원하던 세상이 아니었다.

    월녀는 독립운동가이기에 앞서 황실의 인사였다. 그녀에게 민주주의니 입헌군주제니 하는 것은 반역도당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오랜 투쟁 끝에 그 헛소리가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그녀가 다시 세우려던 황실은 껍데기만 남은 가운데, 그녀는 다시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철 지난 왕정복고주의자의 발버둥에 불과했다.

    온갖 정치적 갈등 속에서 지난 세월에 대한 회의감만 지독해졌다. 우울증에 빠진 그녀는 자신을 위한 궁에 칩거했다.

    그대로 수십 년이 흘렀다. 어느 날 궁에 찾아온 기자를 상대로 망언을 지껄였고, 그 일의 여파로 스승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더없이 망연자실하여 그녀는 몸 하나 꼼짝하지 않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지내게 되었다. 치매는 그리 산송장처럼 있는 사이에 찾아왔을 것이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흘러, 스승과의 재회와 이후에 있던 몇 가지 일이 오랜만에 기쁨을 주었다. 약간이나마 맑아진 머리로 오랜 수행을 마무리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아린은 등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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