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2화 (82/103)

산적 구자성 - [9]

달리는 차 안에서 허풍개는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리 가만히 있는 것마저 힘겨웠다. 앉아있는데도 몸이 무거웠고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피곤했다.

환각이 찾아오기 딱 좋은 조건이다.

반쯤 감긴 허풍개의 눈에 한 젊은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그녀······,

살아있을 적 그대로인 아내의 얼굴은 창백한 가운데 그늘이 졌다. 전체적으로 슬퍼 보였다.

그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허풍개가 말했다.

“바람피운 거 아니라니까······ 내가 지난 백 년간 얼마나 참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허풍개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슬픈 얼굴을 한 그녀는 지금 이렇게 따지는 듯하다. 아름다운 여제자를 구하겠답시고 발악하는 게 죽은 아내를 두고 할 짓이냐?

물론 그녀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 뿐이지만 허풍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했다.

환영과 환청이 맞물리지 않는 셈이지만 이상할 것은 없다. 환각은 내면의 반영이요, 이 모든 대화는 혼자서 하는 셈 아닌가.

자신의 수치심을 상대로 한 자문자답. 그 수치심은 아내의 얼굴을 하고 있다.

허풍개가 흐느꼈다.

“애초에 이쯤 지나면 재혼해도 누가 뭐라 하진 못할걸. 그렇다고 정말 재혼하겠단 건 아니고, 난 예나 지금이나······ 참았어. 참았다고······ 그러니까······”

하아린, 그녀에게 품은 감정은 단순한 연애 감정뿐만이 아니다. 그녀와 자신은 단 한 가지 감정만을 지속하기엔 너무 오랜 관계였다.

허풍개는 하아린을 생각했다.

나의 사랑. 때로는 딸 같기도, 때로는 누나 같기도 한 나의 가족. 나의 우상. 나의 제자. 그녀를 구하러 늙고 지친 몸을 끌고 가고 있다.

“괜찮아요?”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환각은 사라졌다.

허풍개는 급히 눈을 떴다.

운전하다 말고 차를 멈춘 걸까.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이도혁의 얼굴이 보였다.

이도혁의 눈이 불안감으로 떨렸다. 예전에 이도혁은 이 절세고수가 감정이 메말라버린 게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혼잣말하고 흐느끼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허풍개가 말했다.

“졸리네. 잠 깨게 뺨 좀 때려봐요.”

이도혁은 조금 주저하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

찰싹, 하는 소리가 났지만 이상하게도 뺨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소리가 귀를 자극하기는 했다.

정신을 바로잡은 허풍개가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이도혁은 방금 허풍개의 뺨에 닿은 제 손을 바라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이 너무 차가워요. 병원 가봐야······.”

허풍개가 대답했다.

“싸우는 중에 혈관이 너무 수축해서 그래. 전장에 나선 군인들한테 흔한 일이야.”

“흔한 일이요?”

“정상적인 일이라고. 그러니까 괜찮아. 의원 말 못 믿나.”

이도혁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지만 어쨌건 다시 운전했다. 차량이 어두운 밤을 달리는 가운데 허풍개는 생각했다.

이풍을 안 부르고 이놈을 부르길 잘했군.

이 멍청한 놈과 달리 이풍 그놈은 눈치가 빨라서 정말 병원에 가버렸을 것 아닌가. 일이 다 끝나지 않은 지금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기어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허풍개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 저 앞에 거대한 호텔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그 앞에 모여있던 황군 병사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홍나연이 급히 다가왔다.

“이률 씨! 아까 박 회장이······”

홍나연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허풍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크게 벌려졌다.

“괜찮아요?”

이년은 또 왜 이러나.

“뭐가요.”

“온몸이 피투성이신데요. 낯빛도······ 정말 괜찮으세요?”

지금 자신의 낯에 핏기가 하나도 없으리란 것은 허풍개도 알았다. 이미 잔뜩 쏟아버린 마당 아닌가.

허풍개는 귀찮은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안 괜찮으니까 빨리 합시다.”

허풍개는 절뚝거리며 호텔을 향해 다가갔다. 황군과 경찰들이 대치 중이었다.

“당신?”

경찰들은 허풍개를 제지하려 했지만 막상 허풍개가 가까이 다가오자 기겁해서는 그 몸을 붙잡을 엄두를 내지 않았다. 경관들은 눈만 껌벅이며 이렇게들 생각했다. 당장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장의사를? 정말이지 만지는 순간 쓰러질 것 같았다.

한편 허풍개는 호텔을 노려보며 눈을 감았다.

황군이 구자성을 포위한 마당이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구자성의 몰락 따위가 아니었다.

저 안에 월녀가 있는가가 중요했다.

원래는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에야 황군이 본격적으로 나서도록 요구할 예정이었는데, 막상 작전을 시작하고서는 그냥 저들이 먼저 움직이게 내버려두어야 했다. 과연 자신이 여기에 당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저기 계시나요?”

홍나연의 물음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녀가 저기 있었다. 허풍개의 감긴 눈에 태양처럼 일렁이는 기가 저 호텔 안에 보였다.

“5층, 저 방에.”

“아······.”

황군 병사들이 탄식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들을 내는 가운데, 허풍개가 말했다.

“박물관에서 칼 돌려받았죠.”

“예? 예.”

“줘요.”

홍나연은 여기 오기 전, 고궁박물관에 기증했던 사인검을 돌려받아 두었다.

그 칼을 허풍개에게 주었다.

허풍개는 사인검의 칼자루를 단단히 쥐더니, 발목에 총을 맞은 다리를 들어 올리고는 몸 전체를 뒤틀었다.

마지막으로 팔을 휘젓자, 야구선수의 투구폼과도 같은 일련의 동작 끝에 사인검이 그 손을 떠났다.

“어······”

호텔 5층을 향해 날아가는 사인검을 보며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스포츠에서 내공을 통한 도핑을 엄격하게 금하는 이유를 지금 장면을 촬영해서 보여주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듯 똑바로 날아간 칼은 기어이 조그마한 창문을 깨고 그 안에 들어갔다.

그것을 확인한 허풍개가 중얼거렸다.

“이제 됐어.”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온몸의 신경이 이완되었다.

바짝 조이듯이 수축했던 혈관은 원래의 크기를 되찾았고, 그와 함께 벌려진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전장의 군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다. 전투 후의 출혈. 군인들의 많은 사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쓰러진 허풍개의 주변으로 피 웅덩이가 커졌다.

*******

창문을 뚫고 사인검 한 자루가 들어왔을 때, 월녀는 조금 놀랐지만 그 자리에 굳어있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분명하지 않은가.

월녀의 시선을 받은 사인검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녀에게 다가온 사인검이 회전하자 그녀를 속박하던 사슬은 단번에 끊어졌다.

월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인검을 그 손에 쥐며, 자신을 가둔 문을 보았다. 굳게 잠겨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깨진 창틈으로 들어오는 별빛에 칼을 가져갔다.

아니, 별빛이 아니라 인공위성과 마천루의 LED 불빛들이겠지만 상관은 없다. 그래도 칼에는 별빛이 담겼으니.

별빛을 문고리에 찔러넣었다. 내부의 복잡한 장치들을 파고든 칼끝이 저 너머에 닿았다.

문이 열렸다.

“월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저들의 신원은 파악했다. 민간인인가?

아니다. 저들은 손에 흉기며 총을 들었다. 산적패로군.

절세고수의 모든 동작은 신속하기 그지없다. 그 칼 또한 그렇다.

아무런 전조 없이 사인검이 날아갔다.

어어, 하고. 아직 어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해 당황하는 산적들의 사이에서 칼 한 자루가 날아다녔다. 그 짧은 비행은 열 명 넘게 모여있던 산적들의 심장 박동을 오 초가 되지 않는 순간에 모조리 끊어놓았다.

월녀는 물끄러미 제 앞에 생겨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산적의 손에 총과 칼이 쥐어져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월녀는 적들에게서 무기를 노획하길 꺼리지 않았다.

*******

“선생님······ 선생님!”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그마저도 점차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허풍개는 이제 저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도 없었다. 그 몸이 아무런 저항 없이 저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눈이 저절로 감긴 가운데 내면에 침잠했다.

새하얀 번개가 어둠 속에서 거세게 진동하고 있었다.

저 번개는 자기 내면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지금 뭔 감정이 느껴지길래?

할 일을 마쳤다는 안도. 그리고 그마저 짓누르는 공포.

백 년 넘게 머리를 잠식해온 그놈의 공포는 이 순간 포효하듯 비명 지르고 있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정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을 비웃는 게 아니라 절규해주는군.

하기야 저 공포 또한 자신의 일부니까······.

이어서 허풍개는 자신의 내면에서 번개의 번쩍거림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어둠이 깔리는 것을, 자신의 온몸이 냉동실에 들어간 것처럼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끝이 찾아온 모양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소우주의 종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 조그마한 한 우주의 죽음.

하기야 하늘의 저 거대한 우주마저 언젠가는 모든 빛이 꺼지고 차갑게 식어버린다던가?

불멸이라던 우주마저 죽는데, 나 따위가 뭐라고······.

*******

늙은 산적, 구자성은 땀이 섞인 피를 온몸에서 흘렸다. 끔찍하게 힘들고 고통스럽다.

지금 상대하는 저놈의 칼이 몸에 직접 닿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는데도 베이고 있었다.

화산검법 중에서 화산파가 의병 활동할 때 개발한 검술은 워낙에 흉악하여 극한으로 익히면 칼질할 때마다 카마이타치가 나온다던가? 그걸 검풍(劍風)이라 불러줘야 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당하는 처지엔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챙, 하고. 또 한 번 충돌의 여파로 구자성은 또다시 고통을 느꼈다.

저놈의 칼을 분명 제대로 막아내었는데. 다가온 칼의 궤적으로 살이 잘려 나가는 통증이 퍼져나갔다.

뺨에 난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구자성은 흘러내린 피를 혀로 핥았다. 빌어먹을, 진짜 빌어먹을.

저놈이 저런 걸 할 줄 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언제 익혔는지 알 수 없다.

하기야 박 회장 저놈은 여기저기서 천억 원대 고수들을 초빙해서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무공을 수련한다고 들었다. 어지간한 무림인들보다 더한 무공광, 그 입에 처넣은 영약은 대체 어느 정도 가격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한편 구자성은 절세의 경지에 오른 후에는 딱 전투의 감각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수련했고 영약도 수명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만 섭취해왔다.

이미 전성기가 지나버린 자신이 제대로 싸워서 당해낼 상대가 아니다.

하물며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지금임에야.

앞서 무적무적자 그놈과 싸우다가 된통 얻어맞았지 않은가. 그 여파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도저히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빌어먹을, 그 미친놈은 총알을 몇 발이고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던데. 대체 그게 어찌 가능했는지 모를 일이다.

힘겨워하는 구자성을 보며 박 회장이 웃었다.

“뭐하냐, 산적 놈아. 싸우기 싫으면 목이나 내밀지?”

구자성은 콧김을 내뿜고는 양손으로 쥔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러면서 호흡을 골라 도끼에 무게를 불어넣었다.

거대한 충돌음 따윈 없었다.

천 근의 무게가 실린 도끼를 박 회장은 제대로 내리 찍히기도 전에 막아버렸다.

박 회장이 칼을 곧추세우자 거기 내려온 도끼날은 칼의 코등이에 닿았다. 박 회장이 든 칼의 코등이는 날개와 같은 장식이었다. 이물질이 끼기 딱 좋은 디자인인데, 지금은 도끼날이 그 사이에 끼어버렸다.

“씨······”

구자성은 급히 도끼를 회수하려 했지만 박 회장은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박 회장은 그대로 전진하여 서로의 결착 상태를 이어나갔다.

서로의 무기가 자유롭지 않은 가운데 몸싸움이 이어졌다.

“꺼져!”

구자성의 팔꿈치가 박 회장의 얼굴을 강타하려 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펄쩍 뛰어오르더니 대뜸 무릎을 쳐올리는 게 아닌가.

소림사 금강권의 승룡각(昇龍脚)이다. 스포츠 목적이 강한 현대 무술이 그렇듯 불가의 자비를 품어야 하는 소림사 무공에서도 무릎과 팔꿈치 따위 살상력 높은 신체 부위의 사용은 자제하는 법인데, 저 미친놈은 대뜸 무릎으로 그 턱을 갈기더니 이어서 종아리를 뻗어 구자성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턱과 배가 동시에 부러지는 충격 속에서 구자성은 어떻게든 손바닥을 뻗어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박 회장이 살짝 경직되었지만, 구자성은 공격을 이어나갈 여유가 없었다.

구자성은 숨을 돌리기 위해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여전히 그 온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싸움이 이어질수록 정신이 혼미해졌다.

구자성은 흘긋 눈을 굴려 다른 부하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제 총채주가 밀리는 상황에 초조한 눈치면서도 여전히 돕지 않고 있었다. 하여간 개 같은 자식들.

“그만, 그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찰들이 개입했다.

경관들은 경관봉이며 테이저건 따위를 들어 박 회장을 겨누었다.

박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자성과의 싸움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경찰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막아!”

열 명이 넘는 경관들이 다 같이 달려드는데도 박 회장은 제압되지 않았다. 절세고수답게도 역으로 그들을 제압해나갔다. 손바닥으로 후려치고 발로 오금을 꺾어버리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런 식으로 경관들을 쉽게도 쓰러뜨리고 있었지만 어쨌건 대뜸 칼을 휘둘러 그 목을 죄다 쳐버리지는 않았다.

덕분에 구자성은 싸움에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뒤돌아서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위층으로. 구자성은 위층 계단으로 달려 나갔다. 월녀가 있는 그곳으로.

최후의 발버둥을 실현에 옮길 때가 왔다. 구차해도 살려면 어쩔 수 없다.

하아린 그년을 붙들고서, 총구를 들이댄 채 죽이겠네 살리겠네 하면······.

계단에서 한 녹림도와 마주쳤다. 총채주의 얼굴을 본 녹림도는 시체와도 같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전했다.

“월녀가, 칼을······”

거기까지 중얼거리더니 녹림도가 앞으로 쓰러졌다.

드러난 그 등이 온통 새빨갰다. 등 한복판이 크게 베여있었다.

충격을 받은 구자성이 멈춰 섰다. 저 위층에서 총성이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비명 따윈 울리지 않았다.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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