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3화 (83/103)
  • 하아린 - [1]

    월녀는 현시대의 천하제일인이요, 그녀를 존경하는 한국인들은 진지하게 그녀야말로 고금제일인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고금제일인으로 여겨지던 만력제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겨룰 수 있으리라고.

    그 주장에 자존심 높은 명국인들은 개소리 말라며 발끈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주장을 아예 무시해버릴 만큼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만력제는 월녀만큼 무인에게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진 않았다.

    월녀가 호텔 복도를 걸었다.

    그녀보다 앞질러 날아간 사인검이 마주친 적들을 베고 찌르고 베었다.

    그 칼은 말 그대로 무적의 고수였다. 저 홀로 날아다니는 칼에는 급소가 없다. 혹여 그 칼의 공격을 막아낼 순 있더라도 반격할 수가 없는 셈이다.

    그러니 상대하는 자들은 어쩌겠는가? 하염없이 막아내기만 급급하다가 결국 어처구니없는 지점에서 날아온 일격에 신체 어딘가를 잘려버릴 수밖에.

    간혹 날아다니는 칼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거나 피해내서는 죽을힘을 다해 복도를 달려, 기어이 그 너머의 월녀에게 도달한 녹림도도 있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한 손에 검을, 다른 한 손에 권총을 쥔 월녀의 모습이다.

    그리고 눈 깜짝일 틈도 없이 그것으로 끝이다.

    월녀의 권총에서 총성이 울리고는 비명이 뒤따르지 않는다. 월녀는 언제나 적들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쓰러지도록 허파를 맞히곤 하는데, 그것은 시야에 적이 포착된 순간 바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녀는 절세고수이고 그 초인적인 반응속도는 음속을 넘어선 총알에도 반응할 수준 아닌가. 그 사격 속도 또한 반응속도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FPS 게임을 해본 게이머이라면 그녀의 사격을 보고는 적이 사선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조준과 발사를 끝내버리는 에임핵을 연상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치고는 너무나 빠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무인답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무인들은 총을 썼다. 그 옛날은 고아하게 무예만 연마해도 좋을 시대가 아니었고 황실의 무인이요 절세의 고수인 월녀도 검무나 추어댈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총 다음으로 검이 익숙하다. 황군 고수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친 것은 월녀 본인이기도 하다.

    “으아아아!”

    그리고 지금처럼, 여럿이서 돌격하여 기어이 양옆의 동료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와중에 그녀 앞에 도달한 누군가가 있으면, 그제야 월녀의 손에 들린 검이 휘둘러진다.

    절세고수의 검이다. 총알만큼이나 신속하고도 그보다 예리한 검.

    모산 태극검법이 휘적거리는 움직임을 몇 번 보이고 나면, 그제야말로 끝이다.

    월녀는 심장을 찔린 적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적의 몸이 쓰러지는 중에 거기 파고든 검을 뽑아내고는 계속 걸었다.

    간혹 마주친 급사나 손님을 쏴 맞히는 일은 결코 없었다. 월녀는 손에 흉기가 들린 이들만 정확히 쏘거나 베어버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녀가 걷는 속도가 곧 녹림도들이 쓰러져가는 속도였다. 기관총이며 수류탄 없이 그녀를 막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구자성은 위층에서 들리는 총성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시절에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와 맞설 자신은? 전혀 없었다. 구자성은 분대를 거느린 일본의 절세고수 둘과 마주치고도 월녀가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와중에 호텔을 포위하고 있던 황군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엎드려!”

    위층과 아래층 모두에 들려오는 창문 깨지는 소리. 쩌렁쩌렁한 사자후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기어이 황군이 진입한 것이다. 지금까지 경찰들이랑 눈씨름이나 하던 놈들이 지금 와서 왜?

    정말 여기에 월녀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마당 아닌가. 그러니 더는 거리낄 것 없게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구자성이 알지 못했다. 그저 그 이마에 흐르는 땀이 한 줄기 늘어났을 뿐이다.

    구자성은 멈춰선 채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저기서 멀어져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구자성이 뒤돌아서려던 순간, 매화 향기가 코를 찔러왔다. 향기가 너무 강해서 고약할 만치 느껴질 향기였다.

    그 향기를 맡고도 박 회장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는 불가능했다.

    코를 틀어막으며 구자성이 이를 악물었다. 저 미친놈이 기어이 경관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왔군.

    과연 뒤돌아선 그곳에는 박 회장이 있었다. ‘탁’. 구자성은 바닥에 도끼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항복.”

    박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항복이요. 모든 죄를 인정하지요. 잡아가요.”

    박 회장은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도끼 들어.”

    “나 잡아가라니까? 내가 월녀님을 납치한 게 맞고······”

    “감방에서 조직 운영하는 두목 새끼들 여럿 봤지. 그러는 꼴을 볼 것 같으냐?”

    “이봐요, 이 일 끝나고서 녹림을 내가 어떻게 운영해? 우리 산채들 주춧돌이나 남아날지 의심스러운 판인데.”

    박 회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항 좀 해보고 뒤질 테냐, 그냥 뒤질 테냐.”

    그제야 구자성은 박 회장의 얼굴을 보았다.

    흥분으로 충혈된 박 회장의 눈이 보였다. 그 눈은 기괴할 만치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흔히 1000야드의 시선이라 부르곤 하는 눈이다.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를 여러 번 치러본 구자성도 저런 눈을 한 남자들을 자주 보았다.

    과도하게 분비된 아드레날린으로 번들거리는 박 회장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저 꼴을 한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지 아마.

    구자성은 어쩔 수 없이, 도끼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싸워 이기려는 마음은 더는 없었다. 그저 황군이나 경찰이 와서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박 회장을 저지할 때까지 버텨보겠단 맘뿐이었다.

    그 와중에, 어?

    구자성의 손이 도끼에 닿은 순간, 박 회장이 박찼다. 처음부터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듯한 돌격이었다.

    “씨······!”

    구자성이 기겁했다. 도끼를 들라던 게 정정당당하게 끝장내겠단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구자성은 부랴부랴 도끼를 휘둘러 그 진로를 가로막았지만 자세가 불안정해도 너무 불안정했다. 계단 위 고지대에 있다는 이점 따윈 기습당한 지금은 없었다. 어떻게든 박 회장의 칼질을 막아내기 급급할 뿐이었다.

    이 와중에 박 회장은 인정사정없었다. 무당파의 삼봉 태극검법과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 그리고 화산파의 매화검법. 지난 수십 년간 죽어라 수련해왔지만 막상 사람을 죽이기 위해 쓸 일은 없었던 명문정파의 검법들이 무자비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하늘을 가를 듯 웅장하게 허공을 가르던 창궁무애검법의 초식이 한 호흡만으로 열두 번을 찔러오는 매화검법의 환검(幻劍)으로 순식간에 전환되는 것을 보며, 구자성은 대체 어찌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구자성은 도끼를 휘두르며 막아내고 또 막아내었다.

    그러느라 너무 격하게 움직인 탓일까? 도끼를 들어 올리던 구자성이 비틀거렸다.

    가슴 한복판이 욱신거렸다. 오늘 무적무적자에게 격타당한 자리였다.

    이대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구자성은 비틀거리며 한 손을 내밀어 다시 한번 항복을 표시하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박 회장의 접근을 막기 위해 허우적거리듯 도끼를 내리쳤다.

    그런데, 어라? 도끼날에 닿는 감촉이 있었다. 도끼가 적의 몸 어딘가에 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느리고 허약한 도끼질을 못 피할 수가 없는데······.

    놀라거나 당황할 틈은 없었다.

    “어······ 그······”

    구자성은 자신의 배를 파고든 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칼에 연결된 박 회장의 손을 보았다. 자신의 등에 삐죽한 칼끝이 빠져나왔으리란 것은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억······”

    박 회장이 칼을 쥔 손을 구십도 회전시키자 칼 또한 구자성의 뱃속에서 뒤틀렸다. 내장이 헤집어지는 과정에서 구자성의 입에서는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구자성은 애써 고개를 들어 박 회장의 얼굴을 보았다. 팔뚝에 도끼가 살짝 박힌 와중에도 박 회장의 안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생각을 알 만하다. 도끼에 찍힌 상처를 내보이고는 일방적으로 살해한 게 아니라 치고받는 결투의 결과였노라고 주장할 모양이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충분히 감형받을 만한 일이다. 어쩌면 정말 무사 방면돼버릴 수도······.

    박 회장이 말했다.

    “죽인댔지, 새끼야.”

    그래, 확실히 이제 살아남지 못할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구자성이 억지로 웃었다. 침과 피가 완전히 섞여버린 입을 열어 말했다.

    “무림인을 죽이고 싶댔나?”

    “그런데?”

    “그럼 그 칼로, 네 목을 찔러.”

    구자성이 입에 고인 피를 토해냈다. 박 회장의 어깨에 묻었다.

    “더러운 새끼가.”

    박 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구자성은 의식이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최후의 힘을 짜내어 말했다.

    “너는 관을 무시하고 사람을 패고 다니지······ 자기가 법 위에 있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어. 좋을 대로 사람을 패고 찌르고 다니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정의롭다는 듯 으스대. 관부는 그러는 널 막지 못해······ 그러는 족속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아나?”

    박 회장은 그 답을 알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무림인.

    구자성만 계속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무림인이 한국에 또 있을까? 무림의 자랑스러운 후배야, 이 선배에게 인사를 올려보······”

    말하다 말고 가슴을 걷어차인 구자성이 뒤로 쓰러졌다. 창자가 튀어나오려는 그 배를 짓밟으며 박 회장이 중얼거렸다.

    “난 무림인 따위가 아니야, 자식아.”

    머리가 새하얘지는 고통 속에서도 구자성은 적을 비웃으려 애썼다.

    “왜에······?

    “그야 난 무림인이 아니니까. 내가 사람 담가서 돈 버나?”

    구차한 대답, 구자성이 낄낄거렸다. 웃음을 토해내던 그 입이 쩍 하고 벌려지다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구자성이 죽었다. 구십 년 넘게 한국 무림의 절반을 지배해온 남자의 죽음이었다.

    박 회장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칼날에 묻은 피와 기름을 닦아내었다.

    그때 저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 회장은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올리다 말고 계단 위의 인물을 확인했다.

    박 회장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월녀님.”

    월녀는 쓰러진 구자성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죽인 걸로 하지.”

    그 말뜻을 알아들었지만, 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마는 월녀님, 요새 검시관들이 일을 잘한다는 걸 생각하면 어림도 없을 것 같군요. 애초에 제가 죽인 걸 숨기고 싶지도 않아요.”

    “왜?”

    “이건 모두에게 자랑할 만한 공적 아닙니까? 이 천서인이가 기어이 저 산적 두목을 죽였습니다. 맘 같아선 세상 사람 모두한테 소리 질러 자랑하고 싶어요······”

    월녀는 박 회장에게 뭐라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월녀님!”

    뒤늦게 이 장소에 도달한 황군 병사들이 그녀를 발견했다.

    그들은 자기네가 구해낼 것도 없이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났다는 사실에 놀랐다. 경외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월녀는 그들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다가 넌지시 수고했다는 말을 던졌다. 그 한 마디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잠시 후, 월녀가 호텔을 나오자 온갖 카메라 불빛이 쏟아졌다.

    무표정하던 월녀의 얼굴은 그제야 변화를 보였다. 약간의 찡그림.

    방금 황군과 한바탕 몸싸움을 벌였다가 밀린 탓에 씩씩거리던 경관들도 월녀를 보고는 흠칫했다.

    저 역사적 위인의 존재만으로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황군의 주장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경관들 또한 황급히 허리를 숙이는 가운데, 월녀는 황실의 차에 올랐다.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홍나연에게 흘긋 물었다.

    “그래서, 내가 잡혀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월녀가 제 스승이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 지금은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칠 분 후의 일이었다.

    홍나연이 맹세컨대, 월녀가 이렇게 눈을 부릅뜬 것은 그녀를 모시면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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